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준비 단계.
“끄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각인 시험이 끝난 교실 앞에선 아이들의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 맞다. 그래도 이번엔 통과하지 않았나.”
폴라의 짜증 섞인 말에 스키르 역시 작은 한숨을 내쉬며 동조했다.
“야, 통과가 문제야? 이번엔 시험 난이도를 낮춘 거라잖아. 지난번 시험 때 학생들의 형편없는 실력은 아주 잘 알았다면서 비아냥거리던 교수님 말 못 들었어?”
각인 교수인 스니더는 지난번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모든 학생들을 향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더 나아가 제국의 미래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아카데미 학비를 대는 학생들의 부모까지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자, 몇몇 학생들이 목소리를 높여 항의하기까지 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언니. 그래도 잘 봤으니 됐지.”
“나는 저 교수 너무 싫어. 너무!”
지난번 시험과 달리 이번 시험에서는 저주지만, 저주가 아닌 듯한 문제가 출제되었다.
“아니, 그런데 그깟 걸 각인해서 뭐 한다는 거야?”
“그냥 시험 주제였잖아. 너무 열 내지 마. 폴라.”
결국 루카스 역시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맞잖아. 물건을 만지면 10초 동안 말을 못 하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그건 그래…….”
이번 시험의 주제는 사일런스 마법의 기출변형과 비슷한 것이었다.
스니더는 아직 상급반 학생들이 저주 각인을 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런 주제를 낸 것이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생각은 달랐다. 모든 마법은 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녔다.
‘응용을 잘하던 놈이 있었지.’
루카스는 언젠가 만났던, 유능하지만 길을 잘못 들어섰던 한 마법사를 떠올렸다.
‘죽었지만.’
루카스는 지금 아이들의 실력이 절대 그 사내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응용능력과 실전 경험이 떨어질 뿐.
“꼭 그런 건 아냐. 스니더 교수가 낸 문제는 언제든 쓰일 수 있어. 주문 없이는 마법을 못 쓰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 아니, 대부분의 마법사가 그렇다고 해도 과언이 아냐. 급박한 전투에서 10초 동안 마법사의 입이 막힌다면? 판세가 뒤집히겠지.”
“아.”
루카스의 말에 넬라가 탄식했다.
“그래. 하지만 큰 전투에서는 대부분 그에 대한 방어를 견고히 갖추기 때문에 그럴 일은 많이 없겠지만,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야.”
그제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치…… 그래도 나는 각인 너무 싫어.”
“사실 나도 각인이 싫긴 하다. 모든 마법과 분야를 배워야 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각자 잘하는 분야를 더욱 심도 있게 배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키르. 네가 웬일이야? 맞는 말을 다 하고. 평소엔 처맞는 말만 하더니.”
“폴라! 처맞는 말이라니…….”
스키르는 폴라의 말에 당황한 듯 보였지만, 앞서 해준 칭찬 때문인지 눈은 왠지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통과했으니 됐어.”
복도를 걷던 그들이 카페테리아에 도착했다.
“나는 오늘 점심 안 먹을래.”
넬라였다.
“응? 왜?”
“그냥. 입맛이 별로 없어서.”
폴라의 말에 넬라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럼 다들 밥 맛있게 먹고 이따 보자.”
넬라가 손을 흔들며 돌아서자, 폴라는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멈췄다.
“에휴…….”
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던 건가? 혹시 넬라랑 싸웠나?”
평소와는 다른 넬라의 모습과 한숨을 내쉬는 폴라. 그에 스키르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니…… 싸우긴.”
“그런데 왜 너는 한숨을 쉬고 넬라는 밥을 거르는가.”
“그냥…… 넬라가 어제 나에게 무슨 말을 좀 했어.”
자리에 앉은 폴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뭐 먹을래?”
그 모습에 루카스는 먼저 아이들에게 주문을 요구했다.
“나는 샌드위치. 키르는?”
“나도 같은 걸로 하겠다. 아, 양파는 빼줬으면 좋겠군.”
“그래.”
루카스가 묵묵히 아이들의 주문을 받아줬다. 평소엔 넬라가 어린 본인이 하겠다며 나섰던 일이었다. 그에 스키르나 폴라가 항상 넬라를 도왔고.
‘오늘은 내가 하지 뭐.’
루카스는 요즘 여유로운 마음이 모든 곳에서 작용하는 것을 보고 내심 또 기분이 좋아졌다.
“자.”
샌드위치를 받아 온 루카스가 아이들에게 건네자, 스키르는 먼저 폴라의 샌드위치 포장을 먹기 좋게 벗겨줬다.
“자. 먹어라.”
“고마워.”
익숙한 듯 먼저 그것을 받아 든 폴라가 다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말을 해보아라! 넬라가 뭐라고 한 것인가. 심각한 일인가?”
스키르의 채근에 폴라는 테이블에 떨어진 양상추 한 조각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넬라가 사실 많이 서운했나 봐.”
폴라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루카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스키르 역시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혹시 몰라 다시 물었다.
“말은 괜찮다고 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
폴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넬라는 그동안 서운한 것들을 잘 풀어서 말한다고 했지만, 사실 중간중간 그 감정이 터져 나온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폴라는 파멜라를 만난 뒤부터 매 쉬는 시간마다 제 언니를 찾아 도서관에 쪼르르 달려갔다.
게다가 수업이 모두 끝난 다음엔 쪽지까지 주고받으며 애틋한 연인처럼 굴었으니, 넬라 입장에서는 서운할 일이었다.
“그러면서…… 방을 혼자 쓰고 싶다고 했어.”
결국 넬라는 서운한 감정을 모두 토해내고 방을 혼자 쓰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넬라가?”
그건 루카스 역시 조금 놀라웠다.
“응. 진짜 많이 서운했나 봐. 그런데 넬라는 내가 좋으니까 그런 서운한 감정을 앞으로 덜 느끼려면 나와 거리를 둬야겠다고 했어.”
거기에 더해 폴라의 친자매는 파멜라니까 본인이 욕심내지 않는 것이 옳다고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루카스는 조금 속이 상했다.
‘부모를 잃고 온 아이에게 가장 가까이서 곁을 내어준 사람이니…….’
넬라는 폴라 덕분에 빠르게 안정을 찾고 아카데미에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폴라에게 의지를 많이 했던 듯싶었다.
“나 이제 어쩌면 좋지?”
폴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으으…… 나는 이런 문제는 조금 어려운데. 루카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루카스는 입 안에 있던 샌드위치를 천천히 씹어 넘기며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어쩌긴.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다시 잘해봐야지.”
루카스 역시 서툰 연애 상담을 하는 듯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이건 진짜 어쩔 방법이 없었다. 폴라에게 그토록 찾던 제 언니인 파멜라와 거리를 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폴라와 파멜라는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만큼 더욱 특별하고 애틋한 자매였다.
그런 그들에게 넬라가 들어갈 틈을 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틈을 내어주라고 하고 싶지도 않고.’
게다가 루카스는 아직 파멜라가 못마땅했다. 어딘지 모르게 찜찜하고 거슬렸다.
“휴…….”
테이블 위에는 한숨만 길게 이어졌다.
***
하셀과 장로들은 그동안 이종족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설득했다.
“콱 전부 몰살시켜 버렸어야 했는데.”
짜증 섞인 말을 뱉는 사람은 머리와 눈동자가 타는 듯한 붉은 색을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지 않기로 했잖아? 테네.”
하셀이 그런 그녀를 다정히 다그쳤다.
“맞잖아요? 어디 감히 드래곤이 셋씩이나 갔는데 저런 시건방진 태도라니. 게다가 엘프들은 원래 마음에 안 들었어요.”
“크흠…… 사실 테네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 않나.”
앨리와 같은 금발과 금안의 사내였다. 이제 사내의 찬란한 금발과 테네의 붉은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위화감까지 들었다.
“아프레님. 적들의 전력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들이 등에 누구를 업은 건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아니, 그깟 상급 신 하나 등에 업었다고 하찮은 마족들이 뭐 드래곤이라도 된답니까!?”
하셀의 말에 테네가 불쑥 나서 소릴 빽 질렀다.
“어휴. 테네. 나 귀 떨어져.”
“맞잖아요. 아프레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세요? 뭐 저것들이 마신을 등에 업었다고 드래곤 무리라도 되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닌 말로 마신이 지상에 내려와 마족들을 도와 설치는데 다른 신들이 가만히 있겠어요?”
여자가 와다다 쏘아붙이자, 아프레라는 금발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테네와 같은 생각이긴 하네. 솔직히 저들이 아무리 타라스를 등에 업었다 한들 마족은 마족일세. 자네와 내가 브레스라도 한번 쏘는 날엔 우르르 쓸려나갈 거라는 말일세.”
“맞아요! 안 그래요? 하셀님?”
하셀은 머리가 아팠다.
그나마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장로 두 명이 이런 상태였다. 그런데 다른 드래곤들은 말해 뭐 하겠는가.
“후…….”
하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하셀님. 저도 나름 살 만큼 산 용인데 이해가 안 돼서 그래요. 하셀, 아니, 이제 로드구나. 로드께서는 저들이 우리를 쫓아내는 것이 진짜로 가능하다고 보시는 겁니까?”
테네의 말에 하셀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숨을 골라냈다.
“테네 그리고 아프레님.”
하셀의 부름에 아프레와 테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셀은 결국 이 둘의 생각이라도 고쳐 놔야겠다 마음먹었다.
“타라스는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셀의 말에 아프레의 눈이 커졌다.
“지금 주신의 자리는 공석입니다. 백 년쯤 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타라스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을지 모릅니다. 마족들을 마계에서 꺼내는 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다는 듯 테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그게 확실한 정보인가?”
“사랑의 신 아모레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허…….”
그들에게 아모레라면 응당 믿을만한 신이었다. 태초부터 존재했으며, 엄청난 권능을 가진 사랑받는 신 아모레.
“아모레님을 만났는가?”
“예.”
아프레의 말에 하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했겠구먼.”
“예. 생각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지만 말입니다.”
“오…….”
“그러니 제가 이리도 발을 동동 구르는 것입니다. 저 역시 이렇게 이종족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셀 역시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하는 일이었다. 왕이 신하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왕권 다툼하는 황자들 마음이 이랬던 건가.’
지금 하셀은 왕권 다툼을 하느라 귀족들을 찾아다니며 힘을 보태달라고 부탁하는 황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있을 겁니다. 저는 솔직히 도저히 못 하겠어요. 엘프들 냄새만 맡아도 짜증이 나고 저 새끼들 숲만 보면 불을 콱 질러버리고 싶은 걸 어떡해요?”
“…….”
“아니, 쟤네는 왜 저렇게 나무를 좋아해? 짜증 나게. 확 다 불 질러버리고 싶게.”
레드 드래곤인 테네는 말 그대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공격력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강했기에 지금 장로 자리에 앉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테네는 어릴 때부터 조금 미치광이 같은 면이 없잖아 있었다.
아무리 레드 드래곤이라고 한들 저만큼 불을 가까이하긴 힘든데, 그녀는 어릴 때 어딜 가나 불을 질러대는 바람에 그녀의 부모가 큰 골치를 썩이었다.
‘미친 방화범 테네.’
그녀에게 붙은 별명은 수십 개였으나, 그중 단연 잘 어울리는 것은 이것이었다.
“테네. 그렇다면 네가 드워프를 맡아보는 건 어때.”
“아! 몰라. 안 할래요.”
테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저…… 하셀.”
그러자 아프레가 입을 열었다.
“저들을 이렇게 설득하는 것이 능사가 아닌 듯싶네.”
“그럼 다른 좋은 수가 있으십니까?”
하셀이 아프레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생각해 보게. 저들의 한평생 동안 우리를 이렇게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을 강요하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게 무슨…….”
“우리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네. 아까 엘프 족장 말을 듣지 않았는가? 테네가 날뛰는 바람에 얼른 나오긴 했지만 말일세.”
그에 하셀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엘프 족장은 ‘우리 종족이 당신들 가호가 있다는 숲에 살며 당신의 가호를 받은 적이 있느냐.’고 떨면서 말했다.
그에 화가 난 테네는 온 숲에 불을 지르려 했었다. 때문에 그녀를 말리느라 허둥지둥 떠나왔던 탓에 생각지 못했었는데…….
“방법을 바꿔보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