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갈 길이 멀다.
“왕이시여! 제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시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노인은 힘겹게 손을 비비며 처절하게 빌고 있었다.
“보아라. 꼭두각시로 인간을 세우니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주 저급하고 무능한 종족이지.”
그 앞에 선 사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노인을 비웃었다.
“맞습니다.”
그 옆엔 부하로 보이는 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사내의 말에 동조했다.
“계, 계집 하나가 아카데미로 도망쳤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자 노인이 얼른 제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스크롤이었습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있을 적에 만들어 두었던 스크롤입니다. 왕께서 계획하신 그날이 오기 전 아카데미를 장악하기 위해 만들어 둔 스크롤인데, 그 계집이 그걸 써서 아카데미로 들어갔습니다!”
사내의 시큰둥한 반응에 노인은 쇳소리를 내며 다급하게 말을 뱉어냈다.
“도대체 어쩌란 건지 모르겠군. 그 계집이 도망쳤다는 사실 하나로 널 살려두라는 말인가?”
“그 계집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저와의 연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분명합니다.”
사내가 콧방귀를 뀌었다.
“더는 들어줄 필요도 없겠군.”
“게, 게다가! 그 계집의 동생이라는 것이 아카데미 상급반에 다니고 있으니, 그것을 다시 잘 구슬리기만 한다면 아카데미 내에 믿음직스러운 첩자를 가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드래곤이 지금 학장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고개를 들어라. 알베르토.”
사내의 말에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왕이시여…….”
노인의 깊게 팬 주름에 눈물이 맺혔다.
“덕분에 좋은 정보를 알게 되었구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의 말에 노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신 감사를 전했다.
“허나.”
“……?”
“아쉽게도 그뿐이다.”
말을 마친 사내의 손끝에서 검붉은 빛줄기가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와, 왕이시여! 제발, 제발… 한 번만 더… 크아아악!”
노인은 제게 뻗쳐오는 빛줄기를 피하려는지 제 몸을 허둥지둥 뒤로 물렸지만, 그 노력은 애처롭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쯧쯔. 우매한지고.”
검붉은 빛줄기가 집어삼킨 노인의 몸은 곧 잿더미가 되어 파스스 흩어졌다.
“보았느냐?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는 이토록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내는 마치 귀찮고 지저분한 것을 처리했다는 듯 손을 탁탁 털어 보였다.
“예.”
“그래도 네가 왔으니 한시름 놓았구나. 테드라스.”
“곧 형제들 역시 도착할 것입니다.”
“그래. 그날이 정녕 머지않았구나. 그리고 선발대였던 우리 기사 셋이 당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큰일엔 언제나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요.”
“그래. 안타깝지만 그에 관한 조사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괜히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까 싶으니 말이다.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를 때야.”
사내의 말에 테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알베르토가 전해준 정보는 아주 쓸모 있는 것이 되겠구나. 저자가 만들어 낸 부활교는 아주 기발한 것이니 이대로 날려버리기엔 아깝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이번엔 교주가 아닌 성녀를 한번 만들어 내봐야겠구나.”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
“저…… 루키.”
그날 이후 폴라와 루카스 사이에 서먹한 기류가 계속 흘렀다. 하지만 웬일인지 폴라가 먼저 루카스를 찾아와 말을 걸었다.
“응.”
“사과하고 싶어.”
폴라의 말에 루카스는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괜찮아.”
하지만 이내 작게 웃으며 폴라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미안해. 언니를 찾고 나니까…….”
“괜찮아. 다 이해하니까. 사과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나도 미안해. 널 그렇게 다그치는 게 아니었는데.”
“아냐.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걸…….”
폴라의 사과가 고마웠다. 사실 루카스는 내심 불안했었다. 제 언니를 찾은 폴라가 계속 정신을 못 차리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넬라에게도 사과했어. 물론 스키르에게도.”
“너라면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걱정이 무색하게 아이들에게 먼저 사과하고 상황을 풀어냈다.
“아만 학장님께서 루카스 네가 하는 걱정이 뭔지 모두 말씀해 주셨어. 그래서… 하여튼 미안! 너무 부끄럽다.”
폴라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아.”
아만이 무어라 말했는지는 몰라도, 상황이 모두 편안하게 해결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언니가 이제 새로운 도서관 사서가 되었어. 모두 아만 학장님께서 배려해 주신 덕분이야.”
“잘되었네.”
이 부분은 아만과 먼저 상의가 된 부분이었다.
불안한 요소를 눈앞에서 당장 없앨 수 없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진짜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때가 되었군.’
폴라와 아이들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이제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
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여기가 맞나?”
“응. 오빠가 여기로 와있으라고 했어.”
아이들은 사전에 약속된 장소에 나와 루카스를 기다렸다.
인적이 드문 아카데미 후원 한쪽에 모인 아이들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 저기 왔군.”
멀리서 오는 루카스를 발견한 스키르가 말했다.
“다들 왔네. 오늘은 예습만 먼저 한다고 생각해.”
루카스가 아이들을 보며 말했다.
“근데 여기서 하는 거야?”
“아니. 우리들만의 공간으로 갈 거야. 자, 내 팔 잡아.”
루카스가 팔을 내밀자, 아이들이 루카스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파앗!
그러자 루카스가 아이들을 데리고 텔레포트했다.
“으어억… 어지러워……”
“우욱! 나 토할 것 같아.”
갑작스러운 텔레포트에 스키르와 폴라가 헛구역질을 했다.
“자, 이것 좀 마셔. 도움이 될 거야.”
루카스가 품에서 약병을 꺼내 건넸다.
“끄윽… 한결 낫군.”
“으아아~ 속 메스꺼워.”
그것을 받아 마신 아이들의 안색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가?”
“앞으로 우리가 연습할 공간이야.”
스키르의 질문에 루카스가 대답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루카스가 전생에 쓰던 레어였다.
아만과 하셀에게도 미리 언질을 해두었으니, 낯선 침입자로 오해한 그들이 찾아오진 않을 것이다.
루카스는 아이들을 훈련시키기에 적합한 장소를 열심히 물색했지만, 이보다 더 알맞은 장소를 찾을 수는 없었다.
‘아공간을 창조할까도 생각했었지.’
몸에 넘치는 것이 마나이니, 차라리 아공간을 만들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 내 집이 있는데 왜?’
사실 드래곤의 레어보다 적합한 공간은 없었다.
다른 몬스터들이 침입할 걱정도 없었으며, 혹시 루카스나 아이들을 노리는 적이 있더라도 이곳까지 들어오기는 어려웠으니 말이다.
게다가 루카스와 몇몇 드래곤들 한정으로 풀리게 설계된 지금의 결계는, 용언으로 이루어져 그 어느 방어막보다 낫다 자신할 수 있었다.
“오빠… 여기 괜찮은 거야? 나이아스들이 너무 무서워하는데…….”
넬라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나이아스는 물의 하급 정령이니, 드래곤의 흔적이 가득한 이곳이 무서울 수도 있었다.
“괜찮대. 그리고 너무 무서우면 집에 가있어도 괜찮아.”
루카스의 말에 넬라가 조용히 나이아스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놀랍군.’
루카스는 오랜 기간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넬라의 저런 자연 친화력이 놀라웠다.
자연계 상태의 정령과 자유롭게 대화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을 진짜 친구처럼 대하고 소통하고 있으니.
“다들 지난번에 말했던 마법 응용 책은 좀 봤어?”
“응. 봤는데 나는 도통 뭐가 뭔지 모르겠어.”
“맞다. 네 말대로 우리 수준에 맞는 걸로 찾아보긴 했다만…… 아직 어려웠다.”
“나도 보긴 했는데…… 내가 쓸 수 있는 마법인지 잘 모르겠어.”
아이들이 저마다 어려움을 토로했다.
“괜찮아. 어떤 마법이 있는지 너희들 머릿속에 대충이나마 각인시키기 위해 보라고 한 거니까.”
루카스가 한 손을 들어 허공에 얼음 창을 만들어 보였다.
“여태 배웠다시피 마법은 정확성과 구현성, 그리고 마나가 가장 중요해. 내가 생각한 마법을 얼마나 잘 구현하느냐.”
-콰쾅!
생겨난 얼음 창이 벽에 날아가 박혔다.
“그리고 얼마나 정확하게 쓰느냐.”
“우와아…….”
얼음 창이 수십 개가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마나가 얼마나 있느냐.”
떠오른 얼음 창이 허공을 빙빙 돌며 유영하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순간, 얼음 창이 모두 사라졌다.
“실전에서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할 시간이 없어. 폴라 그리고 스키르. 지난번에 겪었지?”
루카스의 말에 아이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러니 우리는 철저히 생존에 대비한 마법을 배울 거야. 생존하지 못한다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게 말이야.”
“루키…… 너 진짜 대단했구나?”
“도대체 정체가 뭔가! 아니, 이 정도 실력이면 대마법사 칭호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대단해…….”
드디어 마주한 루카스의 본 실력에 아이들은 저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내가 너희 곁에 있다면 언제든 지켜줄 수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가 있어.”
루카스가 아이들을 하나씩 천천히 바라봤다.
“그리고 너희가 날 지켜야 할 때도 있겠지.”
스키르가 침을 꼴깍 삼켰다.
“저…… 나는 버퍼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내가 도움이 될까……? 오히려 너희에게 짐만 되는 것은 아닌가?”
스키르의 말에 루카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버퍼는 무척 중요해.”
“그, 그런가?”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할말을 골라냈다.
“다들 배워서 알겠지만 다시 한번 쉽게 설명해 줄게.”
그러자 아이들은 눈을 빛내며 루카스의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래. 돈. 돈이라고 생각하자. 너희 주머니에 백 실링이 있다고 생각해 봐.”
아이들이 고개를 신나게 끄덕였다.
“스키르는 그 실링을 골드로 바꿔줄 수도 있고, 골드로 바꾼 다음에 두 배로 불려줄 수도 있어. 버퍼는 그런 거야. 물론 아무것도 없다면 안 되겠지만, 무언가 있다면 그걸 더욱 크게 불려주는 그런 사람인 거지.”
“우와…… 키르 너 대단하다.”
“정말인가?”
되묻는 스키르의 말에 루카스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스키르가 있다면 우리의 전력은 두 배, 아니, 세 배도 될 수 있는 거야. 한 번 쓸 마법을 두 번, 세 번 쓸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스키르야.”
“오빠. 대단하다!”
넬라까지 거들자, 스키르의 어깨는 더 이상 치솟을 데가 없이 솟아있었다.
“크, 크흠! 고맙다.”
“그래. 그러니 스키르 네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마. 그리고 네 능력에 따라 우리 전력도 달라질 수 있으니 연습도 더욱 열심히 해야 해.”
“아…….”
갑자기 다가온 부담에 스키르의 어깨가 다시 축 처졌다.
“자, 그럼 오늘은 너희들 실력 먼저 보자.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저쪽 허공에 전력을 다해서 공격해 봐. 폴라부터.”
루카스의 말에 폴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후우! 되게 긴장되네.”
긴장을 풀려는 듯 폴라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몸을 풀었다.
“전력을 다해서라고 했지?”
“그래.”
폴라가 비장한 표정으로 주문을 읊기 시작하자, 하늘이 울리기 시작했다.
-쿠릉…… 쿠르릉!
“……적들을 섬멸하라!!!”
-콰지지직! 콰직!
폴라가 선보인 것은 그녀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전격 마법이었다.
전방에 떨어진 번개는 희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이내 사그라졌다.
“잘했어. 이제 주문 없이 해봐.”
“헤엑… 헤엑… 전력을 다 하라며… 이제 마나가 없는데……?”
폴라가 숨을 몰아쉬며 하는 말에 루카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거 한 번에 소진됐다고……?’
갈 길이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