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설득 (2)
예상 밖의 선전이었지만, 아만의 표정은 뾰로통했다.
“쳇. 아니,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투르캄이 저를 쏙 빼고 루카스와 이야기를 한 것에 짜증이 난 듯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흥! 건방지지 않습니까? 도대체 저를 쏙 빼고 할 이야기가 뭐가 있었습니까?”
“별건 아니었네.”
정말 별게 아니긴 했다. 루카스는 그저 투르캄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이 너무 냉혹하고 가혹할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종족 전쟁. 그것은 이 땅을 피로 물들게 할 것이었다.
그리고 누구나 알다시피 드래곤은 그리 자애로운 종족이 아니었다.
지상의 왕은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신하들을 무참히 도륙할 것이다. 마족 역시 피로 물든 땅 위에서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하려 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조금 석연찮은 점이 있네.”
“석연찮은 점이라뇨?”
마족들은 투르캄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최고의 제작자를 제 편에 두는데 원하는 것이 없다니?
“마족들이 드워프들에게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더군.”
“흠…… 그건 로드의 말씀대로 조금 석연찮네요.”
아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투르캄이 그러더군. 마족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모든 종족을 적으로 돌리게 될 거라고 했다고 말일세.”
“하. 그 말인즉 이미 대부분의 종족이 마족의 편에 섰다…… 뭐 그런 말입니까?”
“모를 일이지.”
그렇게 되었다면 정녕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괜찮은가?”
아만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저희가… 그렇게나 잘못했습니까?”
“…….”
“저들에게 그렇게나 나쁜 종족이었습니까.”
떨리는 아만의 목소리가 루카스의 마음을 찡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강한 것이 저들에게 그리도 큰 잘못이었습니까. 강한 힘을 가진 우리가 저들의 아픔을 돌보지 못한 것이 그리… 그리 큰 죄였냐는 말입니다.”
“억울한가.”
루카스가 아만의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럴 수 있다. 배신당한 기분이겠지. 드래곤 역시 강한 힘을 가졌을 뿐, 하나의 종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인간이 이종족을 핍박한 것은 너희의 죄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를 이토록 미워합니까.”
“저들은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게다. 사실 드래곤에겐 죄가 없지. 네 말대로 강한 힘을 가졌을 뿐이니 말이다.”
루카스의 말에 아만은 더욱더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허나. 저들에겐 왕이 아니냐. 우리 역시 지상에 발을 디딘 모든 종족 위에 군림하지 않았느냐는 말이다. 공포를 바탕으로 한 저들의 존경을 당연시하지 않았느냐.”
아만의 잇새에서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우리 역시 저들의 왕이라 생각하고 살지 않았느냐.”
“…….”
“그러니 저들 역시 억울할 것이다. 왕이 된 자들이 자신들을 내팽개쳤으니 말이다. 돌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네가 억울한 것도,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것도 다 그곳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느냐.”
알겠다는 듯 아만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만 이해가 됩니다. 마음은 아직도 조금 서글프고 억울하고 그렇습니다.”
“하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러니 한번 해보자꾸나.”
너무나도 솔직한 아만의 속마음에 루카스가 웃어 보였다.
“그리고.”
“……?”
“저들이 이종족을 설득하는 것 역시 석연찮다. 픽시들도 그렇고 모든 이종족을 설득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루카스의 말에 아만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계속 찜찜했다.
마신을 등에 업은 자들이 굳이 왜 모든 종족을 설득하려 나선다는 말인가?
“픽시들의 주술은 대단하지. 그 힘이 모인다면 그들에게 필시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종족들까지 모두 끌어들인다는 것은… 이상하다. 분명 무언가 더 꾸미는 일이 있을 게야.”
“그냥 뭐 우리를 돕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닐까요?”
그에 루카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어차피 종족 전쟁으로 번지게 되면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바스러질 텐데 말이다.”
“아.”
“가자꾸나.”
루카스가 팔을 내밀었다.
***
그들이 온 곳은 세이렌의 영역였다.
“여기에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니.”
물 속성이 강한 블루드래곤은 세이렌의 영역을 좋아했다. 또한 그들 역시 자연과 벗 삼아 사는 종족인지라 드래곤의 방문을 언제나 반기기도 했고 말이다.
“길을 몰랐습니다.”
“어이없는 소리군. 하셀에게만 물었어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예전에 노예선에서 세이렌 한 마리를 구했을 때도 아만은 세이렌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설마 그들을 찾아본 적도 없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크흠. 로드? 그건 뭡니까?”
루카스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기에스티오가 준 목걸이를 꺼내 걸었을 때였다.
“왕이 준 거다.”
커다란 사슬 목걸이가 우스웠는지, 아만이 피식, 하고 웃어 보였다.
“모양은 이래도 굉장히 효과가 좋은 물건이다.”
“푸흡! 예. 알겠습니다.”
루카스가 아만을 한번 째려본 다음 걸음을 옮겼다.
입구에 다다르자 지난번과 같이 경비를 서던 세이렌 하나가 헤엄쳐 다가왔다.
“오셨군요. 아, 이번엔 드래곤님도 함께 오셨군요.”
아만을 알아본 세이렌이 고개를 꾸벅 숙여 예를 표했다.
“예.”
“기에스티오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이렌의 자연스러운 태도에 아만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종족들은 드래곤이라는 존재를 마주하기만 해도 덜덜 떨기에 바빴는데, 세이렌은 달랐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레 인사를 건네고 그들은 안내하는 모습에 아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뒤를 따랐다.
‘하긴 아마록은 이런 일이 처음이겠군.’
루카스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그가 살았던 오래전엔 모든 이종족들이 이런 태도였다. 드래곤을 겁내기보다는 강한 친구쯤으로 여기기도 했으니 말이다.
드래곤들 역시 그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친분을 다지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벽 없는 친분은 점점 사라졌고, 세대가 거듭될수록 친분은커녕 드래곤에 대한 공포만 남게 되었다.
‘옛날엔 모두 이러했지.’
아만의 옆을 따라 걷던 루카스가 쓰게 웃었다.
“자, 들어가시지요.”
끝까지 그들을 안내한 세이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오오!!!”
문이 채 전부 열리기도 전이었다.
“아니! 이렇게 반가울 때가!”
천천히 열리던 문을 벌컥 열어젖힌 기에스티오가 우람한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다가왔다.
“아니, 아니! 드래곤님까지 오신 겁니까!”
기에스티오의 허리춤에 달린 작은 지느러미가 세차게 요동쳤다.
“크흠…….”
아만의 손을 덥석 붙잡은 기에스티오가 물거품을 만들며 손을 위아래로 흔들자, 아만이 결국 작게 헛기침을 해 보였다.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또 결례를 범했군요. 어서, 어서 들어오시지요.”
기에스티오는 어찌나 신이 났는지 앞장서서 가다 몸을 돌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제 부모를 재촉하듯 말이다.
“자, 자.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너무나도 신난 세이렌 왕의 모습에 아만은 넋이 살짝 나간 듯 보였다.
“저… 로드… 원래 이런 겁니까?”
결국 아만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자다.”
“……예.”
그에 아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다가도 기에스티오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억지로라도 웃어 보였다.
“허허허! 이게 무슨 일인지. 어쩐지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군요.”
자리에 앉은 기에스티오가 신이 나 떠들기 시작했다.
“어제 꿈에 제가 다리가 생겨 육지에 나갔지 뭡니까? 그곳에서 아주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는 꿈이었는데, 바로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 생겨나다니!”
“하하…….”
아만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드래곤님.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블루 드래곤님께서 새로 태어나셨다는 소식은 벌써 몇백 년 전에 들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자신을 반기는 것도 모자라 늦었다고 타박까지 하다니. 이제 아만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리 와주신 것이 어디입니까? 정말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그 수가 많지 않은 만큼 탄생 역시 드문 일이었다. 때문에 같은 속성의 드래곤이 있더라도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만은 현재 유일한 블루 드래곤이었다.
‘하긴 아만 외에 마지막 블루가 죽은 것이 이백 년쯤 되었으니 반가울 만도 하겠군.’
신이 난 기에스티오와 달리 아만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혹시 불편하신 겁니까? 하하! 제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랬나 보군요. 사실 베오르딘님께도 타박을 많이 받았었지요.”
“아. 베오르딘님.”
베오르딘은 이백 년 전에 죽은 블루 드래곤이었다.
“오오! 베오르딘님을 아십니까?”
“물론이다. 베오르딘님은 내게 아버지 같은 존재셨지.”
제가 아는 이름이 나오자, 드디어 아만의 입이 열렸다.
“오오! 맞습니다. 저 역시 베오르딘님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그런가.”
“예. 물론이지요. 그보다 이렇게나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드래곤님까지 함께 오실 줄이야.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그에 루카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에스티오님께서 해주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에 아만이 눈을 슬쩍 흘겼다. 도대체 기에스티오가 해준 것이 무엇일까 싶은 것이겠지.
“그보다…….”
루카스가 입을 떼다 다시 다물자, 기에스티오가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부추겼다.
“말씀하시지요.”
그에 루카스가 잠시 말을 골라냈다.
‘그래. 확인해야겠지.’
사실 그에게 마족이 찾아왔느냐 묻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걱정이 되었다. 혹시 그들이 마족의 편에 섰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말이다.
“혹시 마족이 찾아왔습니까.”
“예? 아, 하하하!”
루카스의 질문에 기에스티오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그것이 궁금해서 오신 거군요. 예! 맞습니다. 마족이 찾아왔습니다. 아니, 이 깊은 곳까지 어찌 알고 왔는지. 감사하더군요.”
“…….”
그의 말에 아만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오!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상에서 마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도,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말입니다.”
그에 기에스티오는 손사래를 치며 먼저 선수를 쳤다.
“그들이 혹시 찾아와 뭐라고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물론입니다. 대충 알고 오셨겠지만, 자신들의 편에 서달라 뭐 그런 말을 하더군요.”
그에 루카스와 아만이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제게 바다는 건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하! 그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바다는 저희들이 가진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저희 역시 이곳에 얹혀사는 것일 뿐인데요!”
참신한 그의 반응에 아만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리고 그런 말도 하더군요.”
“……?”
“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육지를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힘을요.”
“아.”
루카스와 아만이 동시에 탄식했다. 저런 제안이라면 세이렌들 역시 흔들릴 법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지상을 궁금해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바다에 얹혀사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말입니다.”
기에스티오의 표정이 한없이 온화했다.
“또한 오랜 친구인 드래곤을 배신하는 일은 할 수 없지요. 그들이 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했다 한들, 제 친구의 등에 칼을 꽂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에 감동받은 아만은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기에스티오라 했나.”
“예.”
“소개가 늦었네. 나는 아마록 테리디어일세. 자네의 새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뜬금없는 아만의 말에 기에스티오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하하하!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화통하게 웃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