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갱생.
검은손 길드라는 곳을 탈탈 털어보니, 무슨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오듯 나쁜 놈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국경지대라는 이점을 이용해 옛날부터 주민을 비롯한 상인들의 등골을 쏙쏙 빼먹는 것은 물론, 지난번 구해줬던 엘프 후손 같은 경우도 이들과 관련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겠지.”
“무, 물론입니다!”
루카스의 앞에 꿇어앉은 사내의 고개가 미친 듯 끄덕였다.
사내의 뒤로는 새까맣게 타버린 부하 몇몇과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이 부복해 있었고, 그 옆엔 엘프의 후손이었던 케이틀린을 겁박했던 빚쟁이들 역시 엎드려 있었다.
“그럼 조금 전 말했던 네놈들과 관련된 자들을 종이에 모두 적어라.”
“모, 모두 말씀이십니까?”
“그래. 한 놈도 빼지 말고 적어라. 또한 명단에 적힌 것은 행운이라고 봐도 좋다. 명단에 없는 자들은 이런 갱생의 기회조차 주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루카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처박고는 명단을 채워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완성된 명단을 넘기는 사내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그래. 내게 넘긴 이 명단이 전부일 거라 믿어주지. 그러니 너 역시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내가 바짝 엎드려 연신 절을 해대자 루카스의 입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네 놈도 마찬가지. 다시 한번 이 마을에서 고리대금업과 같은 개 같은 짓을 벌인다면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물론입니다!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루카스의 말에 그 역시 이마를 땅에 붙였다.
“내가 했던 말들을 잘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케이틀린이라는 아이의 애비가 빚을 지거든 그놈에게 가서 받아라. 또한 그 아이의 신변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거든 네놈들의 목숨은 전부 없다.”
“예! 알겠습니다!”
명단을 접어 품에 넣은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내게 복수할 마음이 생기거든 언제든 찾아와라.”
루카스가 몸을 돌려 건물을 빠져나가자, 바닥에 엎드린 사내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
“진심이십니까? 저 자식은 아무리 봐도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닥쳐. 이 개자식아. 네놈이 준 정보 때문에 우리 애들 다섯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냥 손 놓고 두고 보라는 거냐?”
사방이 뻥 뚫려버린 건물. 그 안에서 검은손 길드의 행동대장인 붉은 머리 사내가 고리대금업 수금책인 주황 머리 사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 자식은 최소 5서클, 아니 6서클은 넘을 겁니다. 아까 보셨잖습니까. 그 자식이 쓴 파이어스톰이 이 건물 전체를 뒤덮었습니다.”
주황 머리 사내의 말에 그 곁에 선 다른 부하 하나가 동조했다.
“맞습니다. 형님. 분한 마음은 알지만, 더 이상의 출혈은 안 됩니다.”
“그럼 무슨 좋은 수라도 있어?! 씨X! 저 자식이 내가 보스인 줄 알아 다행이지, 큰형님 돌아오시면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 거냐고!”
말을 거들던 사내는 붉은 머리 사내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검은손 길드의 진짜 수장은 지금 부재중이었다. 때문에 이 모든 사태를 수습하려면 조금 전 자신들을 무참히 짓밟았던 사내에게 복수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가 가진 돈이라도 가져다 죽은 부하들의 가족에게 위로금이라도 전하고 건물이라도 고칠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씨X. 마법쟁이 새끼 상대 처음 해봐? 마나 제어만 하면 마법쟁이는 다 X밥이야 알았어?”
“저희한테 그런 방법이 있기나 합니까? 아까 가진 마도구도 대부분 깨졌습니다. 그리고 저 정도 실력이면 우리가 가진 마나 제어 팔찌로는 턱도 없습니다.”
부하의 말에 사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휙 내저었다.
“따라와.”
사내를 따라나선 부하들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형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마을 입구에 위치한 라스칸 왕국 경비대였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혹시 헨트 경비 대장님 계십니까?”
그곳에 다가선 붉은 머리 사내가 경비대원 하나에게 넉살 좋게 물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네. 헨트 대장님은 왜?”
이미 그들은 아는 사이인지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크하하. 형님도 참. 헨트 대장님께 안부나 전할까 하고 왔습니다. 아, 그보다 악수나 한번 하시지요.”
갑작스레 건넨 악수 제안에 대원의 고개가 잠시 갸웃했지만, 이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얼른 손을 내밀었다.
“크흠. 뭐. 야, 대장님 좀 모셔와. 상단 사람이 왔다고 하면 아실 거다.”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 사내는 악수를 하는 척하면서 금화를 건넨 것이다.
뇌물을 받은 사내는 티가 나지 않게 금화를 주머니 속에 갈무리하며 다른 대원에게 명령했다.
“예.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헨트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초소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그래. 날 찾았다고?”
“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붉은 머리 사내와 그의 수하들이 동시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급한 일인가 보군. 이 새벽에 날 찾다니 말이야.”
“예. 잠시 이쪽으로…….”
사내가 손을 조심히 뻗자 경비 대장이 걸음을 옮겼다.
붉은 머리 사내는 초소 뒤에 위치한 으슥한 나무 뒤에 다다라서야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을 듣던 경비 대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래. 도와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의외로 쉽게 왕국 경비대의 지원을 얻어내자,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람 다섯을 살해한 살인자다. 그러니 왕국 경비대에서 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맞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허나.”
“……?”
“자네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경비 대장의 말에 사내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서렸다.
“그럼 이렇게 하심은 어떠십니까?”
하지만 사내는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경비 대장의 곁에 바짝 붙어 목소리를 낮췄다.
“뭔가.”
“대장님은 그저 저희에게 마나 제어 그물을 빌려만 주십시오. 대장님처럼 공사가 다망하신 분께서 이런 질 나쁜 범죄자와 대면했다가 변이라도 당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니 저희에게 물건을 빌려만 주시면…….”
“하, 어이가 없군. 자네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국가의 재산을 마음대로 빌려달라?”
대장의 날카로운 지적에도 사내는 그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휴, 압니다. 알고 말고요. 저는 그저 대장님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혹여 문제가 생기면… 저희 같은 치들이 마음대로 훔쳐 간 걸로 하면 어떻습니까?”
“흠…….”
고민하는 듯 대장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거 받으십시오. 나라를 위해 힘쓰시는데 제가 감사해서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대원들과 회식이라도 하시라는 뜻이니 오해는 마십시오.”
사내가 빵빵한 주머니 하나를 경비 대장의 품에 욱여넣다시피 하자, 대장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살폈다.
“크흠, 흠. 잘 쓰고 돌려놓기 바라네. 내가 자네를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것만 알아주게. 항상 몸조심하고.”
“물론입니다. 저 역시 대장님을 제 친형님과 같이 생각한다는 것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간사한 사내의 웃음이 나무 사이로 흘렀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다 보고 있다. 이 멍청이들아.’
그런 그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인간들은 한편으로는 똑똑한 듯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아니란 말이지. 저들은 특히 발전이 없는 머저리 들이로군.’
마나 제어 그물이라. 하마터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마나를 제어하는 물건들 중 가장 대표적인 물건으로는 마나 제어 팔찌가 있었다.
마나 코어가 위치한 심장과 가장 가까운 왼쪽 팔에 착용하는 팔찌는 범죄를 저지른 마법사나, 마법에 능통한 다른 종족을 구속시키는 데 쓰였다.
하지만 착용자의 서클이 높아짐에 따라 팔찌는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마나를 제어하는 아이템은 세대를 거듭하며 발전했다.
그중 가장 최근에 발명된 마나 제어 그물은 말 그대로 그물과도 같이 넓은 범위와 촘촘하게 박힌 마나 제어석으로 인해 제압이 용이했다.
항간에는 최상급 마나 제어 그물만 있으면 드래곤도 제압한다는 말이 돌았으니.
‘나름 똑똑한 발상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몰랐을 때지.’
루카스는 사라지는 사내들의 뒤를 조심히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소 뒤에 위치한 무기고에서 보따리 하나를 안아 든 붉은 머리 사내가 나왔다.
“씨X 새끼. 넌 뒈졌다.”
보따리를 살짝 열어 안을 확인한 사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여관으로 향하는 검은손 길드의 조직원들은 저마다 손에 무기가 들려있었다.
그들이 여관으로 향하는 마지막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복수가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이, 이런 씨X!”
코너를 돌자마자 나타난 루카스의 모습에 선두에 선 사내 하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래. 또 놀랐나 보군.”
“주, 준비해!”
붉은 머리 사내의 말에 다른 조직원들 역시 준비했던 대로 대열을 갖춰 루카스를 둘러쌌다.
“기대되는군. 네놈들이 나의 믿음을 배신하고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말이야.”
“너는 이미 뒈져있다. 이 씨X자식아!”
사내의 외침에 쏟아지기 시작한 공격.
가장 가까이에 선 사내의 손에 들린 장검이 루카스의 옆구리를 향했다.
그것을 필두로 펼쳐진 합공은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파칭! 콰칭! 칭!
하지만 그 모든 공격은 루카스가 펼친 방어 마법에 그대로 막히고 말았다.
“네놈들이 가져온 수가 이것뿐인가?”
여유로운 루카스의 표정과 말투. 하지만 다들 아무 상관 없는 듯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계속 장막을 베고 찌를 뿐이었다.
“지금!!!”
그때 사내의 외침에 담벼락 위에 선 조직원 하나가 그물을 던졌다.
“돼, 됐다!!!”
그물은 정확히 루카스를 덮쳤고, 그와 동시에 방어 마법 역시 소멸되고 말았다.
“이 개자식! 넌 이미 뒈져있다고 말했지? 엉!?”
“이 씨X자식! 내 동생 살려 내!!!”
그물을 뒤집어쓴 루카스를 둘러싼 사내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당장이라도 찌를 것처럼 위협하며 소리쳤다.
“그래. 이런 수를 준비했군. 내가 당하고 말았어.”
“여유 부리지 마! 이 개자식아!”
그물에 갇혀서도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하는 루카스. 그 모습을 본 붉은 머리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곱게 못 뒈지는 게 뭔지 알려주마. 이 벌레 같은 마법쟁이 자식아.”
“……벌레라.”
“그래! 이 벌레만도 못한 새끼야! 네 놈 손에 죽은 부하들의 복수를 몇 날 며칠이고 해주마! 끌고 가!”
-콰직… 콰지직…….
돌아서려던 붉은 머리 사내는 뒤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발을 멈췄다.
“뭔 소리야?”
“형님! 지금 당장 썰어버리죠! 이 자식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마나 그물에서 누가 빠져나온다고…….”
-콰지직……. 콰직!
“어, 어!?”
촘촘하게 박혀있던 마나 제어석이 하나둘 깨져나가기 시작하더니 루카스의 몸에 마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만 네 마나 좀 쓰마.’
마나 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힘이 있는데 왜?
그의 몸을 감싼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지자, 겁을 먹은 조직원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X됐다.”
-파직! 파앙!
결국 마나 그물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 허공에 날렸다.
“같잖은 수는 잘 봤다.”
반짝이는 가루 속에 싱긋 웃어 보이는 루카스의 모습은 마치.
“드, 드래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