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대담한 계획.
“형님!! 이것 좀 보세요!!!”
알렉은 아침부터 호들갑을 떠는 피르칸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
“야… 소리 지르지 마라. 머리 울린다.”
“아니, 형님! 이거 도대체 어디서 난 겁니까? 이것 좀 보세요! 여기!”
알렉의 짜증 섞인 말에도 피르칸은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뭐 임마! 엥!? 너 머리 나냐!?”
“크흡…! 형님도 그렇게 보이시죠?”
피르칸이 가리킨 곳을 본 알렉 역시도 눈이 번쩍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반짝이던 피르칸의 정수리에 까만 털들이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그거 진짜 효과가 직빵인가 본데……?”
“도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까슬하게 돋아난 털들을 조심스레 매만지는 피르칸의 눈에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그렇게 좋냐?”
“흡! 형님께서도 털 없는 설움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저번에 어떤 소리까지 들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알고말고…….”
“크흡… 할아버지라뇨! 그 꼬마가 저에게 할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아저씨도 아니고 할아버지!!!”
바락바락 소리를 치는 피르칸의 목소리에는 설움이 뚝뚝 묻어났다.
지난번에 시장에 들렀을 때, 좌판을 서성이던 피르칸에게 다가온 꼬마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화근이었다.
게다가 피르칸은 관심 있는 여성이 생길 때마다 대시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들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도통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던 와중에 피르칸은 그 이유를 알아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다 좋은데… 머리가…’라며 거절당했던 그날 밤, 피르칸도 울고 용병 단원들도 함께 울었다.
“형님. 저도 이제 장가갈 수 있는 겁니까…?”
“그래! 갈 수 있지… 있어!”
지난날을 떠올리던 알렉 역시도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둘은 아침부터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나눴다.
“머리가 났다! 머리가!!!”
진짜로 머리가 자라난다면 머리카락 대신 길러낸 덥수룩한 수염도 곧 깔끔하게 사라질 것이다.
***
“떠나신다구요?”
용병 단원들은 다음 날 아침 떠나기 위해 미리 채비를 서둘렀다.
“그래. 우리도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또 일을 해야 하지 않겠냐?”
“아쉬워요…….”
폴라는 그동안 정이 꽤 많이 들었는지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아쉽긴. 어차피 황성 쪽으로 갈 테니 다음에 너희가 돌아오거든 또 만날 수 있어.”
“어? 황성 쪽으로 가세요?”
황성이라는 말에 폴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그래. 이번 의뢰가 황성으로 가는 의뢰라서 말이야.”
“그럼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응? 너도?”
갑작스러운 폴라의 요청에, 알렉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저는 사실 아카데미에 돌아가고 싶어요. 다음 학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 기말고사도 봐야 해요.”
“흐음… 이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알렉의 시선이 주변을 한번 훑었다.
“그건 힘들지 않을까? 위험하기도 하고…….”
“잊으신 거 아니죠? 저 마법사예요.”
“그건 그런데…….”
폴라의 말에 다시 한번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인 단장이 다른 핑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폴라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온통 시커먼 남자밖에 없는 용병단에 여자인 폴라가 함께하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만 있다면 불편하지 않을 텐데, 폴라가 함께함으로써 서로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이 올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지난날 사막에서부터 아이들과 함께했던 단원들은 그 불편함을 몸소 체험했었다.
화장실을 따로 만들었으며 아무리 더워도 웃통 한번 시원하게 벗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불편할 거다.”
“…그런가요.”
“그러지 말고 백작가에 부탁해서 스크롤을 쓰는 것은 어떠냐?”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게 가장 편한 방법이긴 했다.
하지만 시비에 백작이 자신을 후원하고 있는 후견인이기도 했고, 안 그래도 백작가에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에 스크롤까지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백작님께서 위험하다고 못 가게 하신 것 아니냐?”
“그건 그런데…….”
폴라 역시도 알고 있었다. 시비에 백작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폴라는 상급반 졸업이 아닌 최상급반 졸업장을 손에 쥐고 싶었다.
축제 때 퍼레이드의 맨 앞자리는 아니더라도 최상급반 학생으로서 퍼레이드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게 자신을 후원하는 백작가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말고 백작님께 한번 말씀드려 봐라. 우리와 함께 가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구나.”
알렉의 단호한 말에 폴라 역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황성에 가거든 우리 다시 만나요.”
“그래, 그러자.”
싱긋 웃어 보인 알렉이 폴라의 어깨를 두어 번 다정히 두드렸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푸른 늑대 용병 단원들은 수도로 떠날 것이다.
‘나도 가고 싶은데…….’
***
“야, 키르. 너 돈 좀 있냐?”
“...돈? 갑자기 돈은 왜 묻는가?”
스키르는 갑작스러운 폴라의 물음에 적잖이 당황한 듯 눈을 커다랗게 떠 보였다.
“응. 우리 스크롤 사서 아카데미로 다시 가자.”
“아카데미로? 왜?”
“나는 돌아가고 싶어. 졸업도 해야 하고. 또…….”
스키르는 이런 폴라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대충 졸업하자던 폴라가 자신에게 돈까지 내놓으라며 돌아가겠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백작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잖은가. 졸업은 상급반에서 해도 충분하다.”
“그래서 돈 있어 없어!”
시큰둥한 스키르의 반응에 버럭 소리치는 폴라.
“…있어.”
“줘봐. 내가 나중에 갚을게.”
그런 폴라의 외침에 풀이 죽은 스키르가 제 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얼른 내놓으라는 듯 내민 그녀의 손짓은 거의 뒷골목 불량배나 다름없었다.
“아, 안 되는데…….”
“야, 아깝냐? 내가 뭐 안 갚는대? 나도 졸업하면 마법사야! 돈 벌 수 있어!”
꼼지락거리며 주머니를 꽉 쥐어 보이는 스키르.
폴라는 그런 스키르의 주머니를 곧 뺏을 기세였다.
“갑자기 왜 그러는가!”
“아, 진짜! 돌아가고 싶다잖아!”
“백작님께서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짜증 나!”
폴라가 짜증을 내며 홱 돌아서 가버리자, 스키르는 벙찐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아…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
스키르를 두고 돌아 나와버린 폴라는 홀로 광장으로 향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우선 탈탈 털어서라도 스크롤을 구매해 볼 생각이었다.
-딸랑
‘제이네 마법 상점’이라고 쓰인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에 달린 종이 기분 좋은 소릴 내며 울렸다.
“어서 오십쇼!”
호쾌한 주인장의 목소리에 폴라는 조심스레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저… 스크롤을 사고 싶은데요.”
“어디로 가는 스크롤을 사고 싶으신가요?”
“황성으로 가고 싶어요.”
폴라의 말에 상점 주인은 능숙하게 서랍을 열어 목록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황성… 황성… 아란트 황성…….”
종이를 몇 장이나 넘기는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상점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예, 여기 있네요. 아란트 황성!”
“얼마에요?”
“우리 아가씨는 예쁘니까… 특별히 10퍼센트 할인가를 적용해서! 36골드!”
가격을 들은 폴라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 삼십… 육 골드요?”
어찌나 놀랐는지 목소리는 물론 손까지 떨려왔다.
36골드라니! 폴라의 1년 용돈이 30골드 정도 되는 수준이었다.
황성의 말단 경비병의 월급이 20골드 정도였다.
그런데 36골드라니!
“예, 엄청 싸게 드리는 거요. 지난번에는 43골드에 팔았다고!”
당당하게 가게에 들어와 황성 스크롤을 찾는 손님이기에 저렴한 가격을 불렀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주인의 안색 역시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러쇼.”
신경질적으로 스크롤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은 주인이 손을 휘 내저었다.
상점을 빠져나온 폴라 역시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스키르에게 돈을 빌렸어도 감당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자신이 가진 용돈 역시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스크롤을 사기엔 턱없이 모자라는 금액이었다.
‘36골드라니……!’
한숨을 푹푹 내쉬며 광장을 추적추적 걷고 있는데, 누군가 폴라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야?”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스키르였다.
“알 게 뭐야. 저리 가.”
폴라는 이러면 안 되는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쌀쌀맞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여기… 받아.”
하지만 스키르는 그런 폴라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용돈 주머니를 통째로 내밀었다.
“됐어. 이제 필요 없어.”
하지만 폴라는 고개를 저어 그것을 거절했다.
스키르의 용돈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저 주머니 안에 30골드가 넘는 금액이 들어있을 리는 없었다.
“왜?”
“안 갈 거야.”
“최상급반 가고 싶은 거 아니었나?”
스키르는 알고 있었다. 왜 그렇게 폴라가 아카데미로 돌아가고 싶어 했는지.
“됐어…….”
시무룩한 폴라의 반응에 덩달아 스키르의 어깨도 축 처졌다.
“맛있는 거 먹을까?”
스키르는 항상 그랬다. 아무리 폴라가 툴툴거려도, 쌀쌀맞고 못되게 굴어도 언제나 그녀에게 다정했다.
“치… 내가 무슨 돼지야? 먹을 거 주면 기분 좋아하게?”
“그래도 맛있는 걸 먹으면 좋아했잖은가.”
스키르는 처음 봤을 때보다 덩치만 커다래졌을 뿐, 언제나 한결같았다.
맨 처음엔 건방진 공작가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은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껍데기일 뿐이었다.
그 껍데기 안에는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들어있었다.
폴라 역시도 그것을 잘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언제나 툴툴거리고 말았다.
“미안해.”
“응? 아니, 괜찮다. 꼭 그렇게 가고 싶다면 우리 같이 돌아갈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자. 내가 백작님께 말씀드려볼 테니…….”
폴라의 사과에 스키르는 괜찮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아냐. 용병 단장님께도 같이 갈 수 있겠느냐고 여쭤봤는데… 안 된대.”
“아, 그분들이 황성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다.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하던가?”
“모르겠어. 그냥 위험하다고 하시는데…….”
위험한 것은 사실 둘째치고 불편한 것이 가장 먼저일 것이다. 폴라는 뛰어난 마법사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시타타에서 황성으로 가는 길은 위험할 것도 딱히 없었다.
가끔가다 나오는 몬스터도 대부분이 하위 몬스터였으니 말이다.
“흐음… 그런가…….”
“응. 그냥 다음 학기에 가지 뭐. 백작님께 나도 말씀드려 봐야지.”
폴라는 거의 체념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 그럼 우리가 의뢰를 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때 스키르의 머릿속에 불현듯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용병 단원에게 의뢰를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거야.”
“…어?”
그랬다. 용병 단원들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지, 의뢰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용병 길드로 가보자. 그곳에 의뢰를 등록하면 될 거다.”
“키르! 너 진짜 똑똑하다!”
폴라의 칭찬에 스키르는 부끄러운 듯 입술을 씰룩였다.
“크흠. 일단 가보자. 마차를 빌려 가도 좋지만, 단원들과 가는 게 더 안전하기도 할 거다.”
“아, 그런데 백작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지……?”
“그건…….”
사실 가장 큰 걱정은 시비에 백작이었다.
시비에 백작의 반대 때문에 넘쳐나는 백작저의 마차 한 대도 얻어타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아니. 내게 다 생각이 있다.”
“뭔데?”
“몰래 가면 되지 않은가.”
스키르의 대담한 행동에, 폴라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알던 그 스키르가 맞는지 의심까지 들었다.
“진짜? 몰래?”
“그래. 몰래. 용병 길드에는 그저 사람 둘을 운송해 달라고 하고, 내일 아침 백작저에서 몰래 빠져나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와… 대담해 키르. 달라 보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