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증거.
“아만.”
아이들을 발견한 장소에 다시 돌아온 루카스는, 부서져 버린 마차 위에 멍하니 앉은 아만을 조심스레 불렀다.
“로드.”
루카스의 부름에 나직이 대답하는 아만의 눈이 공허했다.
“괜찮으냐?”
“…예.”
고개를 살짝 떨구며 쓰게 웃는 아만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네 영역인가?”
“예.”
루카스 역시도 드래곤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에 아만의 기분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루카스는 천 년 전에 자신의 영역을 건드린 대가로 마족들을 몰아내고 인간들의 제국 하나를 쓸어 엎었던 장본인이었다.
“그래. 나도 네 마음 잘 안다.”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고 싶으냐?”
이번엔 루카스도 아만이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말릴 명분이 없었다.
아만의 영역이 침범당한 것이 벌써 두 번째였으니 말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제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냐.”
아만의 감정은 지금 분노를 넘어 허탈함에 닿아있었다.
분명 지상 최강의 생명체로서 군림하며 유유히 살아갈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용생에 회의감이 들었다.
“하셀과 이야기를 해보는 것은 어떤가.”
“아버지와 말입니까?”
“그래. 하셀이라면 지금 네게 가장 알맞은 해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셀은 자신이 로드 자리를 직접 넘겨주고 온 드래곤이었다.
“로드 역시도 어려우십니까.”
“그렇다. 나는 이미 죽어 없어진 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결정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드래곤들에게 누가 될까 두렵구나.”
오천 년이라는 긴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루카스는 이미 죽어서 없어진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현재를 살아가는 드래곤들에게 혹여 잘못된 결정을 내릴까 염려가 되었다.
“그렇습니까…….”
아만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자, 루카스는 화가 왈칵 치밀어 올랐다.
“그래.”
하지만 누구보다 화가 나는 것은 아만 본인일 것이다.
영역을 침범당한 드래곤은 루카스가 아닌 아만이었으니 말이다.
“로드. 이곳은 괜찮습니다.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멍하니 앞을 바라보던 아만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됐다. 저들은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이곳에 있는 증거만 잘 수습해 주거라.”
바닥에 쓰러진 사내 둘을 가리킨 루카스가 아만의 어깨를 조심히 두드렸다.
“예. 감사합니다. 로드.”
“…내가 고맙네.”
그런 아만에게 쓴 미소로 화답해 보인 루카스가 알렉과 새먼트의 팔을 붙잡았다.
-파앗!
루카스가 텔레포트해 사라지자, 아만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아… 거지 같은 용생… 다 뒤집어엎고 그만 살까…….”
마치 신들에게 나직하게 협박이라도 하는 듯한 아만.
이렇게라도 하면 신들이 무어라 대답이라도 해줄 것만 같았다.
“옘병…….”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라고는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뿐이었다.
***
알렉과 새먼트를 데리고 텔레포트한 루카스는 저택 내에서도 쓰지 않는 빈방으로 들어갔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들의 몰골을 보고 놀랄까 싶어서 말이다.
“개자식들… 애들을 데리고 가?”
하지만 루카스는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폴라와 스키르를 데리고 백작저를 몰래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자, 울화통이 터져 미칠 것만 같았다.
“X자식들…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들…….”
잠이든 그들의 면전에 대고 끊임없이 욕지거릴 하는 루카스의 얼굴이 점차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X놈의 자식들이. 애들을 데리고…….”
루카스의 분노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도대체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자식들이야 이거?”
-움찔!
한참을 그렇게 욕지거리를 해대고 있자, 누워있던 새먼트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들이 지금 깨어나는 것은 그리 좋은 게 아니다.
“귀찮은 자식들.”
구시렁거리던 루카스가 한 손을 들어 그들을 다시 잠재웠다.
이제 이들의 처분이 문제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은 둘째치고, 이미 안면이 있다 못해 나름대로 돈독한 사이기까지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동료들이 모두 죽어버렸으니…….’
루카스 역시도 그들과 어제까지만 해도 함께했던 기억이 있기에 마음 한구석이 쓰려왔다.
그는 수천 년을 살아내며 수많은 죽음을 마주했지만, 죽음은 언제나 썼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쉰 그가 방을 빠져나왔다.
‘아만에게 그들의 시신도 수습해 달라 해야겠군.’
어찌 되었건 동료들의 장례는 치를 수 있게 해줘야 했다.
전장에서 동료를 잃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치유되지 않겠지만, 될 수 있으면 후회가 남을만한 일을 최대한 줄여주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
현장을 모두 수습한 아만은 먼저 시타타에 들러 루카스를 찾았다.
“로드.”
“그래. 고생 많았다.”
아만의 씁쓸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한 루카스는 안쓰러운 마음이 물밀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창고를 찾아서 당장이라도 주고 싶은데…….’
지난 3년간은 너무나도 평화로운 나날의 연속이었기에, 창고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창고 속에 있는 수많은 아티팩트틀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예. 말씀하신 대로 시신들 역시 수습해서 가지고 왔습니다만…….”
“……?”
“시신들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로드께서도 보셨다시피… 새까맣게 타버려서 말입니다.”
그들의 상태는 루카스 역시도 알고 있었다.
폴라가 쓴 전격 마법 때문에 그들의 시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런 모습이라도 마지막 가는 길에 제 손으로 잘 수습해 보내주고 싶을게다.”
“그렇죠.”
하지만 그 누구도 폴라를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폴라가 아니었다면 이미 전부 전멸하고도 남았을 테니 말이다.
“시신들은 어디에 있느냐?”
“사용인들이 보지 못하게 광산 근처에 작은 움막을 지어 그곳에 두었습니다.”
아만은 이런 상황에서도 루카스의 주변을 배려하고 있었다. 본래 다른 드래곤들이라면 그깟 인간들의 시신 따위는 집 앞에 널브려 놓았을 것이다.
“그래.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만의 세심한 배려에 루카스는 애잔했던 마음이 더욱 커다래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루카스의 칭찬에 웃어 보이는 아만의 얼굴에는 이전과 같은 웃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칭찬만 해주면 그렇게 난리를 치던 애가…….’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루카스.
“현장에 이상한 점은 없었느냐?”
“이상한 점이라면… 그곳에 와이번이 나타난 것이겠죠.”
그의 말이 맞았다.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닌 십여 마리의 와이번이라니.
“그렇지. 그것들이 전부 미치지 않고서야 그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 누군가 고의로 조종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루카스의 말에 아만의 이가 부득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게다가 지난번 에스테릴 사막에서도 와이번들의 움직임이 이상했었다.”
“그렇습니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아만.
“아, 그리고 이게 있었습니다.”
아만이 제 품속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게 뭐지?”
상자를 조심히 열자 그곳에는 까만 구슬이 하나 들어있었다.
“저도 아직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마족의 기운이 옅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하… 마족이라…….”
치가 떨려왔다. 도대체 이 마족 놈들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옅게 느껴진다니?”
“저번에 봤던 몰렉의 숨결과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하셀에게 가져가 보는 게 좋겠구나.”
루카스는 지금 인간의 모습이었기에 아티팩트에 숨겨진 본질까지 꿰뚫어 보는 것은 힘들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말을 끝마치는 아만의 표정이 뭔가 석연찮았다. 마치 말을 하려다 마는 사람처럼.
“또 다른 이상한 점은 없던가?”
루카스가 그것을 눈치채고 재차 되묻자, 아만은 입을 몇 번이나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조금 이상합니다.”
“어디서?”
“이곳 시타타에서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을 머뭇거린 아만이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어떤 점이 이상하지?”
“마치 몬스터가… 저를 따라오는 느낌입니다.”
아만의 말을 들은 루카스가 거칠게 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겼다.
“젠장. 돌아버리겠네.”
결국 루카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푸른 늑대 용병 단원이 어째서 몬스터도 잘 나오지 않는 길목에서 습격을 당해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장 들고 하셀에게 가봐라. 내 생각엔 네가 들고 있는 지금 그 짜증 나는 물건이 원인인 듯싶으니 말이다.”
울고 싶었다. 도대체 왜 신은 평화롭게만 살게 해달라는 제 부탁을 이리도 들어주지 않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예.”
-파앗!
순식간에 아만이 사라지자, 루카스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도대체 왜!”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더욱 짜증 나는 것은 이 짜증 나고 거지 같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루카스는 차라리 다시 한번 드래곤으로 살 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밀려왔다.
“내가 왜 인간을 선택해서는!”
자신이 죽던 그 날이 후회가 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뒈지기만 해봐. 아주 쑥대밭을 만들어 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난 루카스가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
특히나 시비에 백작이나 제 엄마인 블레인이 알아서 좋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위험해질까 아카데미에도 돌려보내질 않았는데, 저렇게 초주검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특단의 조처를 내릴지 몰랐다.
용병 단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이들을 먼저 원상태로 돌려두는 것이 급선무였다.
“애들은? 괜찮아?”
방에 들어선 루카스가 아이들에게로 다가서자, 넬라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맺히기 시작했다.
“아, 오빠…….”
“왜 그래?”
놀란 루카스가 폴라와 스키르를 번갈아 살폈다.
“언니랑 오빠가 이상해…….”
“……?”
아이들의 호흡이나 맥박은 모두 정상이었다.
“언니는 계속 미안하다고 하고, 오빠는… 흑…! 살려달라고 빌어…….”
“하아……,”
넬라의 말에 루카스는 발아래가 꺼지는 기분이었다.
‘기억을 지워야 하나…….’
그만한 일을 겪었으니 분명 정신적인 충격이 엄청났을 것이다.
게다가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이들에게 처음일 것이다.
“괜찮을 거야.”
넬라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는 루카스.
‘산 넘어 산이네.’
***
부활교 교주의 집무실.
“그래. 몇이나 되던가?”
편안해 보이는 소파에 앉은 교주는 더 이상 노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예. 총 열한 마리였습니다.”
“클클… 그래… 주변에 다른 몬스터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는 교주의 앞에 선 사내의 낮은 자세가 마치 진짜 신을 마주한 사람의 것과 같았다.
“와이번이 가장 빨랐을 뿐이지, 다른 곳에서도 몬스터가 대거 이동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호오… 꽤나 괜찮은 물건이구먼.”
“예.”
“그래서 지금 그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다시 가보니 현장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살아서 그것도 가지고 나간 듯합니다.”
사내의 말에 교주의 눈이 잠시 크게 뜨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구나. 물건을 추적해라.”
“예. 얀테의 명을 받듭니다.”
“그래. 고생이 많았구나. 포상은 따로 내리도록 하지.”
교주가 건넨 칭찬의 말에 사내의 자세는 더욱 낮게 수그러졌다.
“감사합니다. 나의 얀테시여.”
감사의 말과 함께 자연스레 교주의 발등에 키스를 해 보인 사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을 빠져나갔다.
“그래. 드디어 성과가 보이는구나…….”
찻잔을 천천히 집어 든 교주의 입매가 탐욕에 한껏 말려 올라갔다.
“그래야지. 암 그래야지…! 클클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