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효자 (1)
며칠이 지나도 공작 부부의 소식이 없자 스키르는 다시 백작을 찾았다.
“혹시 아버지 소식은…….”
“허허. 걱정되느냐?”
“하하…….”
시비에 백작이 괜한 걱정이라도 한다는 듯 웃자, 스키르가 멋쩍게 머릴 긁적였다.
“그리 걱정되면 한번 가보는 게 어떠냐. 내가 스크롤은 준비해 주마.”
“하지만 다른 곳에 가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차피 가도 안 계실텐데…….”
“그래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아니냐?”
시비에가 싱긋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러니 한번 다녀와 보라는 이야기다. 궁금증이 풀리면 네 마음이 조금 편하지 않겠느냐.”
“사실… 그렇습니다.”
제 마음을 딱 읽은 듯한 시비에의 말에 스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집과 연락이 닿지 않은 게 처음인지라 사실 걱정이 되었다. 제 아버지인 시러스 공작은 그렇다 치더라도, 제 엄마에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래. 그럼 얼른 다녀와 보거라.”
“감사합니다.”
시비에가 서랍을 열어 스크롤 두 장을 내어줬다.
“아, 그래도 아이들에겐 말해주고 가렴.”
“예. 백작님.”
스크롤을 받아 든 스키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백작의 입에 미소가 어렸다.
“참… 시러스가 아들 하나는 잘 키웠어.”
편지를 보았음에도 제 부모의 안위를 확인하려는 스키르가 기특했다.
“이번에 다녀오거든 나도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야겠어.”
***
“폴라.”
“아, 키르.”
스키르는 떠나기 전 아이들을 찾았지만, 백작저에 남아있는 사람은 폴라뿐이었다.
“넬라는?”
“모르겠어. 이따 저녁에 오지 않을까? 요즘 바쁜 것 같던데.”
요즘 넬라가 바쁜 탓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폴라는 내심 서운한 기색이었다.
“그래?”
“응. 왜?”
때문에 스키르는 평소보다 더 폴라와 함께 붙어있으며 시간을 보냈었다.
“아, 집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엥? 집에는 왜? 곧 공작님이랑 여기로 오겠다 하셨잖아.”
“응. 그런데 좀…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가서 사용인들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좀 있고, 챙길 것도 좀 있어서.”
그러자 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 무슨 걱정?”
“그냥…….”
“걱정도 많다! 백작님께 편지도 왔다며?”
“그래도…….”
그에 하는 수 없다는 듯 폴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뭐 그럼 다녀와~ 나는 여기 혼자 있지 뭐.”
“걱정 마라. 얼른 다녀올 테니까.”
“걱정은 무슨! 그런 거 안 하거든?”
폴라가 입을 삐죽이자, 스키르는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언젠가… 폴라가 내 마음을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스키르가 어릴 때부터 폴라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그리고 스키르가 직접 제 마음을 표현한 적도 몇 번 있었고 말이다.
‘언젠가 네게 청혼할 거다.’
스키르는 용병 단원들에게 술을 얻어 마셨던 그날 용기를 내 폴라에게 제 마음을 고백했었다.
하지만 그때 폴라는 피식 웃으며 장난이라 치부하고 넘겼다.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가?’
며칠 뒤 다시 한번 용기를 낸 스키르가 맨정신에 다시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작은 웃음뿐이었다.
한번 용기를 내자 그다음은 조금 수월했다. 언제나 숨기기 급급했던 마음을 이제는 대놓고 표현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으니 말이다.
“왜. 내가 보고 싶을까 봐 그러나?”
“하! 어이없어. 너 자꾸 그럴래?”
“흠. 그럼 나는 네가 보고 싶을 것 같으니 일찍 돌아와야겠군.”
그에 폴라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는 혀를 쯧 찼다.
“됐으니까 얼른 다녀오기나 해.”
고개를 돌린 폴라의 옆모습을 보니 볼이 붉어져 있었다.
“크흠…… 그럼 다녀오겠다.”
“그러든지.”
싱긋 웃은 스키르가 스크롤을 찢었다.
***
공작저 앞에 도착한 스키르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분위기가 조금…….’
스산했다.
‘경비들은 어디에 있지?’
경비를 서던 기사들도 보이질 않았다.
“이런. 아무리 주인이 없다 한들!”
스키르가 신경질적으로 저택 문을 두드렸다.
-쾅쾅!
집주인이 자릴 비웠어도 경비가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식사 시간이나 교대 시간이라 하더라도 누군가 한 명은 자릴 지키고 서 있는 게 당연하다.
‘아무도 안 나온다고?’
하지만 경비병이 없는 것뿐 아니라 문을 두드리는데도 아무도 나와 보질 않았다.
-쾅쾅쾅!
다시 한번 문을 세게 두드린 스키르가 제 주먹을 살짝 문질렀다.
‘너무 세게 쳤나.’
인기척이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처음 느꼈던 불안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문틈을 살짝 살핀 스키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게 뭐야?’
저택 내부에 한 명쯤 사용인이 다니는 게 보여야 하는데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공작저를 찾는 사람은 하루에도 꽤 많았기에 이렇게 저택을 비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몰래 다녀오신다고 했는데?’
게다가 황족을 찾기 위해 비밀리에 떠난 공작 부부가 주변에 집을 비우는 것을 알렸을 리도 없다.
‘젠장.’
불안한 기분에 스키르가 제 품에 든 스크롤을 꺼내려던 때였다.
-끼익…….
저택 문이 열렸다.
“……?”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열린 문에 스키르가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스키르.”
그때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스턴이었다.
“……형님.”
“그래. 오랜만이구나.”
사라졌던 스턴이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에서 걸어 나오자, 스키르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것 참… 서운하구나.”
그런 스키르의 태도에 서운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스턴.
“오랜만에 뵙습니다.”
하지만 스키르는 그 자리에 서서 정중히 인사를 할 뿐 스턴에게 다가서진 않았다.
“그래. 내가 없어져서 많이 걱정했다지?”
“예. 부모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아, 아버님 어머님께서는 어디로 좀 떠나셨다.”
스키르가 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이냐? 방학 땐 원래 시타타에 머무르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걱정이 되어 왔습니다.”
“무엇이?”
“어머님 아버님께 연락이 닿질 않아 말입니다.”
그러자 스턴이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 스키르는 참 효자야.”
“…….”
“나는 천하의 나쁜 놈이고 말이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스턴이 천천히 다가왔다.
“왜. 맞지 않느냐? 나는 항상 부모님 속이나 썩이는 못난 자식이고, 넌 착하디착한 효자 아니냐. 응?”
스키르가 주춤주춤 물러나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스턴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왜. 내가 무서우냐?”
“아닙니다.”
“그럼 이 형님께 가까이 와보렴. 아, 그럴 게 아니고 함께 들어가야지. 네 집이 아니냐. 응?”
반쯤 풀린 스턴의 눈동자를 본 스키르는 생각했다.
‘당장 도망쳐야 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졌다.
“어서. 들어가재도?”
“저, 저는 이만… 이만 가보겠습니다…….”
“왜. 어딜 가려고. 응?”
“크윽!”
다가온 스턴이 스키르의 멱살을 잡아챘다.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지 궁금하지 않으냐? 가자꾸나. 데려다줄 테니.”
“저, 저는…….”
멱살을 잡힌 스키르가 저택으로 힘없이 끌려 들어갔다.
“이것 좀, 이것 좀 놓아주십시오. 형님.”
병아리 때 쫓기던 닭이 장닭이 되어도 쫓긴다고 하던가. 지금 스키르가 딱 그 꼴이었다.
이젠 스턴보다 조금 더 큰 키를 가졌음에도 스키르는 제 형이 무서웠다.
“제, 제발 놓아주십시오.”
하지만 무슨 힘이 그리도 센지 제 멱살을 잡은 손아귀는 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것 좀! 놓아 주십시오!!!”
결국 스키르가 제 형의 손을 거칠게 잡아 뿌리쳤다.
“……?”
뿌리쳐진 제 손을 한번 본 스턴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스키르를 쳐다봤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차라리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많이 컸구나. 스키르.”
“제발 이러지 좀 마십시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생각이십니까. 예?!”
스키르가 분한 마음에 버럭 소리치자, 스턴의 고개가 서서히 젖혀졌다.
“크… 크하하하! 크하하!!!”
고개를 젖힌 스턴이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제발요. 형님!!!”
스턴의 양어깨를 붙잡은 스키르가 간절히 외쳤다. 제발, 제발 좀 그만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스턴의 웃음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크하… 크하….. 하…….”
멎을 줄 몰랐던 스턴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제발요… 형님…….”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스키르가 애원했다.
“그래. 그래…….”
그러더니 스턴이 싱긋 웃었다.
“우리 지금 같은 표정을 하고 있구나.”
그에 스키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턴을 바라봤다.
“…….”
얼마 뒤 그 뜻을 알아차린 스키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같은 표정. 그것은 서로의 눈에 똑같이 맺힌 눈물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네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어야겠다.”
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 닦아낸 스턴이 스키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가라.”
“…….”
“당장 꺼져.”
저를 보내주는 게 자비라니? 스키르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닫힌 저택의 문을 바라보는 스키르.
“꺼지래도?”
스키르의 본능이 외쳤다. 당장 도망치라고.
‘하지만…….’
저 안에서 부모님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 계실지도 몰랐다.
“흐음…….”
멍하니 문을 바라보는 스키르를 쳐다보던 스턴이 몸을 돌렸다.
-달칵.
문손잡이를 천천히 돌리는 스턴.
“이 문이 열리면 넌 도망칠 수 없을게다.”
문고리를 잡은 스턴이 고개를 돌려 씨익 웃었다.
-끼이익.
문이 천천히 열리자 스키르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고, 저 문이 모두 열리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 늘어졌다.
“자, 이제 도망칠 수 없겠구나.”
결국 문이 활짝 열리고 말았다.
“자, 인사해야지.”
스턴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자, 맡아본 적 없는 고약한 냄새가 훅 풍겼다.
“으어…….”
스턴의 뒤로 보이는 끔찍한 풍경에 말을 잃은 스키르가 알 수 없는 소릴 내뱉었다.
허공에 매달린 수십 구의 시체들.
“우리 효자를 기다리셨나 보구나.”
저택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는 스턴.
“자, 뭐하고 서있느냐. 널 기다리시느라 눈도 아직 감지 못하셨다.”
그중 나란히 매달린 두 구의 시체 앞에 선 스턴이 짐짓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얼른 인사해라. 네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냐.”
말을 마친 스턴이 우아한 예법으로 먼저 인사를 해 보였다.
“이… 이게 무슨… 무슨…….”
온몸을 벌벌 떠는 스키르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아, 아니… 아닐 거야…….”
현실감이 없었다. 아무리 망나니 같은 제 형님이라 할지라도 설마 이런 일까지 벌였을 리가 없었다.
“쯧. 쓸모없는 자식.”
멍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스키르를 보며 스턴이 작게 욕지거릴 내뱉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뿌옇게 변해버린 눈과 머리가 멈춰버린 듯 멍했다.
“그런 멍청한 표정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스키르의 멍한 눈이 스턴에게 향했다.
“……아니지요?”
“응? 뭐가 말이냐. 아…… 이거?”
스턴이 허공에 매달린 시러스의 시신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했지.”
활짝 웃었다.
“으아아아!!! 이런 개자식!!!”
-투확!
스턴에게 달려들던 스키르의 가슴팍이 순식간에 꿰뚫리고.
“커어억…….”
앞으로 고꾸라지던 스키르를 스턴이 받아냈다.
“그래. 이렇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게다. 너는 효자가 아니냐.”
“커어… 억…….”
스키르의 입에서 토해진 붉은 피가 바닥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