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골동품.
루카스는 지금 몹시 기분이 좋았다.
여관에서 술을 퍼마시는 저 치들을 잠시 잊을 만큼 말이다.
‘이런 물건을 만날 줄이야.’
로브 주머니에 상자를 고이 넣어둔 루카스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상자를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만큼 유명한 물건이었기 때문.
하지만 왜 때문인지 상점 주인은 상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누군지 몰라도 외형을 기가 막히게 바꿔놨군.’
루카스의 기분을 이토록 좋게 만든 상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공간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수준 높은 아공간이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전 세계에 일곱 개가 있다고 알려진 이 아티팩트는 드래곤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엄청난 공간을 자랑했다.
‘주머니였을 때가 더 나은 것 같은데…….’
한적한 골목으로 접어든 루카스가 상자를 손에 쥔 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뱀이 혀를 놀리는 소리만큼 작고 쉭쉭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들이 루카스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푸스스…….
얼마나 지났을까. 그의 입이 멈추자 상자에서 희뿌연 김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작은 빛과 함께 외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됐군.”
마나가 넘치니 이젠 고대어로 주문을 외우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되돌아온 힘을 마주한 듯 루카스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어느새 상자였던 것은 평범한 주머니로 바뀌어 있었다.
루카스가 주머니의 입구를 열고 손을 집어넣자, 작은 주머니 속으로 그의 손이 쑤욱 빨려 들어갔다.
“호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은 그가 감탄을 내뱉었다.
‘어서 확인해 봐야겠어.’
생각을 마친 그가 여관 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썅X이! 네 애비가 진 빚이 얼만데 지금 이깟 걸로 퉁 치자 그거야!?”
하지만 어디선가 들뜬 마음을 차게 식게 하는 고성이 들려왔다.
“제발, 제발 부탁드려요. 지금 가진 것이 이것뿐이에요. 일주일만, 아니, 삼 일만 시간을 주신다면… 꺄악!”
험악하게 생긴 사내는, 길 한복판에서 이십 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의 뺨을 거칠게 내리쳤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여자는 사내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애걸하고 있었다.
“제발… 삼 일만 말미를 주신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삼 일이 바로 오늘이다 이 개같은 X아! 그러니 네 애비놈을 찾아오든 했어야지!”
“악!”
사내가 거친 발길질로 여자를 떼어내자,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쯧쯔… 언제쯤 자식을 팔아 도박하는 작자가 사라지려는지…….’
그 모습을 본 루카스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리고 이깟 물건을 어디에다가 쓰라는 거야! 버러지 같은 년!”
-타악!
손에 든 물건을 여자에게 집어 던진 남자가 끊임없이 욕지거릴 내뱉었다.
“흑… 끄흑…….”
“원망하려거든 네 애비를 원망해라. 끌고 가!”
그의 말에 곁에 선 다른 사내들이 여자를 거칠게 잡아 세웠다.
“꺄악!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발악을 하는 여자의 눈이 주변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여자를 도우려 나서지 않았다. 그저 안타깝다는 듯 연민의 눈길을 보낼 뿐.
“제발… 제발!”
“그만.”
끌려가지 않으려 다리에 안간힘을 주는 여자의 앞에 내밀어진 낯선 손.
“여보쇼. 형씨가 누군지는 몰라도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쇼.”
“빚이 얼만가?”
사실 그냥 가려 했다. 어차피 인간들 사는 세상에서는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때문에 오랜 경험에 따라 그저 지나치려 했는데…….
‘오늘은 운이 아주 좋군.’
여자가 가진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하! 아주 백마 탄 왕자 납셨네. 250골드요!”
루카스의 물음에 사내는 비아냥거리며 금액을 이야기했다. 마치 그럴 돈이 있으면 어디 한번 내놓아 보라는 듯.
“내가 주지.”
하지만 루카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얼마 가지 않아 후회했다.
“……뭐요?”
뜻밖에 대답에 놀란 사내가 다시 한번 되물었다.
“그 빚 내가 대신 갚겠다 했네. 그러니 그 손 그만 놓지.”
놀란 것은 아직 다리에 힘도 풀지 않은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 허! 참. 당신이 뭔데 이 계집 애비의 돈을 갚겠다는 거요? 아니, 아니지. 우리야 돈을 받으면 좋으니. 그럼 줘보쇼.”
사내의 말에 루카스가 주머니를 열어 100골드짜리 금화 세 개를 내밀었다.
“받게.”
사내의 눈이 주머니 속에 가득 든 금화로 한번 향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 500골드는 줘야겠소. 이 계집년과 애비 때문에 우리가 한 고생이 얼만데! 게다가 날짜가 지났으니 이자도 더 받아야겠고.”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원금은 50골드잖아요!”
여자가 버럭 소리쳤다.
“닥쳐! 이런 버러지 같은 년이 어디 말을 끼어들어!? 엉?!”
사내가 손을 들어 때릴 것처럼 위협하자,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500골드. 그게 아니라면 이 계집년은 우리가 잘 데려가 나으리들의 예쁨을 듬뿍 받게 해주지. 이 정도 얼굴이면 못 해도 하루 스무 명은 거뜬하겠어!”
사내는 루카스가 철없는 어느 귀족 나으리가 가여운 여자에게 반하기라도 했다고 생각했는지, 거들먹거리며 흥정에 나섰다.
“어이가 없군. 원금은 50골드인데 그 열 배인 500골드를 받아 가겠다니.”
루카스가 손에 들었던 금화들 중 하나를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200골드. 이것도 네 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받지 않겠다면 네 뜻대로 여자를 데리고 꺼져라.”
하지만 루카스는 그들의 착각이 크게 틀렸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강수를 뒀다.
“하, 200골드? 지금 장난하나. 야! 끌고 가!”
질 수 없다는 듯 제 수하들에게 외치는 사내.
“그렇다면 뭐.”
그런 사내의 반응에 루카스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여자를 바라봤다.
도울 수 없겠다는 듯.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체념하듯 사내들의 손에 순순히 몸을 맡겼고, 루카스 역시 걸음을 돌렸다.
“자, 잠깐!”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사내의 외침에 루카스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뭐지?”
“250골드! 250골드에 이 계집을 내어주지.”
하지만 사내의 외침에도 루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50골드는 평민 가족의 한 달 치 생활비에 맞먹는 금액이다. 그 네 배를 주겠다는데도 거절하지 않았나? 150골드.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루카스의 말에 사내는 고민하는 듯 작은 신음을 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쳇… 하는 수 없지. 알겠다.”
사내의 태도에 루카스는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꼈지만,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야 이년아. 오늘 운 튼 줄 알아! 꺼져!”
여자의 손을 거칠게 잡아 던진 사내가 바닥에 침을 탁 뱉어냈다.
“가, 감사합니다… 이 돈은 어떻게 해서든…….”
“됐다. 그리고 살고 싶다면 네 아비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다.”
“하, 하지만…….”
“대신 이건 내가 가져가지.”
루카스가 땅에 떨어져 있던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목걸이의 모양은 평범하다 못해 형편없었다.
가죽 줄에 나무로 된 구슬이 엉성하게 꿰어져 있는 목걸이의 가운데 있는 펜던트 역시 나무였다.
그러니 사내들은 이 목걸이를 보고 아무런 기능도 없는 평범한 목걸이라 치부해 내던진 것이고.
‘엘프들의 물건이군.’
하지만 이 목걸이는 아까 골동품 상점에서 보았던 자연친화력을 올려준다는 그 목걸이보다 몇 배는 나은 물건이었다.
“저, 저기……!”
볼일이 끝났다는 듯 걸음을 옮기던 루카스가 멈춰 섰다.
“뭐지?”
“정말 염치없는 부탁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 목걸이는 제 할머니가 남겨주신 유품입니다. 그러니 제가 돈을 벌면 갚을 수 있게 귀인의 성함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호오…….”
여자의 말에 루카스는 놀란 듯 짧은 감탄을 내뱉었다.
자신을 구해준 귀인에게 하찮아 보이는 목걸이를 내어 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이니 주지 못하겠다는 것 아닌가.
“정말입니다. 아까 목걸이를 저자들에게 주려 했던 것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구해 갚을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역시 같은 마음입니다. 나으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는 꼼짝없이 끌려갔을 테지만 제게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제 할 말을 또박또박하는 여자를 유심히 지켜보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의 후손이군.’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귀.
몇 대를 걸쳐 내려온 탓인지 여자의 귀는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끝이 뾰족하게 솟아있었다.
“정령사인가.”
“재주는 미약하지만 맞습니다. 불의 하급 정령인 토카의 계약자입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물건이 맞겠군.”
목걸이를 다시 건네주자, 여자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빚은 꼭 받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믿으셔도 좋습니다. 나으리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시타타에 있는 로드리고 백작가로 오면 된다.”
“시타타라 하면… 아란트 제국 말씀이신가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빚을 갚으러 찾아가겠습니다. 제 이름은 케이틀린입니다. 케이틀린 맥레인.”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실은 넬라에게 전해주려 했던 물건이었지만, 넬라는 이미 엘프에 맞먹을 만큼 자연친화력이 높은 아이었다.
그저 무엇이든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뿐, 넬라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게다가 여자의 당돌한 태도에 흥미가 일기도 했고 말이다.
‘엘프의 후손이니 한번 믿어보지.’
***
어느 으슥한 상점가. 그곳에 모인 사내들은 낄낄거리며 손에 쥔 금화를 연신 들어 보였다.
“크하하! 못 받을 줄로만 알았더니 이게 웬 횡재냐!”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니 요즘 같은 세상에도 저런 반푼이 같은 도련님이 있다니.”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안 그래?”
사내들은 빚을 대신 갚아준 루카스를 모자란 도련님쯤으로 취급하며 비웃었다.
“아, 그보다 형님. 그 자식 주머니 봤습니까? 아주 금화가 수두룩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저도 봤는데 10골드짜리는 물론이고 그 아래에 100골드짜리 금화도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제 부하들의 말에 사내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네놈들은 아직도 나를 그렇게 모르냐? 그러니 너희가 아직 나를 따라 수금이나 다니는 거다. 내가 왜 그 자식이 돈을 낮춰 부르는데 그냥 받았겠냐. 엉?”
“예?”
“짜식. 이미 다 방법을 생각해 뒀다 그거야. 너희도 알지? 내가 검은 손에 몸담고 있는 ‘그 형님’과 친한 사이인 거.”
“서, 설마?”
부하의 물음에 사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금화 하나에 입김을 불어 옷자락에 비벼 닦았다.
“그래. 그 형님께 지난번에 진 빚도 있고 하니… 그 형님께 정보를 좀 드려야겠다. 그리고 그 계집네 애비는 어차피 도박 환자 중에 환자니 언제든 또 돌아와 빚을 지겠지.”
“역시……. 형님의 머리는 따라올 자가 없다니까요!”
제 부하의 감탄에 사내는 혀를 쯧 차며 말을 이었다.
“쯧! 그러니까 너희도 모가지 위에 달린 걸로 생각이라는 걸 좀 하라는 말이야! 주둥이로 술만 퍼먹을 생각 말고!”
“헤헤… 알겠습니다.”
“그 계집의 애비가 다시 한번 빚을 지거든, 그때는 돈이 아니라 그 계집을 받아내면 된다.”
“그럼 우리는 꿩 먹고 알 먹고 아닙니까! 아주 좋습니다!”
“크하하!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