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마족의 후손 (1)
갑자기 나타난 아들의 모습에 놀란 시비에가 어버버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루카스가 싱긋 웃었다.
“텔레포트로 왔습니다.”
“아, 아니. 도대체 언제 그만큼…….”
시비에는 루카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으니, 그가 놀라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루카스가 여태 제 실력을 숨겨왔으면서도, 오늘 백작저로 한 번에 텔레포트한 이유는 케이틀린 때문이었다.
‘그때와 모습이 다른데도 당황하지 않고 말을 받다니. 제법이군.’
게다가 그녀의 실력은 늘어있었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 봤을 때는 최소 중급 정령사 이상일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기도 하고.’
루카스는 이제 제 가족들에게까지 실력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누구 아들인지 정말 기특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어버버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시비에를 보며 루카스가 찡긋 윙크하자, 시비에의 표정이 빠르게 풀어졌다.
“하, 하하하! 그래. 누구의 아들인지 정말! 대단하다!”
“안녕하세요. 오래 걸려서 죄송합니다. 여기… 받아주세요.”
케이틀린이 주머니를 내밀자, 루카스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맙군. 잊지 않고 와줘서 말이야.”
“아닙니다.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의 문제는 잘 해결했다니 다행이군. 잠시 나와 걷지. 아버지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오, 오. 그래, 그러려무나.”
케이틀린과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온 루카스가 정원으로 향했다.
“그래, 갈 곳은 있나? 지금 보니 중급 정령사는 되는 것 같은데. 어딜 가든 환영받을 거다.”
“한눈에 알아보셨네요. 불의 중급 정령인 샐레멘더와 얼마 전 계약했습니다.”
“그렇군. 축하하네.”
케이틀린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지난번과 다른 모습에 조금 놀랐습니다. 폴리모프하셨던 건가요?”
“그래. 그게 중요한가.”
루카스의 말에 케이틀린이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 역시 당황스러울 것이다.
지난번 리타 마을에서 만났을 때의 루카스는 분명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얼핏 보아도 10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돼 보이니 당연했다.
“아뇨. 아닙니다.”
“그래. 다음 행선지가 정해지지 않았다면 이곳 백작저에 머무르는 것도 생각해 보게. 꼭 백작저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골드 나인 상단이 있으니, 그들과 함께해도 좋을 거야.”
루카스의 말에 케이틀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불의 중급 정령의 계약자가 아닌가. 우리 백작가에 도움을 준다면 고마울 듯하군.”
사실 케이틀린이 백작저에 있어준다면 굉장한 이득이었다.
중급 정령의 계약자는 어딜 가든 환영받는 고급 인재였다.
게다가 공격에 능한 불의 정령이니, 백작가를 지키는 데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었다.
또한 루카스의 말대로 꼭 백작가가 아닌 골드 나인에서 일해도 좋을 것이다.
세계적인 상단인 골드 나인은 대우가 좋을 뿐 아니라, 그녀의 실력을 늘리기에도 좋은 일자리였으니 말이다.
“로드리고 백작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제게도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엘프의 후손답군.’
그녀를 보는 루카스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엘프는 약속을 지키는 종족이었다. 그렇기에 루카스 역시 그녀를 믿고 기다려 준 것이었는데, 아니다 다를까 케이틀린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잊지 않고 약속을 지키러 찾아왔다.
“그렇다면 백작가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그건 비밀로 해주면 좋겠군.”
“그거라면… 아, 알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케이틀린은 루카스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시비에의 끈질긴 질문 세례를 피해 기숙사로 돌아온 루카스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잘됐군.’
케이틀린이 가지고 돌아온 골드는 총 200골드였다.
루카스는 시비에와 짧은 상의 끝에, 그 돈을 케이틀린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물론 케이틀린은 절대 받지 않겠다며 한사코 거절했지만, 시비에와 루카스의 협공으로 그 돈을 돌려주는 데 성공했다.
계약금이라며 돌려준 200골드는, 케이틀린이 시타타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케이틀린의 아버지는 그 일이 있은 이후, 2년 만에 알콜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를 괴롭혔던 그 집단들은 루카스가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처럼 와해되었다고 했다.
물론 남아있는 불량배들이 몇 있었지만, 그들 역시 경비대의 활약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사라졌다고 했다.
‘다행이야.’
앞으로 그녀는 로드리고 백작가의 중요한 인재가 될 것이다.
-파앗!
한참을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아만이 나타났다.
“아만.”
“로드.”
사뭇 진지한 표정의 아만.
“그래. 무슨 일인가.”
“지상에 마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활교의 교주라는 자는 알베르토가 확실한 것 같구요.”
아만의 말에 루카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알베르토는 분명 죽었지 않나?”
“죽었죠. 제가 그 시체를 황성에 던져주고 왔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누군가 알베르토를 살려낸 것 같습니다. 마족들이 말이죠.”
루카스의 표정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감히…….”
“조사 중입니다만, 지난번 앨리의 브레스에서도 교주는 도망친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하셀의 계획은?”
“앨리 때문에 많이 틀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장로분들께서 조사 중이셨지만, 앨리가 나서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의 행방은? 아직 못 찾았나?”
“네. 아, 그리고 교주의 최측근이었다는 여자 하나가 아카데미로 들어왔습니다. 교주에게서 훔친 스크롤로 도망쳐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래? 네 말대로 알베르토가 교주라면 아카데미로 향하는 스크롤이 있었다는 것쯤은 놀랍지도 않군. 그 자식이 아카데미까지 노렸다니.”
“맞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여자를 비어있는 사서의 방에 놔뒀습니다.”
사서의 방이라는 말에 루카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서의 방?”
“네. 진실의 영약을 썼습니다만 여자의 말이 사실이더군요. 그러니 조금 지켜본 다음 알베르토의 위치나 부활교의 정보를 캐낼까 싶습니다.”
“그 모든 것 역시 교주의 계략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해라.”
루카스의 말에 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앨리는 지금 어디 있지?”
“일단 레어에 있는 걸로 압니다만, 조만간 도망치지 않을까요?”
앨리는 지금 레어에 유폐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지껏 지켜본 앨리라면 조만간 도망쳐 나올 것이다.
“하셀이 또 한바탕 난리를 치겠군. 앨리가 도망쳐 나온다면, 지금 시타타에 불의 중급 정령사가 와있다고 전해라. 백작저에서 일하겠다고 했으나 골드 나인과 계약한다면 영지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모든 말을 전했는지, 아만이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 때였다.
“이번 주말에 좀 나갔다 와야겠다. 아이들에겐 네가 잘 둘러대도록 해라.”
“예? 어디 가시게요?”
“이 모든 것을 알았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겠구나. 너와의 계약도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으니, 큰 일은 없을 게다.”
그 말에 아만은 무어라 반박하려다 다시 말을 집어넣었다.
“알겠습니다.”
루카스에게 어련히 뜻이 있겠거니 싶었기 때문.
“그래.”
“예. 그럼 가보겠습니다.”
아만이 떠나고 루카스 역시 머릿속의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군. 그렇다고 나 역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드래곤은 자신이 책임졌던 일족이자,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그들에게 닥친 문제를 그저 외면할 수 없었다.
‘먼저 마족의 후손들을 찾아야겠다.’
그들이라면 지금 무언가 들었거나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지상에 남아있는 마족의 후손들은 그 수가 적었고, 긴 세월 마족의 혈통 역시 옅어졌다.
그러나 아만의 말대로 마왕이 지상에 돌아왔다면, 그들은 무언가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마왕 놈이 지상에 돌아왔다라…….’
***
“으아! 진짜 너무 어려웠어.”
“아니, 저 교수는 미친 사람인 것 같아. 도대체 상급반 각인에 오리칼쿰을 내면 다음 시험엔 뭘 내겠다는 거야?”
시험장을 빠져나온 학생들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으아아! 그래도 드디어 주말이다! 루키. 우리 내일 놀러갈까?”
“아니, 폴라. 숙녀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떡하나!”
“시끄러! 짜증나 죽겠어! 너 자꾸 그러면 주둥이를 콱 틀어버린다.”
폴라가 짜증을 내며 손을 들어 스키르의 입을 쭉 찢는 시늉을 해 보였다.
“으아아아!”
그에 스키르는 제 입을 얼른 틀어막으며 도망쳤다.
“야, 루키. 그래서 갈 거야 안 갈 거야?”
“나는 안 가. 너희끼리 놀다 와.”
“와, 너 진짜. 요즘 왜 그래? 사춘기야?”
폴라의 입에서 나온 ‘사춘기’라는 말에, 루카스는 하마터면 나쁜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오천 살쯤에 오는 사춘기는 도대체 무슨……!’
루카스가 폴라를 멍하니 바라보자, 폴라가 손을 들어 루카스의 앞에 휙휙 내저었다.
“야, 사춘기냐고. 왜 요즘 우리랑 안 노는데? 엉?”
용병단의 일이 있고 난 뒤, 폴라와 스키르는 매일을 바쁘게 보내기 위해 애를 썼다.
마치 나쁜 기억이 비집고 들어올 틈조차 주지 않는 것처럼.
“나는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아만 학장님께서 뭘 좀 부탁하셨어.”
“왜 학장님은 맨날 너만 그렇게 부려 먹어?”
“부려 먹다니. 그런 거 아니야.”
폴라가 입을 삐죽였다.
“치. 그래라. 넬라 너는 우리랑 갈 거지? 이번에 새로 생긴 디저트집 진짜 기가 막힌대!”
“나는 밖에 나가는 거 싫은데…….”
“아, 너는 또 왜!”
“사람들이 자꾸 우리만 보면 수군거리잖아. 로드리고네 여식이 어쩌고, 스턴네 차남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거 짜증나.”
넬라의 말에 폴라가 흠칫 놀랐다. 놀라기는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쟤가 언제 저렇게 컸지……?’
넬라는 언제나 말수가 적고 차분한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넬라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 그래?”
“응. 짜증 나. 그래도 언니가 나가자고 하면 나가긴 하겠지만,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어. 우리가 뭐 자기들한테 피해를 주길 했어 뭘 했어? 왜 그렇게 사람들은 남 얘기 하는 걸 좋아해?”
뭐가 그리 쌓였던 건지, 넬라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냈다.
“그… 렇지.”
폴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넬라의 눈치를 살폈다.
“그치?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그렇긴 한데, 넬라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았어?”
루카스가 결국 넬라의 표정을 살피며 묻자, 그제야 넬라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풀어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미안. 내가 조금 흥분했지?”
쑥쓰러운 듯 사과하는 넬라에, 폴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그럴 수 있지. 나는 좋은데 왜.”
“그래?”
“응. 앞으로도 할 말 있으면 그렇게 다 해. 시원하고 좋네!”
“응. 알겠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넬라의 모습에, 루카스는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뭔가 불안한데.’
아이들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온 루카스는 당장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차피 내일이 주말이니 망설일 필요 없지.’
품속에서 지도를 한 장 꺼내 든 루카스가 세심하게 좌표를 살폈다.
‘이곳 먼저 가봐야겠군.’
-파앗!
생각을 마친 루카스가 그대로 텔레포트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