170화. 전부 죽여야겠다. (1)
공작가에 일어난 끔찍한 참사 이후 아란트 제국의 중앙 귀족들은 비상이었다.
“그럼 지금 작위도 계승 받지 않고 시타타로 갔다는 겁니까?”
부모님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시타타로 떠나버린 스키르 때문이었다.
“변을 당한 사용인 가족들에게 후한 위로금을 지급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문제예요? 사용인들은 사용인들이고 이제 앞으로 공작의 자리가 비워두겠다는 겁니까?”
“하, 이럴 때 황제 폐하의 자리마저 비었으니…….”
공작의 작위는 아무에게나 내리는 게 아니었기에 문제가 더욱 컸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가 공작 자리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안 앉히면 어쩐답니까? 누구라고 주고 싶답니까?”
회의 때마다 언성이 높아졌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타타로 간 건 그렇다 치고 앞으로가 문제 아닙니까?”
“그렇다 치다니요?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시비에 백작이 보통 사람인 줄 알아요? 그 척박한 곳에 가서 지금 제국 하나를 통째로 사들일 만큼의 부를 축적한 사람입니다.”
“…….”
“그만한 돈을 가졌는데 왜 아직까지 거기 있겠어요? 나는 로드리고 백작가가 분명 무슨 일을 꾸미고 있다고 봅니다.”
“크흠.”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이 툭 튀어나오자, 사람들은 눈을 굴리며 눈치를 슬슬 살폈다.
“내 말이 틀립니까? 나는 옛날부터 시비에 백작을 봐왔던 사람으로서 하는 말입니다. 로드리고 가는 원래부터 보통 가문이 아니었어요.”
메릭 페어디프 후작이 쏘아 올린 신호탄에, 다른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크흠…… 저도 뭐 하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메릭 후작님 말씀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시타타로 쫓겨난 뒤에 조금 잠잠한가 싶었는데, 어느새 저만큼 치고 올라오지 않았습니까?”
이미 트여버린 물꼬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백작가가 공작가와 손을 잡은 것 역시 찜찜했어요. 아무리 자제들끼리 친분이 있다 해도 그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로드리고 백작가와 오닐 공작가가 엮인 일을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맞지요.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어요. 아니, 솔직히 원수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맨 처음엔 다들 시비에 백작이 속도 좋다며 대충 넘겼지만,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니…….”
“맞습니다.”
다른 귀족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 역시 황권엔 관심 없다며 선언까지 했지만…… 저는 이거 뒤가 구리다고 봅니다.”
“크흠…….”
모두의 생각이 같아 보이자, 결국 메릭 후작이 입을 열었다.
“나쁜 쪽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겠지요. 뭐 이 중에 누구는 백작가와 공작가가 이견이 생겨 로드리고 백작가에서 손을 쓴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몇몇이 숨을 들이켜고는 눈치를 살폈다.
“게다가 공작가의 차남은 장례가 끝나자마자 자연스레 시타타로 갔고 말입니다.”
사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입에 내지 않았던 일이었다.
“백작가의 행보를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지요. 누구의 생각처럼 공작가에서 황권에 관심이 없다 선언하자, 수가 틀린 백작이 공작가 일원 모두를 죽였을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잘못된 생각이 사실처럼 흘러갔다.
“그러니 내가 가보겠습니다. 아직은 심증만 있을 뿐이니 말입니다. 가서 생각이라도 한번 들어봐야 안 되겠습니까?”
***
시타타는 때아닌 귀족들의 방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매일같이 선물이나 연회 초대장이 오는 것은 물론이고, 시타타를 거들떠도 안 보던 귀족들이 직접 마차를 타거나 스크롤을 이용해 속속들이 방문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백작님께서 겪으신 고초를 압니다.’로 시작된 말은 결국 ‘무슨 뜻이 있으시거든 저희 가문을 잊지 말고 찾아주십시오.’였다.
때문에 시비에 백작은 요즘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으로…….’
공작의 작위를 내려받을 스키르 때문에 방문했다기엔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아직 스키르는 마음도 추스르지 못했다. 아니, 그 꼴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마음이 추슬러질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공작은 스키르에게 공작의 작위를 내려놓고 시타타에서 같이 살자고 할 참이었다.
“흐음…….”
시비에 백작이 집무실에 앉아 조금 전 도착한 연회 초대장들을 훑어보던 때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비에 백작이 책상 위에 놓인 초대장들을 한데 모아 두고 대답했다.
“무슨 일인가.”
“메릭 페어디프 후작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문 건너에서 들려온 소리에 시비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메릭 후작까지…….’
오닐 공작가 다음으로 권력이 강한 가문이었다. 그런 그가 직접 시타타까지 찾아왔다니.
“곧 나가지.”
시비에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접실 앞에서 작게 숨을 고른 시비에가 문을 열었다.
“하하! 시비에 백작. 오랜만이오.”
오랜만? 이십여 년 만이었다. 그럼에도 메릭 후작은 마치 몇 주 전에 본 사람처럼 밝게 웃으며 다가왔다.
“후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비에가 예를 갖춰 인사하자, 메릭이 껄껄 웃으며 자연스레 제 앞자리를 권했다.
“백작도 세월은 못 비껴가는군요. 하긴 나 역시도 그렇지만 말이오.”
시비에가 말없이 메릭 후작을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로 여기까지 왔을까. 설마 스키르를 내놓으라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시비에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내가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가 궁금하다는 얼굴이군요.”
“……사실 그렇습니다.”
메릭 후작은 제2황자의 편에 누구보다 빠르게 섰던 인물이었다. 고로 시비에를 쫓아낸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소리였다.
“그래요. 옛날 일은 미안하게 됐소이다.”
“사과는 괜찮습니다. 모두 지난 일 아닙니까.”
“그래요. 그래. 그래도 내가 참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아주었으면 좋겠소이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가문 역시 힘든 시기였소.”
2황자가 제 편에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했던 짓은 시비에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 페어디프 후작가는 없었다. 그들은 곧장 2황자의 편에 섰으니까.
“그렇습니까.”
시비에의 입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케케묵은 옛날이야기는 이쯤 접어두고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그러시죠.”
시비에가 소파에 몸을 살짝 기댔다.
‘네깟 게 아무리 대단했어도 지금은 아니다.’
옛날처럼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음…… 백작도 알겠지만 내가 돌려 말하는 걸 못 하니 조금 이해해 주시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몰라도 날 뒤흔들 수는 없을 거다.’
시비에가 속으로 거듭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혹시 백작이 공작을 죽였소?”
“이런 씨X!”
후작의 말에 곧장 튀어나온 욕지거리에 제 마음을 다스리던 주문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하하. 아니면 아닌 거지, 그렇게 흥분할 것은 없지 않소.”
시비에의 거친 욕설에도 후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차를 들이켰다.
“지금 그깟 소리를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보군요.”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맞지 않습니까? 뭐요? 내가 공작을 죽였냐고? 그게 지금 사람의 탈을 쓰고 할 소리입니까?!”
시비에의 언성이 여느 때보다 높아졌다.
“흐음……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하던데. 이것도 포함이오?”
후작의 능글맞은 웃음에 시비에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몰라도 여기서 절대 얻을 수는 없을 거요. 아니, 당신네들이 원하는 게 뭐가 됐든 절대! 절대 얻을 수 없을 거라는 말이오!!!”
“하하. 세월이 흘렀어도 그 성미는 여전하군요. 그렇다면 공작가의 차남을 이곳에 둔 이유가 뭐요? 아무것도 모르는 차남을 이용해 공작가를 꿀꺽하려는 심산이오?”
의도적인 도발이었다. 시비에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기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런 잡소리 할 거면 당장 가주시오. 내가 지금 당신에게 검을 겨누지 않는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닌 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니까 말이오.”
“백작가가 장사 수완이 좋다더니…… 백작의 언행을 보니 아주 장사치가 다 되었군요. 아주 상스러운 장사치처럼 말입니다.”
시비에가 두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더 이상은 당신과 할 말이 없겠소. 시타타에 머물지 말고 곧장 떠나주시면 좋겠군요.”
화를 꾹 누른 백작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하하. 뭐 백작령이니 쫓겨나도 할 말은 없겠지만…….”
후작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뭐 백작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하니…… 하지만 이곳에서 공작가 차남이 안전할지는 모르겠군요.”
후작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런 씨X자식이. 보자 보자 하니까.”
스키르를 위협하는 듯한 말에 결국 시비에가 폭발하고 말았다.
“너 이 새X. 넌 오늘 뒈졌어.”
시비에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 한편에 장식된 검을 집어 들었다.
“하하. 그건 좀 힘들겠어요.”
그러자 제 품에서 스크롤을 잽싸게 꺼낸 후작이 그것을 쭉 찢으며 말했다.
“이런 씨X!!!”
스크롤이 찢김과 동시에 옅어지는 후작의 몸을 향해 달려드는 시비에. 하지만 검은 허공을 허무하게 가를 뿐이었다.
“젠장!!!”
시비에의 거친 욕설에 사용인들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백작님! 백작님! 고정하세요. 예?”
사용인 하나가 용감하게 백작에게 달려와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조심히 빼냈다.
“으아!!! 이런 개자식들!!!”
평소에 온화한 성정의 백작을 두고 사람들은 뒤에서 바보 아니냐고 가끔 수군거렸다. 그만큼 백작은 화를 내기는커녕 모든 것을 허허 웃어넘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백작이 응접실에 놓인 검까지 빼어 들고 분개하고 있으니, 사용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아버지?”
그때 응접실이 소란스러운 것을 본 루카스가 시비에를 불렀다.
“루, 루카스?”
제 이런 모습을 사용인들이 본 건 아무래도 괜찮았지만, 제 아들이 보는 건 다른 문제였기에 시비에가 얼른 평정심을 되찾으려 애를 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아니다.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붉어진 시비에의 얼굴이나 당황한 사용인들의 표정만 봐도 아무 일도 없지 않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누가 왔었지?”
루카스가 사용인 하나를 불러 물었다.
“그, 그것이…….”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대도.”
제 걱정을 아들에게까지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무 일이 없는 게 아닐 텐데요.”
루카스가 인상을 찌푸리고 사용인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메릭 페어디프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다른 사용인 하나가 용기를 내 말했다.
“말하지 말래도!”
“사실 말하지 말라고는 안 하셨지요. 고맙네. 나가봐도 좋네.”
루카스가 사용인에게 튀는 불꽃을 얼른 수습했다.
“메릭 페어디프라. 결국 그자가 왔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시비에는 루카스에게 제국의 일을 시시콜콜 떠든 적이 없었다.
“그자가 뭐라고 했기에 이리도 화가 나셨습니까?”
루카스의 검은 눈동자가 백작을 향했다.
“……스키르를 두고 협박을 하더구나.”
결국 답답했던 백작이 제 아들에게 조금 전 있던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가 공작을 죽였냐고 물었다. 아들아, 내가 이런 소리를 들을 만큼 잘못 살았느냐?”
조금 전 속상한 일을 겪은 아버지의 푸념이었다.
“하아……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제국의 일과 엮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황권 따위에는 당연히 관심도 없다. 게다가 스키르를 여기에 두고 공작가를 꿀꺽한다니?”
백작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스.
“아휴. 내가 네게 이런 소리를 괜히 해서는…… 걱정 말아라. 스키르를 비롯해 백작가에 경호 인력을 더 늘리면 되니 말이다.”
“네. 너무 걱정 마세요. 아버지.”
루카스가 시비에를 보며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전부 죽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