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커시스.
황실 기사단장인 커시스 레노엄.
그는 황제가 반쯤 미쳐버린 이유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커시스는 은푸른 머리를 지닌 정체 모를 사내에게 당했던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장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제의 서거 이후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한 경계심은 알고 있었다. 중앙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실의 더러운 일을 도맡아 하던 검은 조직들 역시 커시스를 찾아왔다.
“내 오랜 꿈을 이룰 때가 된 듯싶구나.”
제 단원의 물음에 잠시 생각한 그가 답했다.
“예?”
“내가 언젠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시골에 가서 조용히 농사나 짓고 싶다고 말이다.”
커시스는 지금이 바로 물러날 때라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 물러나지 않는다면 제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하하. 내 나이가 벌써 중년이 훌쩍 넘었다. 이제 검을 드는 것도 힘들어. 그리고 아직 장가도 못 갔으니 더 늦기 전에 짝이라도 한번 찾아볼까 한다.”
“정말이십니까?”
그에 커시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만 이렇게 했을 뿐 정말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나뿐인 제 여동생을 잃었던 그날, 커시스는 다짐했다.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으리라고.
‘그러려면 소중한 사람이 없어야겠지.’
커시스가 쓰게 웃었다.
“큰일이군요. 단장님까지 안 계신다면 지금 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다들 알아서 하실 게다. 나는 이제 물러나고 싶다.”
“예. 단장님께서 그러시다면 누가 말리겠습니까. 말려도 어차피 안 들으실 텐데요.”
“그래.”
사실 황제가 정신을 놓았던 그때부터 떠나고 싶었다.
제 동생의 죽음 뒤에 누가 있을 것 같으냐고 묻던 그 사내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기사단장 자리에 주어진 책임감이 그를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 묘하게 달라진 황제의 분위기와 말투.
커시스는 그런 황제의 곁에 머물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제 소임을 다했다.
“하. 단장님께서 떠나시면 저희도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지요.”
“떽. 나는 처자식도 없다지만 너희들은 아니잖느냐. 처자식 굶겨 죽일래?”
“저도 단장님 따라 농사나 짓죠. 뭐.”
다른 단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안 된다. 그러면 내가 기사단을 끌고 나가는 꼴이 되지 않느냐. 꿈도 이루기 전에 내 목이 먼저 날아가겠다.”
커시스가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그러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제국을 지켜라. 나는 내 농작물이나 지킬 테니.”
커시스의 말에 단원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잠시 고민하던 커시스가 입을 열었다.
“시타타.”
***
시타타에 도착한 커시스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대단하군.”
옛날에 봤던 척박했던 시타타는 이제 없었다.
마나석 광산으로 부흥한 로드리고 백작가가 이뤄낸 새로운 시타타는, 세련된 건물이 즐비한 소도시가 되어있었다.
“보고 가세요! 직접 재배한 싱싱한 채소 있습니다!”
상인들의 외침이 상점가에 활기를 더했고,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좋군.”
이곳이라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황실에서도 쉽게 건들지 못하는 곳이니, 제가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다 해도 누구 하나 관심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커시스는 골드 나인에서 운영하는 부동산에 들러 작은 마당이 딸린 아담한 집을 구했다.
상점가와는 조금 떨어져 있긴 해도 뒤에 난 숲길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게다가 주변에 사는 다른 이들도 없으니, 홀로 여생을 보내기엔 제격이라 생각되었다.
‘씨앗을 사야 하나.’
사실 농사에 대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농기구를 먼저 사야 하나.’
커시스가 상점가를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아. 점심을 먹을까.’
그러다 커시스의 눈이 작은 식당에 멈춰 섰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이제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딸랑.
커시스가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종소리가 그의 방문을 알렸다.
“어서 오세요!”
힘찬 종업원의 목소리에 커시스는 한번 싱긋 웃은 뒤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추천 메뉴가 있습니까?”
메뉴판을 보니 수많은 메뉴에 결정이 어려웠다.
“저희는 바게트와 함께 먹는 푸른 노루 고기가 일품입니다. 고기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면 후회 없는 선택이 되실 겁니다!”
종업원의 시원한 메뉴 추천에 커시스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힘찬 발걸음과 함께 사라진 종업원의 뒷모습을 보는 커시스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출발이 좋군.’
시타타에 온 첫날 좋은 집도 구했고, 괜찮은 식당도 발견했으니 기분이 좋았다.
“어? 로드리고가 영애 아니신가?”
“맞네.”
사람들의 말에 커시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창밖을 향했다.
‘아.’
창밖을 보니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호위도 없나.’
그래도 명색이 백작가의 영애인데, 호위나 시종도 없이 지나는 모습이 뭔가 어색했다.
“상급반이라고 했지?”
“그래. 저 나이에 상급반이면 수재지. 수재.”
“그러게. 로드리고가에서 마법사가 둘이나 나왔네 그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 그래서 호위가 없었던 건가.’
저들의 말대로 마법 아카데미 상급반에 다닌다면, 제 몸 하나 정도는 쉽게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자! 식사 나왔습니다.”
때마침 음식이 나오고, 커시스가 시선을 돌렸다.
***
화려한 연회장 안. 그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잿빛 피부를 가진 그들의 이마엔 각기 다른 크기의 뿔이 솟아있었다.
“야스탄 폐하 드십니다!”
상석에 선 마족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을 향했다.
이어 그곳에 나타난 왕을 본 마족들이 큰 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왕이 돌아오셨다!!!”
“야스탄 폐하께서 돌아오셨어!”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누구보다 크게 솟은 뿔이 왕의 위용을 한껏 뿜어냈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 그가 아래를 향했던 눈을 위로 떠 올리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다들 고생 많았다.”
환호성이 멈췄다.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 이 땅에 두고 간 가여운 후손들을 잊지 않고 말이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그대들에게 사과하고 싶다. 천 년 전에 저질렀던 나의 어리석은 실수를 말이다.”
그의 고요한 눈이 제 백성을 주욱 훑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다신 어리석은 실수 따윈 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가 짧게 고개를 숙이자, 그를 지켜보는 마족들의 눈에 존경심이 가득 차올랐다.
“우린 쫓겨났고, 도망쳤다. 우리의 가여운 후손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어. 그들은 빛도 잘 들지 않는 숲에 숨어 살며 우리를 원망했다.”
야스탄이 한 손을 들어 제 가슴을 쿵 내리쳤다.
“원통하고 분했다. 인간에게 속은 어리석은 내가 미웠으며, 이런 나를 왕이라고 따르는 그대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허나.”
야스탄이 상석에서 한 걸음 내려왔다.
“우린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다시 한 걸음.
“우릴 속인 인간들을 무참히 벌할 것이고.”
다시 한 걸음.
“인간에게 핍박받은 가여운 종족들을 구할 것이다.”
그가 멈춰 섰다.
“그리고 우릴 쫓아낸 건방지고 고고한 드래곤들에게 복수할 것이다.”
그러자 고요했던 장내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
“자,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넓은 초원 위에 지어진 작은 움막들.
그 속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연기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람들은 줄을 서서 제 몫의 음식을 받아 가며 감사를 전했다.
“얀테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스튜를 떠서 나눠주는 사내가 따스한 목소리로 말하자, 사람들은 하나 된 목소리로 말했다.
“레니엔토.”
“믿습니다. 레니엔토.”
“얀테님께서 다시 한번 부활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모두 갈 곳이 없는 부랑자들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습격 이후 부활교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많은 교인들 역시 재앙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분노를 감당하기엔 겁이 났던 것인지 발길을 끊었고, 한동안 부활교는 이단이라 불리며 손가락질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그들이 쌓아온 수많은 선행들이 부활교의 명맥을 잇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숲과 섬에 숨어 교리를 전파했으며, 모아두었던 재산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때문에 떠났던 교인들도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남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피에렌테님.”
이제는 사제복 대신 평상복 위에 푸른색 리본을 단 하위 사제가, 보라색 리본을 단 고위 사제에게 다가왔다.
“아, 네. 보테님.”
“아까 말씀하셨던 움막 수리는 모두 끝났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른 보테님들도 식사를 하셔야 할 텐데요.”
고위 사제가 걱정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저희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다들 믿음이 충만하시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그러자 하위 사제가 싱긋 웃으며 제 배를 두드렸다.
“저희는 이 커다란 축복 속에 모두 배가 부른 이들이지요. 하지만 식사는 하셔야 합니다.”
다정한 그들의 말을 듣던 신도들이 삼삼오오 모여 제 그릇의 스튜를 한 스푼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옌테님들!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만 배가 부를 수는 없지요.”
“맞습니다. 사제님들이 아니셨더라면 저희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걸요.”
“이렇게 사제님들을 만나게 되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인지 모릅니다.”
신도들이 한 스푼씩 덜어 모은 다섯 그릇의 스튜가 사제들의 앞에 놓였다.
“정말 다들 감사합니다.”
그러자 고위 사제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 큰 기쁨입니다.”
“레니엔토.”
스튜 그릇을 받아 든 고위 사제가 활짝 웃으며 숟가락을 들던 때였다.
“피에렌테님!”
멀리서 붉은 리본을 단 사내 하나가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에디 에렌타님.”
“불이, 불이 난 것 같습니다! 저기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을 보자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이곳은 초원이었다. 이대로라면 불길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이곳을 덮치고 말 것이다.
“다들 이곳에 계십시오.”
그가 스튜 그릇을 내려두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안 됩니다! 멀리 보여도 순식간에 이곳을 덮치고 말 거예요. 다들 대피해야 해요!”
다른 사제 하나가 뛰어나가던 그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는 괜찮다는 말을 남긴 채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어쩜 좋아요. 이러다가 피에렌테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남겨진 사람들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다른 사제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저쪽에서 불이 났어요. 그런데 지금 피에렌테님께서 불길 쪽으로 뛰어가셨어요.”
그 말을 들은 사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스턴 피에렌테님께서요?”
그러자 신도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사제가 스턴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