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뜻밖의 횡재.
노루 무역의 비밀 장부. 그곳에 적혀있던 수많은 가문과 그 옆에 기재된 지역들. 그것들 중 의아했던 지역 하나가 있었다.
최북단에 위치한 베네타. 어째서 그곳이 개입되어 있었을까.
그곳엔 다른 지역과 달리 노예로 팔아넘길 만큼 희소한 종족도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이송 자체가 힘든 지역이었다.
그나마 물건이라면 사정이 조금 낫겠지만, 변변찮은 운송 수단 하나 없는 베네타에서 살아있는 생물을 이송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저들이 그 장부에 적혀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겨울 여우족…….’
그때엔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생각지도 못했다.
인간이 아무리 잔인하다 한들, 겨울을 지키는 수호자라 불리는 여우족에까지 손댔을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베네타라는 곳에서 노루 무역과 엮일만한 일 자체가 없었다.
베네타의 수입원은 척박한 땅을 딛고 성장한 강한 용병 수출과 몬스터의 털가죽 등이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자급자족이었다.
게다가 외지인을 철저히 배척하는 곳인지라, 새로운 상단이나 상인들이 들어가 자리를 잡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항구가 녹았을 때에만 왕래가 있는 상단이 몇 차례 왕복하며, 다른 대륙의 물건과 물물교환 형식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뒤에서 더러운 짓을 일삼았던 노루 무역과 접점이 있다는 것은, 용병 따위를 수출하는 일이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가 봐야겠군.’
며칠만 자리를 비우려 했지만, 그 계획은 진즉에 틀어진 듯싶었다.
‘아만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
아침이 밝자 사내 셋은 떠날 채비를 마친 뒤 시비에 백작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가주님께 백작님의 뜻을 꼭 전하겠습니다.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좋겠군요.”
“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내들이 돌아서자, 시비에가 얼른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이것 받으십시오.”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시비에가 건넨 주머니는 누가 보아도 금화가 가득 든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갈 길이 멀지 않습니까. 그저 제 작은 성의입니다.”
“이것 참…….”
사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를 받아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꼭 돌아가서 제 뜻을 전해주십시오. 저 역시도 그들이 보고 싶습니다.”
사내의 손을 꼬옥 맞잡은 시비에가 부드럽게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백작님께 입었던 은혜는 누구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잊지 않겠습니다.”
사내가 떠나자 시비에는 그들이 탄 마차가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
루카스 역시 그들을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은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자세한 건 따라가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평소와 같이 아만을 찾아갈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자신의 손으로 끝을 보고 싶었다.
아만과의 계약으로 마나는 무한에 가까웠으니 전생만큼은 아닐지라도 어지간한 대마법사의 실력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마법사에게 서클이란 자고로 마나의 양과 비례하는 수치였다. 그에 더해지는 마법에 대한 이해와 숙련도가 마법사의 실력을 좌우했다.
그러니 루카스는 지금 굉장히 자신에 차 있었으며, 내심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이 몸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한번 보고 싶기도 하고.’
여태 인간의 몸에 묶여 늘어나지 않는 서클에 매여 하루하루를 답답함 속에 살지 않았는가.
그런데 마나의 양이 무한에 가깝게 늘어났으니 한번 테스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마차는 말을 달려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라스칸 왕국 쪽으로 가는 것인가.’
마차의 이동 방향을 보니 그들은 국경을 넘어 라스칸 왕국으로 들어가려는 듯 보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라스칸 왕국의 국경을 넘은 그들의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리타로군.’
표식을 남겨두고 간간이 텔레포트를 써 추적을 하던 루카스 역시, 그들의 마차를 따라 국경에 인접한 도시 리타에 진입했다.
마차가 들어선 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호화로워 보이는 여관이었다.
-리타 중심 여관-
큰 항구와 아란트 제국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 리타는, 바마라스가 무역의 요충지로 거듭나기 전부터 꽤나 큰 규모의 도시였다.
“하하. 얼마 만에 이런 곳에서 자보는지 모르겠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시비에 그자가 생활이 피긴 폈나 봅니다. 이렇게나 두둑한 주머니를 주다니요!”
마차에서 내린 사내들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자, 어서 들어갑시다! 세라노 님도 얼른 들어오세요.”
“…제 이름 좀 그렇게 크게 부르지 마시라니까요!”
세라노라는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후드를 푹 눌러썼다.
“아, 죄송합니다. 잠시 잊었네요.”
세라노라는 사내는 제국을 비롯한 곳곳에 수배 전단이 붙은 마법사였다. 죄명은 살인.
마법으로 수많은 자를 살인한 중범죄자라며 수배지가 붙었지만, 마음먹고 숨은 자를 찾기도 어려운 데다가 마법사이기까지 한 그를 잡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지, 그는 아직도 잘 도망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여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루카스 역시 한적한 곳에 가서 투명화 마법을 풀고 그들을 뒤따랐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자, 다른 여관과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중심 여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눈으로 사내들의 움직임을 쫓던 루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묵고 싶습니다.”
저들이 이곳에서 묵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루카스 역시 이곳에서 하루 묵을 생각이었다.
“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종업원을 따라 프런트로 가자, 방 타입과 숙박료가 적힌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네. 기본 타입으로 하루 숙박 맞으신지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종업원은 방 열쇠를 건넸다.
“객실은 2층 왼쪽 가장 안쪽 방입니다. 숙박비는 하루 8골드입니다.”
“여깄습니다.”
요금을 지불한 루카스가 일 층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사내들 역시 요금을 지불하고 객실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터라, 여기서 잠시 그들을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기본으로 내어지는 차를 홀짝이고 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은 그럼 마시고 죽읍시다!”
“크하하! 그럽시다. 이게 얼마 만에 마음 놓고 마시는 술입니까. 그래!”
객실에서 내려온 그들이 루카스 뒤에 앉아 술과 안주를 주문했다.
“아니, 그래서 내가 저번에 어디까지 얘기했었더라? 예, 맞아요. 제가 모라인 들렀을 때 말입니다.”
사내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루카스 역시 귀를 기울였다.
“크하하! 그래 가지고 그 판에서 내가 얼마를 먹었는지 아쇼?”
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어느 하나 쓸모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도박판에서 얼마를 땄는지, 또 얼마를 잃었는지, 옛날에 얼마나 대단한 삶을 살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인생사가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일어나야겠군.’
한참을 앉아 이야기를 듣던 루카스가 피로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곳도 오랜만이니 한번 둘러볼까.’
어차피 저들에게 추적마법은 걸어놨으니, 그들이 움직인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루카스는 오래전 기억을 더듬어 리타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
여관을 빠져나온 루카스는 예전에 들른 적 있던 골동품 상점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아직 있으려나.’
마지막으로 리타 마을에 왔던 것도 어언 오십 년 넘게 흘렀기에, 예전에 갔었던 상점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아직 있군.’
하지만 그 상점은 낡은 간판을 삐걱거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루카스는 전생에도 인간들의 골동품 상점을 찾는 것을 즐겼었다.
왜냐하면 가끔가다 숨겨진 보석 같은 아티팩트들이 제 가치를 몰라본 인간의 손에 들어가 헐값에 팔리고 있었기 때문.
-딸랑!
상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흐음.”
루카스는 이 퀴퀴한 냄새를 제법 좋아했다. 오래된 물건이 풍기는 이 오래된 냄새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안정감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이제 막 중년쯤 되어 보이는 상점 주인이 루카스를 맞았다.
“예. 구경 좀 하러 왔습니다.”
젊고 멀끔한 루카스의 모습에 상점 주인은 안경을 한번 고쳐 쓰며 눈을 빛냈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습니까?”
“주인장께서 자랑할만한 물건을 한번 내와 보시지요.”
상점을 스윽 둘러보며 말하던 루카스의 눈이 한곳에 멈춰 섰다.
낡은 찬장 사이에 고개를 빼꼼 내민 그것은, 왠지 루카스가 아는 물건인 듯 친숙한 모습이었다.
“허허, 자랑할 만한 물건은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 위에 있는 물건을 한번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루카스의 손이 높은 찬장에 닿자 상점 주인은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반문했다.
“손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맨 위에서 바로 아래 칸에 있는 저거 맞습니까?”
왜냐하면 루카스가 가리킨 곳에 있는 물건은, 아무런 문양도 화려한 보석도 장식된 게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작은 나무상자였기 때문.
“예.”
“흠. 알겠습니다.”
알 수 없다는 듯 주인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뿌연 먼지를 헤치고 상자를 꺼내어 왔다.
“흠…….”
상자를 받아 든 루카스가 상자에 달린 작은 걸쇠를 젖히자 상자는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실은 모릅니다. 일전에 오래된 집을 통째로 사서 그 안에 있는 고가구며 골동품을 처분한 일이 있었는데, 저도 그곳에 고이 모셔져 있기에 가져와 봤습니다만, 아무런 기능을 발견하지 못해 처박아두고 잊고 있던 물건입니다.”
루카스의 물음에 상점 주인은 너무나도 솔직히 답변을 내놓았다.
“그렇습니까.”
“예. 뭐… 허허.”
상점 주인이 멋쩍은 듯 웃자, 루카스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횡재했군.’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보고자 온 것인데 이런 횡재를 하다니!
“뭐, 그럼 다른 물건을 사면 끼워주십쇼. 제가 이런 작은 상자를 좋아해서 말입니다.”
“아유.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잊고 있던 물건인데요.”
별 관심 없는 듯 상자를 테이블 위에 툭 내려둔 루카스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위를 다시 한번 꼼꼼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박에 너무 좋은 것을 찾은 탓일까, 여기저기를 열심히 뜯어봐도 이보다 좋은 물건은 찾기가 어려웠다.
“정령사에게 도움이 될만한 물건도 있습니까?”
결국 루카스는 가장 눈에 밟히는 아이 중 하나인 넬라에게 줄 물건을 하나 사기로 했다.
“오, 물론입니다.”
루카스의 물음에 주인이 화색을 띠며 얼른 방 안쪽 어딘가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장은 손에 나뭇잎 모양을 한 펜던트 하나를 들고나왔다.
“이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무려 삼백 년 전에 엘프 족장과 드워프가 합심해 만든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대륙 어느 정령사나 탐을 낼 만한 물건입니다. 무려 자연친화력을 높여주는 물건이니 말입니다.”
주인장의 말을 들은 루카스가 팬던트를 유심히 살폈다.
“얼맙니까?”
“저렴한 가격 300골드에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삼백 년 전 엘프는 무슨. 눈앞에 있는 팬던트는 그저 예쁘게 잘 세공된 나뭇잎 모양 펜던트일 뿐이었다.
가격을 들은 루카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흠…… 상자를 얻었으니 그냥 속아줘?’
루카스의 표정을 본 주인장이 얼른 펜던트에 광을 내며 다시 내보였다.
“보십시오. 이 영롱한 자태! 제가 이 물건을 어디서 얻었느냐 하면…….”
“됐습니다. 이건 얼맙니까?”
아무래도 그냥 나뭇잎 모양 팬던트를 300골드나 주고 살 수는 없는 일이었는지, 루카스가 바로 앞에 진열된 녹이 난 열쇠를 가리켰다.
“오오…… 역시 안목이 있으십니다. 이 물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예. 값이 얼마입니까.”
“50골드입니다.”
가격을 들은 루카스의 미간이 잠시 찌푸려졌다.
‘아주 눈탱이를 보는군.’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값을 치렀다.
“감사합니다! 여기 상자랑 함께 챙기시지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인 주인장이 친절히 상자와 함께 물건을 건넸다.
‘횡재했군.’
열쇠와 함께 상자를 받아 든 루카스가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