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큰 거 온다. (2)
아만은 파멜라라는 여자를 우선 제 곁에 두기로 했다.
‘다른 곳에 놔뒀다가 다른 일이 생기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비어있는 사서의 방을 내어준 아만이 도서관을 비롯한 모든 곳에 꼼꼼하게 결계를 쳤다.
“도서관 밖을 벗어나려고 한다면, 네 몸에 걸려있는 저주가 너를 잠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넌 10분 안에 죽고 말겠지.”
“……네.”
아만의 차가운 경고에도 파멜라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과 접촉을 최대한 피해라. 아이들이 도서관을 드나드는 시간은 여기 벽에 붙어있으니, 참고하도록 하고. 지금은 사서 자리가 비어있으니 이 방을 주는 것이다. 의심이 풀린다면 너 역시 풀어주마.”
“알겠습니다.”
“식사를 비롯한 다른 것들은 관리인이 따로 챙길 것이다.”
“감사합니다.”
몇 가지 안내 사항을 전달한 아만이 방을 빠져나가자, 작은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파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이게 나아.”
제 몸 곳곳에 난 상처와 이미 남아버린 흉터를 내려다본 파멜라가 작게 침음했다.
‘이곳이라면 안전할 수도 있어. 먼저 내가 살아야 동생을 찾을 수 있어.’
그러곤 입 안에 난 상처를 혀로 찬찬히 훑어냈다.
-똑똑.
“네.”
노크 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킨 파멜라가 문을 열었다.
“학장님께서 부탁하신 것들입니다. 여기 이 파란 약병은 이 잔에 절반을 채워 아침저녁 하루에 두 번 드시면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해줄 겁니다. 그리고 여기 이 붉은색 약은 여기 거즈에 묻혀 상처를 닦아내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식사는 하루에 세 번 문 앞에 두겠습니다.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시면 쪽지에 적어서 문앞에 두세요. 준비해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너무나 후한 대접이었다. 관리인은 상처를 치료하는 약을 비롯한 새로운 옷가지까지 수레에 가득 싣고 나타났다.
그에 파멜라는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듯 쭈뼛거리며 물건들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일요일마다 방 청소를 도와줄 사람이 올 겁니다. 그때 빨랫감은 내놓으시면 되구요.”
“그,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파멜라가 손을 내젓자, 관리인 역시 단호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아닙니다. 아카데미의 룰이기도 하고 학장님의 부탁이기도 하셨습니다.”
“아.”
“그럼.”
관리인이 떠나고 나자 파멜라는 먼저 새로운 옷가지를 펼쳐봤다.
네이비 색의 로브는 편하고 수수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을 들춰보자, 속옷까지 세심히 챙겨져 있었다.
그렇게 똑같은 옷가지가 총 일곱 벌이었다.
‘매일 갈아입을 수 있게 해주신 건가.’
정말이지 세심한 배려였다.
‘이곳에서 일하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건 힘들겠지.’
지금 아카데미 사서 자리는 공석이라고 했다.
하지만 침입자나 다름없는 자신을 아카데미의 사서 자리에 앉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를 알아본다면… 그래. 안 될 거야.’
처음엔 어째서 교주에게서 훔친 스크롤이 이곳으로 연결되어 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만이라는 사람은 너무 티 나게 부활교를 싫어했다.
‘내가 부활교에서 도망쳤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을 보면 싫어하는 게 확실해.’
부활교는 제국 전체에 호감도가 높은 신흥 종교였다.
그런데 저리도 싫어하는 반응이라니.
‘헤르도네의 신도인가 했지만, 그건 아닐 거야.’
가장 신도 수가 많다는 기쁨의 여신 헤르도네.
그의 신도라면 이해가 됐지만, 왠지 아만은 헤르도네를 모실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뭘까…….’
고민을 거듭하던 파멜라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목숨을 구해주신 분이나 다름없는데.’
교주를 피해 도망친 것이지만, 혹여 스크롤이 다른 부활교당으로 향하는 것이었다면 일이 훨씬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기에 파멜라는 지금 아만의 보호(?)까지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교주한테 고마울 날이 오네.’
***
아만은 머리가 아팠다.
‘교주 그 자식이 왜 아카데미로 향하는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던 거지?’
진실의 영약을 마신 파멜라의 말이 거짓일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진짜 교주의 최측근이었으며, 그에게서 도망친 것인데.
‘하필이면 왜 아카데미냐는 말이야.’
짜증이 치밀었다. 진짜 왜 하필이면 아카데미냐는 말이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 수많은 곳들 중에 아카데미로 향하는 스크롤이라니.
“설마?”
그때 문득 아만의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 하나.
“알베르토……?”
얼마 전 품었던 의심 중 하나였던 마탑주의 장례식.
황제를 찾아가 물었을 때도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한 그것.
‘진짜 그 자식이 부활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어떻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진짜라면, 일이 심각해도 너무 심각했다.
도대체 누가 넝마가 된 알베르토의 시신을 가져다가 부활을 시켰다는 말인가.
‘라크메르? 아니, 아니다.’
아란트 제국의 숨겨진 흑마법사 집단인 라크메르.
그들의 소행인가 싶었지만, 아만은 이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여지껏 라크메르를 조사했던 아만은 그들의 실력이 별 볼 일 없다는 사실 쯤은 알아냈었다.
그들이 연구하던 몬스터들을 조종하는 것 역시, 웨어울프를 이후로 진척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뒤로 알아낸 사실 중 하나는 라크메르가 마족과 연관이 있다는 것.
‘구슬.’
얼마 전 하셀이 부숴버린 구슬엔 마기가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구슬엔 몬스터의 의식을 잠식해 그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 구슬과 라크메르가 향한 목적은 같았다. 몬스터를 조종하는 것.
‘몬스터를 조종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아만은 줄곧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또 해왔었다.
도대체 몬스터들을 조종해서 그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이다.
‘아버지께서도 같은 생각이셨지.’
고민 끝에 아만이 하셀을 찾아갔었다.
‘마족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려 하고 있다. 그들은 드래곤에게 맞설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셀 역시 아만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마계로 몰아낸 장본인인 드래곤에게 맞설 준비를 하고있는 것이었다.
모든 몬스터들의 왕이자, 지상의 제왕이나 다름없는 드래곤에게 맞서기 위해서 말이다.
몬스터를 조종한다면, 드래곤을 따르는 다른 종족들을 견제하기가 쉬울 것이고, 그에 따라 드래곤들 역시 전력이 찢어질 것이다.
마족들은 강한 종족이었으며, 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다구리에 장사는 없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 열다섯이 채 안 되는 드래곤들은 개개인의 성향이 강하기에, 아무리 큰 전쟁이 난다 한들 절반 정도는 제 레어에 누워 잠이나 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열도 채 안 되는 드래곤들이 마족과 마왕에 맞서야 하는데, 그들이 마수들을 비롯한 몬스터들까지 모두 몰고 쳐들어온다면 그땐 정말 승산이 없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마신까지 함께한다면 더욱 승산이 없겠지.’
그런데 저들은 부활교라는 같잖은 종교를 내세워 인간들을 현혹하고, 그들의 영혼을 모아다가 자신들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앨리가 나서서 그 난리를 쳤으니…….’
하셀과 장로들은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부활교를 내버려 뒀었다.
그들이 정체를 다 드러낼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데 앨리가 화를 참지 못 하고 본체로 브레스를 쏴버렸으니, 그들은 꽁꽁 숨어 더욱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할 것이다.
답답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루카스의 말대로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후회보다는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 먼저였다.
‘드래곤과의 계약까지 희미하게 만들 정도니…….’
하지만 엄습하는 불안까지 어찌할 방도는 없었다.
***
“정말 돌아가도 괜찮겠니?”
재차 묻는 블레인의 눈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네. 다들 괜찮을 거예요.”
몇 번이나 그녀를 안심시키는 루카스.
폴라와 스키르는 상태가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전과 같은 상태는 절대 아니었다.
그들은 앞에서 사람이 적나라하게 죽고, 동료를 잃은 사내들의 절규를 너무나도 똑똑히 마주했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멀쩡해지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스키르, 폴라. 정말 괜찮겠니? 아카데미로 돌아가도 괜찮겠냐는 말이야.”
블레인은 아이들에게도 재차 똑같은 것을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저도 괜찮아요.”
폴라와 스키르가 나름 씩씩하게 대답을 해 보였지만, 그들의 표정이 전과 같지 않다는 것 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늘진 그들의 표정엔 아직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넬라는? 정말 돌아가고 싶은 거니?”
“네. 저도 언니랑 오빠들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아이들 모두가 이와 같으니 블레인과 시비에 역시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스스로 학교에 돌아가겠다는 아이들을 더는 붙잡아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 그럼 다들 이거 받아라.”
결국 시비에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스크롤이다. 아만 교수님께 특별히 부탁해 아카데미 안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제작한 것이니, 이걸 써서 돌아가거라.”
“…….”
시비에가 꺼내 든 것은 다름아닌 스크롤 네 장이었다.
“이것도 안 된다고 하지는 않겠지. 루카스?”
“감사합니다. 아버지.”
스크롤을 받아 든 루카스가 싱긋 웃었다.
안 그래도 루카스는 아이들을 데리고 텔레포트할 생각이었으나, 그것 보다는 시비에의 눈앞에서 스크롤을 찢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역시 그게 훨씬 마음이 편할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가자.”
“안녕히 계세요.”
“가보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들이 꾸벅 인사를 하자, 시비에와 블레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작부부는 지금 비싼 스크롤을 네 장 씩이나 척척 사서 나눠줄 만큼 부유했지만,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지금은 너무나도 가난한 기분이었다.
폴라를 시작으로 아이들이 스크롤을 찢어 사라지자, 블레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이들이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 마시오. 부인. 루카스가 있지 않소?”
“그래도 아직 루카스도 어려요. 성인도 되지 않았는데…….”
“아만 학장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시비에의 품에 안긴 블레인이 훌쩍였다.
***
아카데미에 돌아온 아이들은 잠시 자리에 서서 가만히 주변을 둘러봤다.
“너무 오랜만인 기분이다.”
“너도? 나도 그래.”
스키르와 폴라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자. 내년엔 우리 졸업해야지.”
“할 수 있을까?”
루카스의 말에 폴라가 물었다.
“그럼. 최상급반 졸업하고 싶다며? 할 수 있어. 우리 모두.”
“하… 정말 그럼 좋겠다.”
“나도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겠군.”
“나도.”
아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내년엔 모두 졸업시켜 주마.’
루카스 역시 오래된 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아주 큰 게 오고 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아주 큰 일이 닥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