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운수 좋은 날 (2)
“크하하! 진짜?”
“그렇다니까요! 아니, 형님은 속고만 사셨나 그래?”
용병 단원들이 탄 마차 안은 거의 축제 분위기나 다름없었다.
“야, 말이 안 되지 않냐? 어떻게 네가 혼자서 오크를 두 마리나 잡아?”
“허, 참. 어이가 없네? 잘 들어보세요. 내가 그러니까…….”
계속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로브를 푹 눌러쓴 스키르와 폴라 역시도 숨죽여 몇 번이고 웃고 말았다.
“야, 됐고! 이번에 황성에 가면 새로 생긴 거기에나 가보자고.”
“어디요?”
“그 이번에 아르헨 양이 새로 오픈한 술집.”
“오, 아르헨 양이요?”
아르헨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운영하는 술집은 황성 내에서도 친절하고 서비스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작은 술집이었던 그곳은 어느새 지점이 세 개나 늘어나 규모가 꽤 커지고 있었다.
“그래. 지난번에 새로 오픈하면 서비스 왕창 챙겨준다고 했어.”
“아니, 형님. 그런데 우리만큼 먹으면 서비스를 안 주고는 못 배기지 않겠어요?”
“하하하! 그것도 맞네 그래.”
“이번에 머리도 나고 했으니… 아르헨 양에게 데이트 신청이나 한번 해볼까요?”
텅 비어있던 머리 한가운데에 빼꼼 고개를 내민 까슬한 머리털들을 조심스레 쓸어 넘기는 피르칸.
“크하하하! 야, 꿈 깨라! 아르헨 양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몇인 줄이나 아냐?”
“쳇! 혹시 압니까? 나 같은 스타일을 의외로 좋아할 수도 있지 않수?!”
알렉의 일침에 피르칸은 입술을 삐죽여 보였다.
“웃기시네!”
“손님들 거 뭐라도 좀 드쇼.”
본인들만 웃고 떠드는 것이 괜스레 미안했는지, 피르칸이 간식 상자를 슬쩍 밀었다.
“…괜찮소.”
로브를 눌러쓴 스키르가 손으로 슬쩍 간식 상자를 밀어내자, 폴라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나 먹을 거야.”
작게 속삭이는 폴라의 말에 스키르는 흠칫 놀라 얼른 간식 상자를 다시 가져왔다.
“머, 먹겠소.”
“그래, 먹어야지. 앞으로 네댓 시간은 더 가야 오리하에 도착하는데 그때까지 굶을 거요?”
그의 말이 맞았다. 벌써 오후 두 시쯤 되었는데, 점심도 걸렀으니 배가 고플 것이다.
“고맙소.”
짤막하게 인사해 보인 스키르가 간식 상자를 폴라의 앞에 열어 가져가자, 그녀는 얼른 손을 뻗어 간식 몇 개를 집어 들었다.
“몰랐는데 여자분이셨구먼.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그렇게 나쁜 사람들 아니니 너무 걱정마쇼.”
작게 속삭였지만 폴라의 목소리가 들렸던 건지 단원들은 너스레를 떨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맞아요. 우리가 생긴 게 좀 험해서 그렇지… 다들 그 바게트의 속처럼 부드러운 사람들이요.”
폴라의 손에 들려있는 바게트를 가리켜 보이는 피르칸의 말에, 폴라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요. 얼른 들어요. 아, 여기 물도 있으니 같이 천천히 드시고.”
친절한 단원들의 행동에 폴라는 당장이라도 로브를 벗어던지고 ‘짜잔’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꾹 눌러 참기로 했다.
그때.
-끼기긱… 끼긱…….
갑자기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엥? 이게 뭔 소리여?”
“마차 바퀴에 뭐가 걸렸나 본데요? 잠시 세워서 보고 갑시다.”
“그래.”
마차 바퀴에 뭔가 걸렸는지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괴상한 소리가 반복됐다.
-끼기긱… 끼기긱…….
마차가 서서히 멈춰서고 피르칸과 발테리가 내려서 마차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여기가 문제네.”
“발테리, 거기 그 나뭇가지 좀 주워줘 봐라.”
“예, 형님.”
원인은 마차 바퀴에 커다란 돌이 끼어 자꾸만 괴상한 소리가 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덜컥! 덜컥!
피르칸은 주워 든 나뭇가지로 몇 번이고 돌을 빼내 봤지만, 잘되지 않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아이고, 나와보십쇼.”
결국 제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든 발테리가 피르칸을 물러서게 했다.
“야, 아주 꽉 끼였다.”
“이런… 건! 이렇… 게!”
힘을 줘가며 돌부리를 빼내는 발테리.
“끄응! 차!”
-달칵!
결국 돌뿌리가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퀴에서 빠져 굴러 나오고 말았다.
“됐다!”
“크. 네가 나보다 낫다 그래.”
“당연한 소릴 하십니까?”
“콱! 그냥.”
발테리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주먹을 들어 때리는 시늉을 해 보이는 피르칸.
“갑시… 어?”
그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숙여… 조용히 고개 숙여…….”
그게 무엇인지 재빠르게 알아차린 피르칸이 발테리의 등허리를 지그시 누르며 속삭였다.
“…….”
“거기 뭐 있…!?”
일순 조용해진 바깥공기에 새먼트가 마차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끼오오오오! 끼오오오오!
“X 됐다.”
하늘을 뒤덮었던 그림자 중 하나가 그들을 발견하고 빠르게 강하하기 시작했다.
“다들 전투태세!!!”
“뭐, 뭐야!?”
“와이번이다!!!”
-끼오오오오!!! 끼에에에에!!!
창공을 가르는 끔찍한 괴성이 지면을 가득 메우고.
“키모! 활들어!”
“끄아아아!!!”
빠르게 다가온 와이번 한 마리가 피르칸의 다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피르칸!”
피르칸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의 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마차에서 내린 스키르와 폴라 역시도 이 상황을 판단해 보려 애를 썼다.
“포, 폴라! 이쪽으로 와!”
“야! 정신 차려! 버프 넣어!!!”
“아, 알겠어!”
뒤집어썼던 로브를 거칠게 벗어 던진 폴라가 스키르에게 소리쳤다.
-끼에에에에!
피르칸의 다리를 공격했던 와이번 한 마리가 재빠르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강하기를 반복했다.
“쏴! 지금!”
마차 뒤편에 자리를 잡은 키모가 쏜 화살이 와이번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끼에에엑!
하지만 와이번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스 애로우!”
스키르의 버프를 몸에 칭칭 두른 폴라가 주문을 시전하자, 수십 개의 얼음 화살이 쏘아져 와이번을 덮쳤다.
-끼에엑! 에에엑!
“야! 너 어떻게……!”
그제야 폴라를 발견한 알렉이 냅다 소리쳤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제 한 마리라고요!”
“크윽! 네 말이 맞다! 그럼 조심해야 된다!!!”
알렉의 외침에 폴라 역시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다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 동료의 몸에 내리꽂힌 얼음 화살을 본 다른 와이번들이 하늘을 빙빙 돌며 틈을 찾기 시작했다.
-끼오오오!
와이번이 도대체 여기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모르겠는데 저만한 숫자의 와이번이라니.
사실 용병 단원들은 폴라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피르칸! 정신 차려!!!”
“끄아아아…….”
피르칸은 다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으면서도, 손에는 검을 꽉 그러쥔 채 놓지 않았다.
“크으… 다들 전투태세! 흐트러지지 마라!”
“키르! 지혈 마법이라도 좀 써봐!”
“아, 알았어.”
피르칸에게 후다닥 뛰어간 스키르의 손에서 빛이 번져나가자 분수처럼 콸콸 쏟아지던 피가 점차 멎기 시작했다.
“고… 고마워. 죽는 줄 알았다야…….”
“주, 죽긴 왜 죽는다고 그러는가! 걱정 말게.”
멎어가는 피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짓는 피르칸.
“오, 온다!”
다른 와이번 한 마리가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와이번이 노리는 것은…….
-끼오오오오!
“키르!!!”
폴라의 외침에 고개를 들자, 스키르가 마주한 것은 와이번의 흉흉한 발톱이었다.
‘아, 죽었다.’
-와드득! 콰득!
“…어?”
고통이 찾아올 것을 직감한 스키르가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분명 어디선가 뼈가 부서지고 살이 뚫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제 몸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그리고 몸이 너무 무거웠다. 누군가 제 위를 덮고 있는 것 같은데…….
“…크어억. 으억.”
“피, 피르칸?
제 몸을 덮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피르칸이었다.
와이번이 자신을 덮쳐올 때 순식간에 스키르의 몸을 끌어당겨 제 아래에 둔 피르칸은, 와이번의 발톱에 몸이 꿰뚫려 핏물을 왈칵왈칵 쏟아내고 있었다.
“적을 섬멸하라! 아이스 스피어!!!”
피르칸의 몸에 발톱을 박아넣은 와이번의 몸에 얼음으로 된 창을 꽂아 넣는 폴라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었다.
“피르칸!!!”
용병 단원들 역시 제 동료의 몸에 발톱을 꽂아 넣은 와이번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크헉… 쿨럭… 크억!”
“…피르칸?”
제 몸 위로 쏟아지는 피르칸의 핏물을 멍하니 바라보는 스키르의 몸이 떨려오고 있었다.
“저, 저기… 괜찮은가?”
“크억… 괜찮냐고……?”
“그, 그게… 피가 많이나, 나는데…….”
스키르는 제 몸 위를 덮은 커다란 덩치의 피르칸의 모습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잔인한 현실에 현실감이 모두 사라져 버린 듯 그의 눈에 초점이 없었다.
“크헉! 도련님… 나한테… 빚진 거야…….”
“아니, 그러니까… 피르칸 피가 많이 난다.”
“피르칸!!! 야! 엄호해!!”
달려온 알렉은 그의 몸 위에 박혀있는, 이제는 쓰러져버린 와이번의 발톱을 빼내려 애를 쓰고 있었다.
“도와줘! 이 자식들아! 도와주라고!!!”
하늘을 활공하는 와이번 무리는 어찌 되었건 상관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는 피르칸을 살려야 한다.
“야! 이 개자식아!!! 마법이라도 좀 써봐!!!”
알렉의 처절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 마, 마법.”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스키르가 빠르게 마법을 시전했다.
“너도 와서 좀 도우라고!! 이걸 빼내야… 빼내야 할 거 아니냐고!!!”
“형님…….”
“야, 피르칸. 정신 차려. 이거 마법 좀 쓰고 하면 되니까. 어? 별거 아냐. 그러니까 정신 붙들어.”
쏟아지는 피르칸의 핏물을 손으로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애쓰는 알렉.
“크흑… 형님… 나 이, 이대로 죽, 죽는 거요?”
“개소리하지 마! 이 자식아! 죽긴 뭘 죽어!!!”
알렉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처절함에, 피르칸은 무언가를 직감한 듯싶었다.
“끄어어억!”
그때 제 몸에서 와이번의 발톱이 뽑혀 나가자, 피르칸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마법 쓰라고! 마법!!!”
“마, 마법… 마법…….”
넋이 나가버린 듯한 스키르는 제 옆으로 풀썩 쓰러진 알렉에게서 겨우 빠져나와 멍하니 그의 환부에 손을 가져갔다.
-사아아
스키르의 손에서 빛이 퍼져나가자, 피가 점차 멎기 시작했다.
“돼, 됐다. 피르칸! 야, 됐어! 이제 피 안 난다.”
“크억… 억…….”
하지만 피르칸의 상태는 그 전과 똑같았다.
“야, 이거 왜 이래…? 어?”
“마법… 더…….”
넋이 나간 스키르의 손에서 연신 빛이 터져 나왔다.
-사아아아
“키르! 정신 차려! 버프 넣어! 저 자식들 또 오니까!”
피르칸에게 집중했던 그 잠깐 사이에도 와이번들은 몇 번이나 땅과 하늘을 반복해 왔다 갔다 하며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 마나가… 마나가…….”
“정신 차리라고!!!”
-끼에에에에! 끼에에!!
스키르는 마지막 남은 마나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버프를 걸어줄 것인지 눈앞에 있는 피르칸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 줄 것인지가 문제였다.
“미안해. 폴라.”
-사아아…….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피르칸에게 모두 쏟아부은 스키르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피르칸! 피르칸!!!”
“형님… 나 이제 머리 나는데…….”
“그래, 알아. 너 머리 나는 거 알아! 그러니까 정신 차려라. 응?”
“나… 이번에 가면… 아르헨 양에게 데이트 신청… 쿨럭!”
피르칸의 입에서 핏물이 왈칵 쏟아져 나오자, 알렉이 그의 입가를 손으로 연신 닦아냈다.
“말하지 마… 어? 말하니까 너 피나. 그러니까 말 좀 하지 말아봐라…….”
“신청… 할 수 있을까……?”
피르칸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아까 말 안 한게 있는데 아르헨 양이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 그러니까 말 좀 그만해 봐라. 응?”
사정없이 찌푸려진 알렉의 미간에 피르칸이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짚었다.
“형님… 나 이제 머리 많이 날 건데… 형님도… 쿨럭! 인상 쓰면… 나이 들어 보인다니까…….”
제 미간을 꾸욱 누르는 피르칸의 손에 알렉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래. 안 쓸게. 인상 안 쓸게. 그러니까 말 좀 그만해 봐… 어?”
“근데 형님… 나 너무 잠이 와.”
“안 돼. 어? 야, 자면 안 된다고. 저기, 그 뭐야. 황성 가서 그때 우리 자고 싶었던 그 여관 있지? 거기 가서 자자.”
“쿨럭… 진짜? 우리 그때 돈 없어서… 못 갔잖아… 거기…….”
피르칸의 입가에 잠시나마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거기 가서 자자. 내가 약속할게. 내가 돈도 다 낼게.”
그런 그의 반응에 알렉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크헉… 헉… 우와… 우리 짠돌이가… 무슨 일이래…….”
“야, 이번에 우리 돈 많이 벌었잖아. 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말고 거기 가서 자자… 어?”
점차 감겨오는 피르칸의 눈꺼풀에, 알렉은 얼른 그의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형님… 나는… 근데… 거기 가서… 못 잘 것 같아…….”
결국 피르칸의 눈이 감기고, 피 얼룩이 가득 진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피르칸!!! 피르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