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만남.
괜찮은 방법을 찾아낸 그들은 다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래서 누굴 꼬실 겁니까?”
아만의 질문에 하셀과 루카스는 서로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너에게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저는 로드께서 아는 신 하나쯤 있으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허?”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제 입으로 당당하게 신을 몇 꼬시자고 하기에 당연히 방법이 있을 줄 알았건만, 하셀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루카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있었다.
“진짜 아는 신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하셀의 시선이 루카스의 팔로 향했다.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얘는 안 된다.”
루카스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아모레였다. 하지만 싫었다.
‘너무 싫다.’
그러자 하셀이 눈을 얇게 뜨며 질문했다.
“누군데 그러십니까?”
“…….”
“아모레 아닙니까?”
젠장.
“맞다.”
“아모레라면 상급신인 데다가 굉장히 오랫동안 천계를 지키던 신이니 힘이 엄청날 겁니다. 그런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보아하니 아모레의 엄청난 성유물까지 가지고 계신 듯한데요.”
좋은 핑계를 찾던 루카스가 결국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예?”
“아모레를 불러내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후회할 게 뭐 있습니까?”
하셀의 말에 아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후회할 건 없죠. 아모레는 제가 알기로도 강한 신이니까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잠시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느냐?”
그러자 아만과 하셀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얼른 자리를 떴다.
“후우우…….”
깊은 한숨.
“… 사랑의 힘으로 뾰롱뾰롱.”
이어서 작은 소리로 읊는 주문.
[자기야아아앙!!!]
정말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와줘서 고맙군.”
[이제 우리 자기가 정말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르나 봐아앙~]
아모레가 나타나자, 루카스는 벌써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부탁할 것이 있어 이렇게 불렀다. 와줘서 고맙군.”
[우리 자기가 부르면 언제든지 와야지잉!]
이제 아모레는 아무렇지도 않게 루카스의 팔이며 어깨를 쪼물딱거리며 찐한 스킨십을 해댔다.
‘포기했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제 대부분을 놓아버린 듯 해탈한 표정이었다.
이어 하셀과 아만이 다시 돌아왔다.
[자기 친구?]
하셀과 아만을 본 아모레가 루카스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렇다.”
그러자 아모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카스에게서 멀어졌다.
“…….”
“저…….”
둘은 아모레의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당연했다. 신전에 있는 아모레의 동상이나 그림은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
지금 아모레와 모습과 같은 것은 금발 머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하셀, 아만. 이쪽이 아모레다.”
“아모레님을 뵙습니다.”
“아모레님을 뵙습니다.”
둘은 처음 마주하는 신의 모습에 깍듯하게 절을 올렸다.
[그래. 지상을 수호하는 자들이군.]
그러자 아모레는 돌연 목소리를 깔며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런 미친…….’
금발 머리와 거무튀튀한 수염 자국, 핑크색 옷은 그런 그의 위엄에 작은 의구심을 남겼을 뿐, 그가 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하지는 못했다.
“…….”
그런 아모레의 행동에, 입을 벌리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은 오로지 루카스뿐이었다.
[그대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고맙네. 어지러운 지상에서 질서를 지키는 자들이 있어 우리 또한 많은 도움을 받는다네.]
정말이지 신다운 발언과 위엄이었다.
“미약한 도움이나마 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하셀 역시 작게 웃으며 예의를 갖췄다.
[그래. 내 친우에게 들었다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예. 아모레님. 송구스럽지만 저희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그래. 어디 이야기해 보게.]
하셀과 아만은 그런 친절한 아모레의 모습에 선망의 눈길까지 보내고 있었다.
‘……무시하자.’
이럴 때 자신이 아모레를 타박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때문에 루카스는 그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대화나 듣는 것을 선택했다.
하셀과 아만은 드래곤답게 신을 마주했음에도 떨거나 위축되는 모습 하나 없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천천히 설명해 갔다.
아모레는 모두 알고있음에도 그들의 대화를 경청하였으며, 중간중간 깊은 생각을 하는 척 연기까지 해 보였다.
‘영악한 놈.’
그를 보며 치를 떠는 것은 루카스뿐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래. 그대들의 입장은 잘 들었다네. 나는 내 친우를 봐서라도 백번 돕고 싶네만, 다른 신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 모르겠군.]
“그들을 설득해 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하셀이 두 손을 꼭 모으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허. 자네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신들은 영겁의 세월을 살지 않나. 영원히 사는 이들에게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오래 산다는 것이지.]
아모레가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듯 제 턱을 쓸어내렸다.
[그 말인즉 우린 모든 것에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것일세. 물론 신들 역시 중간에 유희를 떠나기도 하고, 벌을 받아 윤회를 하기도 하네만 자네들도 알다시피 그것은 그저 찰나일 뿐이지.]
“압니다. 하지만 저희 역시 이대로 이렇게 이 세상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아모레님 역시 주신의 자리를 타라스가 차지한다면 좋진 않으실 것 아닙니까.”
[하하하! 그게 문제라네. 주신의 자리가 바뀐다? 그게 누가 되었건 심심한 생에 큰 이벤트 아니겠는가? 그러니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지.]
아모레의 말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신은 영겁을 산다. 헤아릴 수도 없는 수많은 날을 살아가는 그들에겐 어느 재미난 유희도 찰나일 뿐, 엄청난 재미를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게 무뎌질 테니…….’
아모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들 역시 대충 이해는 하고 있었다.
드래곤으로 살며 겪는 것들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고작해야 몇천 년을 살아가기에 신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일 것이다.
[자네들도 충분히 이해하는 눈치구먼. 그리고 자네들 역시 지상의 일에 모두 관여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한번 물어보겠네. 자네들은 드래곤 로드 자리를 탐내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는가? 그 자리가 공석이라면 말이야.]
“……대부분 자격이 충분하다면 내어줍니다. 오랜 시간 살아가는 데 있어 로드라는 자리는 귀찮은 것일 뿐이니까요.”
하셀이 대답했다.
[우리는 어떨 것 같은가?]
아모레가 웃었다.
“…….”
[뭐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듣자 하니 마족들은 지상에 올라와 인간을 제외한 모든 종족들을 평등하게 대하겠다고 하는 것 같던데. 내 말이 틀린가?]
하셀과 아만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꼈다. 아주 잠깐만 생각해도 되는 문제였다.
‘만약 인간들이 종족 전쟁을 벌인다면?’, ‘누군가 공석인 로드 자리를 탐낸다면?’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답은 충분했다.
‘관여하지 않는다.’
종족 전쟁이 불러오는 피바람은 거대하고 참혹하겠지만, 드래곤이 나설 일이 아니다. 도리어 누군가 나서서 종족 하나를 돕겠다고 한다면 말릴지도 몰랐다.
그것이 바로 편애이자 차별이니까.
게다가 마족은 드래곤에게 지은 죄로 이미 수많은 차별을 당해 쫓겨난 종족이었다. 그런 종족이 자신의 땅을 찾아 돌아온다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릴 신을 찾는 것이 더욱 어려울 듯 보였다.
[하지만 누군가는 있겠지. 그러니 너무 그렇게 세상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은 하지 말게.]
아모레가 인자하게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
[내 친우에게 들었다면 알겠지만, 드래곤으로서의 삶이 끝나면 신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옛 동료를 위해서라도 나설 신이 하나쯤은 있지 않겠는가?]
하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에 또 볼 수 있길 바라지.]
말을 마친 아모레가 루카스의 귓가에 다가왔다.
[나 멋있어쪄?]
아모레가 하셀과 아만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
그 모습을 본 하셀과 아만은, 루카스와 아모레의 깊은 친분에 놀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이만.]
처음과 같이 아모레가 멋짐만을 남기고 퇴장했다.
“신은 신이군요.”
“어휴. 현신이 아닌데도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네요.”
“그렇더군. 그런데 아모레가 저렇게 근육질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아만의 말에 하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어? 저도 마찬가집니다. 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게다가 분홍색 옷이라니…….”
“작은 하트가 달린 지팡이도 조금 그렇긴 했다.”
“하지만 뭐 사랑의 신이니까요.”
“그렇지. 아니, 그런데 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며 물으신 겁니까? 괜히 긴장했잖습니까.”
하셀의 말에 루카스는 당장에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게 아니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꾸욱 참고서 그저 쓰게 웃어 보였다.
‘그래, 내가 아니라고 해봤자 똑같을 것이다.’
“그보다 정말 큰일이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다. 나 역시 생각이 짧았다. 급한 일이 닥치니 우리 모두 눈이 가려진 거겠지. 당장 우리 주변의 드래곤을 몇 설득하려 해도 힘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생각에 잠긴 듯 그들은 잠시 침묵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모레님 께서 신들을 설득하길 오매불망 기다릴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겠지. 마족들이 게이트를 열었다고는 하나, 당장은 그 숫자가 많지도, 게이트를 유지하는 시간 역시 길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맞습니다만, 저들이 언제 준비를 끝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올지 모릅니다.”
“준비할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최후에 방법이 없다면…… 마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루카스의 말에 하셀과 아만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됩니다.”
“맞아요. 그건 절대 안 됩니다.”
“마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니요? 새로운 세상을 얻어서 뭐 한답니까?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에겐 당연히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루카스의 입장은 달랐다.
아모레의 말대로 드래곤의 편에 서줄 신이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뿐더러, 설령 몇 있다 해도 타라스와 전력 차이가 크지 않다면 그것은 정말 신들의 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누구 하나 쉽게 물러서지 않겠지.’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를 줄이는 방법은 하나였다.
타라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타라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신들이 전쟁을 할 필요도, 드래곤이 다칠 필요도 없게 된다.’
싸움은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패배할 가능성이 높은 싸움이라면 더더욱.
“나도 안다. 하지만 신들의 전쟁이 된다면 승패가 문제가 아니다. 이 세상이 사라질 수도 있고 드래곤이 사라질 수도 있겠지.”
“압니다. 그러니 이 싸움을 시작하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먼저 찾아낼 겁니다. 저 마족 놈들이 지상에 영영 올라오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셀의 대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하하! 그래. 하셀. 네 말이 맞다.”
그에 루카스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올라오지 못하게 하면 되는 것이지.”
“예. 영영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