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발리마의 심장 (4)
루카스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섬이었다.
‘다른 지도에 표시된 섬 일곱 개. 그런 모양을 한 곳은 여기뿐이다.’
지도에 표시된 물결 모양과 작게 그려진 동그라미 일곱 개. 그중에 홀로 색칠 된 가운데 점 하나.
루카스는 지금 반달 모양으로 나열된 일곱 개의 섬 중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무인도에 와있었다.
동남쪽 아래에 있는 트린섬 근처에 위치한 이 섬은 나열된 모양이 특이해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곳이었다.
트린섬 옆 두 번째 섬이라고 설명하면 누구나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위에 나무가 그려져 있었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지도를 떠올린 루카스가 곧장 섬 중앙으로 향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지만, 그것은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섬 중앙으로 들어서자 외부인을 반기지 않는 듯한 께름칙한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울려퍼졌다.
-끼오오! 끼오!
하지만 루카스는 그런 소리들 따위는 일절 무시한 채 곧장 나무로 향했다.
섬 전체가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림으로 표시할 만한 나무는 딱 하나였다.
“저기에 있군.”
과거엔 바다 사람들이 신목이라 일컬으며 몬스터들의 위협을 무릅쓰고 찾아와 제사를 지냈던 나무.
“옛날에 봤던 것보다 더 커진 것 같군.”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누구보다 크게 자라난 나무는 인간들이 신목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위용을 뽐냈다.
‘뽑아야 되나.’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루카스는 고민했다. 이 땅 위에 언제 뿌리를 내렸는지 모를 이 거대한 나무를, 거북이 바위 부수듯 부숴도 되는지.
‘뽑기엔 좀 찝찝한데.’
처음 루카스가 이 섬을 방문했을 때부터 있던 나무였으니 나이가 족히 오천 살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뽑을까.’
그가 답지 않게 고민을 이어가며 나무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렇게 커다란 나무를 한참을 걸려 돌았을 때였다.
‘뽑지 않아 다행이군.’
나무의 기운을 천천히 느끼던 루카스가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후우우웅.
나무의 가장 윗부분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기운. 그에 루카스가 바람을 일으켜 두둥실 떠올랐다.
-탁.
가벼운 몸짓으로 나무 꼭대기에 도착한 루카스가 튼튼해 보이는 가지 위에 착지했다.
그러자 굵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작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지.”
조심스레 나무 사이로 내려간 루카스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지만, 오랫동안 나무 속에 있었던 탓인지 빡빡하게 끼어 잘 빠지지 않았다.
‘뽑진 않았으니 이 정도는 뭐…….’
루카스가 손끝에 바람을 일으켜 칼날처럼 회전시켰다.
그러자 보석을 꽉 잡고 있던 나무가 갈려나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갈려나갔을 때쯤 다시 손을 집어넣어 그것을 빼낸 루카스의 입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걸렸다.
‘이제 열 개 남았군.’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그것을 잘 넣어둔 루카스가 텔레포트했다.
-파앗!
***
전생에 루카스가 모았던 기억이 있는 알리타의 유물은 총 여덟 개.
알리타의 유물이라 알려진 것들은 대부분 별 쓸모가 없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그것을 찾는 것을 즐겼을 뿐, 모아두는 것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주변에 아는 드래곤들이 관심을 보이면 별생각 없이 그것들을 줘버리곤 했고.
‘하셀은 아직 좀 껄끄러우니…….’
만만한 것이 아만이었다.
그렇게 아만의 집무실에 찾아온 루카스가 태연히 앉아 그를 기다렸다.
“로드?”
얼마 지나지 않아 아만이 나타났다.
“아만.”
“찾겠다고 하신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아만 역시 자연스럽게 루카스의 건너편에 앉으며 물어왔다.
“아니. 대신 오랜만에 재밌는 보물찾기를 하고 있다.”
“오. 저도 같이 해도 됩니까?”
아만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왔다.
“뭐 안 될 건 없지만, 바쁘지 않나?”
루카스의 말에 아만의 표정이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예. 바쁘죠. 하, 그냥 이 유희 그만할까 봐요.”
“그러기엔 공들인 시간이 많은 것 같던데.”
“하아…… 그것도 맞죠.”
드래곤의 유희란 그랬다. 긴 생을 최강자로 사는 그들이 즐길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것.
때문에 공들인 유희는 한 방에 엎어버리기 아까운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지금 아만의 유희가 그러했다.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으며, 아만은 그것을 위해 꽤 오랜 시간 설계하고 또 계획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지금 네가 하는 유희가 생에 가장 재미있는 유희일 수도 있고.”
“그렇다면 조금 슬퍼지는데요.”
“그만큼 재미있는 부분을 네가 즐기고 있다는 뜻이지. 모험 요소도 있고 나름 바쁘기도 하고 말이다.”
“로드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뭐. 그럼 한번 해보죠. 저도 로드 곁에서 이 모습으로 돕는 것이 편하기도 하고 말이죠.”
아만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보물찾기에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아, 그래. 알리타의 유물들이 필요하다.”
“엥? 알리타의 유물들이요?”
아만 역시 알리타의 유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예전에 너에게도 하나 준 것 같은데.”
“네. 주셨죠. 그때 알리타의 성서였나? 책을 한 권 주셨을 겁니다.”
“그래.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다. 좀 모아다 줄 수 있겠나?”
“네. 뭐. 어차피 알리타의 유물들은 크게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수집품 중 하나니까 다른 드래곤들에게 부탁해도 거리낌 없이 내어주긴 할 겁니다.”
다행이었다. 전생이었다면 줬던 이들에게 보물찾기에 필요하니 다시 내놓아라 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못 되니.
“하셀에게도 두 개쯤은 있을 거다.”
“네. 아버지께 부탁하겠습니다. 로드께서 필요하시다고 하면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대신 말씀해 주실 겁니다.”
아만의 말에 루카스가 잠시 움찔했다.
‘하셀이 아직 화가 났을 텐데.’
전생에서도 하셀과 루카스는 아주 가까웠지만, 때로는 의견이 갈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하셀은 몇 년 씩이고 루카스를 찾아오지도 않고 꽁해있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로드를 다시 만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아버지는 걱정되셔서 그랬을 겁니다.”
“걱정?”
“예. 로드께서 아버지께 그동안 겪은 일을 얘기하셨을 때 아버지 표정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어휴. 아주 재밌는 부분에서는 그렇게 즐거워하시다가도 로드께서 겪은 나쁜 일을 들을 때엔 아주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시는 게!”
루카스는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하셀과 대화를 하는 데에 푹 빠져 제 이야기를 하기에 바쁘기도 했고, 하셀과 함께 그의 레어에 있으니 마치 전생과 똑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저 유희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듯 아무 생각 없이 말했을 뿐이었는데, 하셀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던 듯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저도 나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그렇더라고요. 로드께서 저와 계약을 한 것도 모자라 여태 인간의 몸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 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만의 말에 작게 침음한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셀과 이야기를 나눌 땐 그저 전생과 똑같은 기분이었으니.”
“네. 로드 말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걱정되는 마음이 더 크셨을 겁니다. 그리고 로드께서 이번 생을 잘 끝마치고 싶다고 하기도 하셨고…….”
아만이 잠시 다음 말을 삼켰다.
“또 인간이시지 않습니까? 저희 모두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잘 압니다. 그러니 더욱 걱정하셨을 수밖에요.”
“그래.”
“하지만 아버지께서 화가 난 건 아닐 겁니다. 그저 로드께서 잘못될까 염려되어 도리어 화를 낸 거겠죠.”
“그래.”
“그러니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모아주실 겁니다.”
아만의 말이 모두 맞았다. 반대로 하셀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자신에게 찾아왔더라도 루카스는 똑같이 했을 것이다.
아니.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으로 조금 살았다고 생각까지 이리되었나 보구나…….’
부끄러웠다. 인간으로 고작 십수 년을 살았다고 생각마저 변해버린 것 같은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니 알리타의 유물들은 제게 맡겨 주세요.”
아만이 눈을 찡긋했다.
***
그렇게 잠시 공백이 생긴 루카스가 마레 호수로 향했다.
언제나와 같이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잔잔한 물을 바라보던 그가 생각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족들이 지상에 올라온다면.’
그것을 시작으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마신을 등에 업은 마족들.’
그는 그들을 어떻게 막아야 좋을지. 아니, 그 전에 그들이 어떻게 하면 이 지상에 발을 딛게 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들을 생각했다.
‘주신의 자리는 공석이다. 그런데 타라스가 그 자리를 노리고 있다.’
공석인 주신의 자리. 이것은 마치 비어있는 호랑이 굴에 여우가 들어와 왕 노릇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호랑이가 돌아온다면 좋겠지만…….’
돌아오지 않는 호랑이 굴은 그대로 여우 차지가 되고 말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가 아는 신이라는 것들은 엄청나게 개인주의자이기 때문에, 마신이 어떤 짓을 벌이든 자신에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신경 쓰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타라스가 저런 간 큰 생각을 가졌을 땐 분명 그를 따르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타라스와 아모레 그리고 널리 알려진 헤르도네 같은 신들은 상급 신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엔 중급과 하급 신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중급이나 하급 신이라고 해도 신은 신이었다. 중급 신 셋이 힘을 합치면 상급 신 하나쯤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것이고, 혹시 타라스 편에 선 다른 신들이 있다면 그건 또 문제가 심각했다.
‘자칫하면 신들의 싸움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되겠지.’
한낱 인간들이 전쟁을 벌여도 대륙은 피로 물들게 된다. 종족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면 더욱 참혹할 것이고.
그런데 그 전쟁이 신들의 전쟁이라면?
대륙, 아니, 이 세계가 없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신들의 싸움에 드래곤이고 나발이고 그저 등 터지는 새우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막을 방법이 있을까.’
어지럽게 널린 생각들 사이로 가끔 머리를 내미는 묘안들이 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들은 묘안이 아닌 쓸모없는 생각이 되고 말았다.
‘아니, 그건 안 될 거다.’
하지만 아직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니, 그건 하고 싶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자신과 누구보다 가까운 신이며, 누가 보아도 타라스의 반대편에 선 자.
아모레. 그가 자꾸만 불쑥불쑥 튀어나와 루카스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아.’
그 생각을 떨쳐버리려 머리를 흔드는 루카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 아니, 하기 싫다.’
또다시 떠오르는 생각.
바위 위에 앉은 루카스는 한참이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고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루카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