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인간은 쉬워. 아주 쉽지.
스턴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루카스는 하셀을 찾았다.
“아, 오셨습니까.”
오랜만에 본 하셀의 얼굴은 폴리모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거 안색 좀 어떻게 해라. 나 보라고 일부러 그런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게냐?”
루카스는 걱정스런 마음에 괜스레 한소리 툭 던졌다.
“하하! 그럴 리가요.”
하셀이 차를 내어오는 동안 루카스는 할 말을 차분히 정리했다.
“향이 참 좋구나.”
“예. 픽시들이 어린잎을 따서 말리고 볶은 차입니다.”
“그래…….”
루카스가 차의 향 따위를 칭찬하며 말을 골라내는 것을 알아차린 하셀이,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 물었다.
“큰일입니까?”
그 질문에 루카스가 당해낼 수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큰일이라면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이 모두 큰일이 아니겠느냐.”
“로드께서 그런 표정을 하실 때가 언제였는지 저는 압니다.”
“하셀…… 나는 요즘 혼란스럽다.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찻잔을 내려둔 루카스의 눈이 고요했다.
“나는 오천 년이 넘는 시간을 지상 최강의 생명체로 군림하며 살았다. 오천 년 동안 살며 물론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질렀지만, 지금처럼 죄책감에 시달리고 잠 못 드는 밤은 아니었다.”
가슴 속에 묵어있던 감정을 털어놓는 루카스는 담담했다.
“……힘들구나. 내가 지었던 전생의 죄를 너희에게 모두 떠넘긴 것 같아 힘들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그 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로드.”
“그런데, 그런데도……!”
루카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해야 하는 일인데도 한낱 인간의 사사로운 정에 휘둘려서 망설이는 내가 싫다.”
루카스는 답답한 듯 마른세수를 하고는 손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습니다. 잘못된 결정을 하셔도 정에 휘둘리셔도 괜찮습니다.”
하셀이 말했다.
“제가 예전에 큰일을 쳤을 때도, 제 아들이 그랬을 때도 그러셨잖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잘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하셀.”
“그러니 괜찮아요. 잘 해결하면 됩니다.”
하셀이 싱긋 웃자, 거짓말처럼 모든 게 괜찮아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로드의 잘못이 아닙니다. 로드는 그때 우리를 지켜야 했으니까요. 다른 것도 아닌 일족의 알이 위협받지 않았습니까. 그게 잘못되었다면 지금의 아마록도 엘라스도 없었을 겁니다.”
“……”
“로드께서 지키신 겁니다. 저희 일족이 무책임하게 알을 잃어버리고 헤맬 때, 로드께서 하신 일을 저희는 알고 있습니다.”
하셀이 손을 뻗어 루카스의 손을 덮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로드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해보아라. 지금 부활교에 새로운 성녀라는 아이가 나타났다. 그 아이를 어찌해야 좋겠느냐.”
사실 하셀을 찾아온 이유는 파멜라의 처분을 묻기 위함이었다. 제 손으로 없애겠다 결심하고 파멜라를 찾아갔지만, 갑자기 스턴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 결심이 흔들리고 말았다.
“원하는 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머리가 시키는 일을 마음이 거부한다면 그걸 따르셔도 좋습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그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하셀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 마음을 모두 안다는 듯.
“그래. 그깟 인간 하나 당장 없애지 못한다고 무슨 큰 후환이 오겠느냐. 마족 놈들이 날뛰는 것을 한번 지켜봐도 좋겠지.”
“예. 한번 원 없이 날뛰어 보라고 하죠. 그래야 잡아 죽일 때도 기분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자, 루카스 역시 반대쪽 입꼬리를 따라 올렸다.
“그래. 그러지.”
***
방학동안 로드리고 백작가에 머무는 스키르는 초조한 듯 방 안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도대체 왜 연락을 받지 않으시는 거지.’
벌써 제 집과 연락이 닿지 않은 지 며칠이 흘렀다.
처음엔 그저 공무가 바빠서, 연회나 파티에 가셔서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사용인들은 왜…….’
게다가 공작저 사용인들이 대신 받게 되어있는 수정구마저 받질 않았다.
‘설마 다른 귀족가에서?’
지금 아란트 제국은 공석인 황제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아주 먼 황족까지도 샅샅이 찾아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전대 황제인 그래드가 1황자에게서 황권을 빼앗아 오면서 먼 친척들까지 찾아내 제 손으로 죽인 탓에 그들을 찾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때문에 다른 중앙 귀족들이 제국 내에서 가장 권력이 강한 공작가를 견제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하지만 시러스 공작은 그런 견제를 막기 위해 사전에 제국 법정에서 스스로 선언까지 했더랬다.
절대 황권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만약 공작이 그 약속을 어긴다면 그 누구도 공작가를 따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부러 취한 태도였다.
‘그럼 도대체…….’
스키르는 이미 다 뜯어 없어진 손톱을 다시 잘근잘근 씹었다.
“안 되겠어.”
결국 스키르가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당장 집에 가봐야겠다.”
그리고 사용인에게 시비에 백작이 있는 곳을 물었다. 떠나기 전 인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시비에 백작이 있는 집무실 문 앞에 선 스키르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너라.”
먼저 언질을 받은 것인지 시비에 백작이 직접 문을 열어주었다.
“감사합니다.”
집무실 안에 들어선 스키르가 꾸벅 인사했다.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아버지 어머니와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 때문에…….”
스키르의 말을 들은 시비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안 그래도 저녁에 말하려 했는데. 조금 전 공작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예? 그게 정말이십니까?”
시비에의 말을 들은 스키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니, 제 연락은 받지도 않았으면서 시비에 백작에겐 연락을 했다니?
“그래. 안 그래도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기에 걱정이 되어 사용인 하나를 보낼까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마침 연락이 딱 오지 뭐냐.”
시비에가 책상 서랍을 뒤져 편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급히 떠난 듯 보이더구나. 황족을 찾겠다고 나선 모양이야.”
“그렇다면 왜 수정구도 가져가지 않으시고…….”
“그 이유도 거기 적혀있더구나.”
스키르가 받아든 편지를 얼른 펼쳐 들었다.
-시비에 나일세…….
편지에 적힌 필체는 분명 제 아버지인 시러스 공작의 것이 맞았다.
-……그래서 수정구나 다른 것들도 가지고 떠나지 않게 되었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시타타에 들를 생각이니 가서 봅세. 아, 그리고 내 아들 스키르에게도 말 좀 전해주게.-
“아…….”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구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수정구도 들고 가지 않는다고 하니 뭐… 하지만 실력이 좋은 기사들 몇과 마법사를 데려갔다 하니 괜찮을게다.”
맨 마지막에 찍혀있는 인장 역시 제 시러스 공작의 것이 맞았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니 네 아버지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구나. 안 그래도 편지를 막 받은 참이라 이따 저녁에 말을 해주려 했는데. 녀석 참. 성격도 급하지.”
시비에 백작이 편지를 다시 서랍에 넣으며 웃었다.
“하하…….”
그 말에 멋쩍은 듯 제 머리를 긁적이는 스키르.
“그래. 그럼 이따 저녁에 다시 보자꾸나.”
“예. 백작님.”
방을 빠져나온 스키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아버님 어머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니…….’
괜한 걱정을 한 듯 싶어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
부활교가 성녀회로 이름을 바꾸고 며칠 지나지 않아, 리월은 변하기 시작했다.
파멜라를 볼 때마다 한시가 아깝다는 듯 애정 공세를 퍼붓던 그는 이제 없었다.
“거기! 이쪽으로 와서 이것 좀 가져가라고!”
사용인들에게 한없이 친절했던 그는 이제 소리를 치기 시작했으며.
“야.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사용인들을 밀치고 물건을 던지기까지 했다.
파멜라 역시 그런 리월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기에 몇 번이고 그를 만류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더욱 가차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겁니까? 아니, 그럼 저 자식을 이대로 놔두라는 겁니까?!”
파멜라에게도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너무도 순식간에 바뀐 리월의 모습에 파멜라는 혼란스러웠다. 그와 보냈던 행복했던 지난 모든 날들이 마치 꿈을 꾼 것처럼 아득했다.
‘아냐. 아닐 거야.’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리월은 너무 빨리 변해버렸다.
“흐윽…….”
그런 리월의 모습에도 그녀는 우는 것 빼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냐. 잠깐, 아주 잠깐이야.”
리월이 웃던 모습이 생생하다. 제 손을 어루만지고 뺨을 어루만지며 부끄럽다는 듯 붉히던 그 볼이. 혹시 제가 다칠까 상처받을까 무서워 떨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돈을 받게 된 게 문제일까?’
리월이 바뀐 것은 성녀회라는 이름으로 바뀐 직후였다.
‘돈이 욕심난 걸까?’
게다가 리월이 그 돈을 관리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게 접근한 것이 모두 돈 때문이었을까.
‘아니. 아닐 거야.’
그렇다기엔 리월은 그 돈을 너무도 착실하게 모아 성녀회의 재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질려버린 걸까?’
생각하고.
‘내가 혹시 뭔가 잘못한 걸까?’
또 생각했다.
-달칵.
그때 방문이 열리고 리월이 들어왔다.
“파멜라.”
다정한 목소리.
“울어요?”
며칠 전엔 저 목소리를 들으면 심장이 뛰고 가슴이 설렜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무서워.’
제게 소리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용인들에게 윽박지르고 물건을 내던지던 그 모습이 떠올라, 미친 듯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그래요. 응?”
파멜라가 몸을 떨며 고개도 들지 못하자, 리월이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하지 말아요…….”
무서웠다. 리월의 손길이.
“파멜라. 미안해요. 내가 화가 나서 그랬어요.”
그런 파멜라의 등을 다정히 쓸어 내리는 리월.
“파멜라 혼자 너무 고생을 하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그에 파멜라가 고개를 들었다.
“울지 말아요. 당신이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파요.”
리월이 조심스런 손길로 파멜라의 얼굴을 감싸 눈물을 닦아냈다.
“……리월.”
리월의 눈을 마주하자 조금 전까지 들었던 모든 생각이 거짓말처럼 잊혔다.
‘그래. 이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어.’
그러자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미안해요. 많이 놀랐죠?”
“흐윽… 흑…….”
리월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그러니까 이제 나를 화나게 하지 말아요. 응?”
파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신 이 사람을 화나게 하지 말아야지.’
혹여 리월이 저를 떠날까 싶어 걱정되었던 마음이 사그라들며 안도감이 찾아왔다.
“이제 내 말을 잘 들을 거죠? 날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말이에요.”
파멜라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리월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해야 해.’
한평생 환영받지 못했던 삶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에 들어온 리월은 처음으로 제게 다정했던 남자였다.
‘리월은 좋은 사람이니까.’
이토록 착한 사람이 화를 냈을 땐 분명 제 잘못일 것이다.
‘내가 나빴어.’
파멜라가 리월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그를 다시 놓친다면 저는 다시 세상에 혼자 남을 것이다. 그는 오롯이 제 편이며, 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요. 우리 착한 파멜라.”
파멜라를 품에 안은 리월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인간은 쉬워. 아주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