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상상도 못 한 정체 ㄴㅇㄱ (3)
몇 번을 다시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금발에 금안 그와 어울리지 않는 시커먼 수염 자국.
어깨만을 감싸고 내려오는 기다란 핑크빛 옷자락은 그의 우람한 근육을 가리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저건 또 뭐야.’
게다가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의 끝엔 핑크색 하트가 달려있었고, 그의 커다란 손에는 너무나도 작아 보였다.
[안녕! 어쩜 너~ 무 반가워서 나 막 웃음이 나쟈나아~ 홍! 홍! 홍!]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모습이었다. 행여나 꿈에 나올까 두려운 그런 모습에 루카스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어머, 어머! 내 정신 좀 봐!]
돌연 그가 박수를 치더니 제 머리를 콩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엣큥-!☆]
‘저, 저런... 망측한...!’
[내 소개도 안 한 거야? 어머나 세상에에~! 홍! 홍! 홍!]
혼자서 묻고 대답하며 리액션까지 척척 해 보인 그가, 손에 들린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자, 흠칫 놀란 루카스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뭐, 뭐야?’
[내 이름은 아모~! 레!]
“…….”
요란한 소개와 함께 지팡이에서 터져 나오는 요란한 음악.
지팡이가 흔들릴 때마다 흩어지는 핑크빛 빛무리.
-띠로로로~ 띠롱! 뾰뵹!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현란한 움직임으로 지팡이를 요리조리 돌리는 그의 모습에 루카스는 정신이 혼미했다.
[바로~!]
-뾰로로로롱!
그가 한 바퀴 휘릭 돌자 그의 금발 머리 역시 그를 따라 유려하게(?) 움직였다.
현란한 움직임이 멈추고, 엉덩이를 뒤로 주욱 뺀 그가 루카스와 시선을 바로 맞췄다.
[사랑…….]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뱉은 ‘사랑’이라는 단어. 그에 더해진 낮고 느끼한 목소리까지.
때문에 루카스는 토할 것만 같았다.
[네게 내 사랑을 주게 되어 정말… 영광… 영광이야…….]
목을 긁는 듯한 두꺼운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루카스는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려 연거푸 침을 삼켰다.
‘이건… 도대체… 무슨…….’
그런 흉측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자신을 아모레라 소개한 기괴한 사내가 한 발짝 다가왔다.
[나는 사랑의 신 아모레. 네 손목에 채워진 팔찌는 내 사랑의 힘이 깃든 아티팩트라구.]
‘사랑의 신? 이게 진짜 그 아모레라고?’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진 사랑의 신 아모레가 이런 망측한 모습이라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때 불현듯 타라스가 남긴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사랑을 내세운 미친놈이 있으니 그놈을 조심하라’ 했던가.
[어머나, 말을 못 하네? 하긴~ 내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긴 하지~ 홍! 홍! 홍!]
이쯤 되니 확실했다. 타라스가 말했던 그 사랑을 내세운 미친놈은 이놈이 분명하다.
“미친놈인가?”
그때 루카스의 입에서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가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자 아모레의 표정이 순간 굳어지더니, 이내 입꼬리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꺄~ 하! 하! 하! 그래, 그래~ 나 미친놈이양. 사랑에 미. 친. 놈!]
루카스는 굳어진 아모레의 표정에 잠시 당황했던 자신이 짜증 났다.
“이건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
미간을 좁힌 루카스가 제 팔목을 척 내밀었다.
[어머, 미안해서 어떡해~ 지금 내 모습이 현신은 아니라서 그건 쪼오끔 어렵겠는데에~]
그 말을 들은 루카스의 입에서 ‘아’ 하는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당당한 아모레의 태도에 ‘그렇구나’ 하며 수긍을 하는 마음 반과 ‘그래서 지금 내 상태가 괜찮았구나’하는 마음 반이 담긴 탄식이었다.
‘아, 이게 아니지.’
얼른 정신을 차린 루카스가 눈앞에 있는 아모레를 바라봤다.
[자, 그럼 사용법을 알려줄게.]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진짜였다. 루카스는 제 손목에 채워진 이 블링블링하고 반짝거리는 요상한 물건 따위가 무슨 능력을 가졌든 간에 필요 없었다.
‘이런 망측한 물건을 손목에 두르고 다닐 수는 없다.’
[홍! 홍! 홍! 우선 들어나 보래도~]
루카스를 만류하는 그의 손이 잔망스레 펄럭였다.
“필요 없다고.”
[자, 이건 말이야~ 내 사랑이 담긴 역작이라 그거야~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알지?]
그러거나 말거나 아모레는 팔찌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위대한 아모레의 산물! 이름하여 사랑의 방패!]
“…….”
[나약한 인간의 몸에 지치셨다구요~? 막을 수 없는 공격에 바스라질까 무서우시다구요~?]
마치 시장 한복판에서 약을 파는 약장수처럼 목소리를 높이는 아모레.
[그럴 땐 사랑의 방패! 사랑의 방패를 기억하세요!]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를 휙휙 휘두르자 팔찌에서 빛이 반짝였다.
[주문은 간단합니다! 팔찌를 만질 필요도! 팔을 휘두를 필요도 없어요!]
“…….”
[사랑의 힘으로 뾰롱뾰롱! 이 간단한 주문만을 외친다면 당신은 아주 강력한 방패를 얻게 될 겁니다!]
루카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팔에 채워진 팔찌를 떼어내려 우악스레 손을 놀렸다.
‘떨어져 제발 내 팔에서 떨어져!!!’
[자, 한번 따라해 보세요! 사랑의 힘으로~ 뾰롱뾰롱!]
하지만 팔찌는 팔에 착 달라붙어 도통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허!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팔찌는 위대한 사랑의 신 아모레의 역작! 그런 방법으로는 떼어낼 수 없어요!]
“젠장!!!”
[흐음~ 주문을 잘 따라 한다면 팔찌의 모습을 숨길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는데에~]
이 미친놈에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당하지 않을 방법 또한 지금은 없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터져나올 것 같은 욕지거리를 꾹 눌러 참은 채 아모레를 바라봤다.
[아주 쉬운 주문인데~ 사랑의 힘으로 뾰. 롱. 뾰. 롱!]
‘이런 씨X자식이……! 저런 개 같은 말을 나더러 지금 하라는 건가?’
루카스의 입꼬리가 분노로 씰룩였다.
[흐음~ 안 하면 어쩔 수 없고~ 그럼 나는~ 이만 가야겠다!]
싱긋 웃어 보인 아모레가 제 금발 머리를 뒤로 휘릭 넘겼다.
“당장 가져가든지, 그게 아니면 숨기기라도 해라.”
[네가 주문을 외우면~ 아모레가 생각을 해볼게~]
몸을 꼬며 제 금발머리를 빙빙 돌리는 아모레.
‘씨X자식이……!’
팔찌에 손을 슬쩍 가져가자, 드워프나 드래곤이 빚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느껴졌다.
신이 빚은 아티팩트. 성유물.
다른 이도 아닌 신이 빚은 만큼 그 힘은 엄청났다.
물론 가끔가다 엉뚱한 신이 대단한 힘이 깃든 것처럼 보이는 멍청한 물건을 만들어 지상에 내려보내기도 했지만, 그 엉뚱한 물건조차도 대단한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었다.
‘깨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
팔찌를 덮었던 손을 살짝 내린 루카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직~ 결정을 못 했나 봐~?]
“……젠장.”
[한마디면 되는데~]
이가 부득 갈렸다.
도대체 왜 순탄함만을 원했던 자신의 소소한 인생에 저런 짜증 나는 것들이 연달아 끼어드는 것인지 정말이지 화가 치밀었다.
“……그보다 먼저 하나 물어보지.”
[어머! 질문! 나 그거 너~무 좋아!]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건가? 나는 이런 아티팩트는 필요 없다. 달라고 한 적도 없고. 게다가 신이나 되는 작자가 어째서 내게 이러는지 알 수가 없군.”
참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제게 왜 이러는지 답을 듣지 못한다 해도 물어는 봐야 했다.
[흐음~ 그러게~]
하지만 심각한 루카스의 표정에도 아모레는 그저 눈을 활처럼 휘며 실실 웃을 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
[당신은 사랑을 믿나?]
“하아…….”
발끝에서부터 한숨이 올라왔다.
[그 깊은 한숨은… 분명 사랑을 겪어본 적 있는 한숨이군…….]
돌연 진지해진 아모레가 미간을 좁히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 사랑… 많이 아팠는가?]
“…….”
[이 세상 모든 생명체는 사랑을 한다네. 알고 있는가?]
한계였다. 저런 개 같은 소리를 들어주는 것도, 어쭙잖게 분위기를 잡는 꼬라지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다.
‘팔찌는 어떻게든 해봐야겠군.’
결국 루카스가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는 때였다.
[잠깐! 지금 가면 분명 후회할 텐데? 그 팔찌를 통해서 나는 언제든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거든!]
“이런 씨X 자식이. 아무 말 없이 고개나 까딱이고 있으니까 사람 좋아 보이든? 엉!?”
결국 인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호오~ 역시 듣던 대로…엑!]
-쾅! 콰쾅! 쾅!!!
“좋아 보이더냐고! 이런 변태 같은 새X가! 신이면 신답게 신계에 처박혀 사랑인지 X인지 관리나 잘할 것이지!”
-콰쾅! 콰콰쾅!
폭발했던 인내심이 마력으로 바뀌어 터져나가자, 아모레가 있던 자리에 뿌연 흙먼지가 일어났다.
[어맛! 과격해라…! 이런 모습을 보니 내 심장이…….]
물론 그에게 타격은 없었다.
[미친 듯이 뛰어……!]
그리고 그는… 또라이였다.
그것도 여태 어디서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그런 상또라이.
“이런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은 씨X자식아. 내가 지금 하찮은 인간이라고 이러는가 본데, 이거 골라도 한참 잘 못 골랐어. 이런 @#$&@$!&[email protected]$^”
차마 글로 쓸 수도 없는 험한 육두문자가 루카스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고, 그걸 듣는 아모레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호오…….]
하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중 그 어느 것에도 짜증이나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모레의 얼굴에는 그저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리고 감탄뿐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런 씨X자식. 이 팔찌는 내가 팔을 잘라내서라도 없애고 만다!!!”
어떤 욕을 하더라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 아모레를 향해 악에 받친 듯 소리치는 루카스.
[과격해…! 너무 멋져!]
하지만 루카스의 그런 반응에도 아모레는 그저 입을 틀어막으며 감탄을 내뱉을 뿐이었다.
“…….”
결국 루카스는 질린다는 듯 몸을 돌려 텔레포트를 시전했다.
-피웅…….
“씨X…….”
하지만 텔레포트는 아모레의 수작에 막혀 그대로 캔슬되고 말았다.
[흠 뭐, 전부 이해할 수 있어. 너도 혼란스럽겠지. 갑자기 너한테 나타나서 왜 이러는지 보아하니 타라스 자식이 먼저 선수 친 것 같은데. 맞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 네놈들의 장난에 어째서 내가 놀아나야 하지? 나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다. 너희 잘난 신들의 생각이 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다. 나는 그저 이렇게 살다 죽고 싶을 뿐이다.”
[홍! 홍! 홍! 평범한 인간~ 그래 네가 원하는 건 그거겠지. 미안하지만 그건 조금 어렵겠어.]
루카스는 이제 빌고라도 싶은 마음이었다. 도저히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이 미치광이와 더는 대화 그 비슷한 것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하……. 이 팔찌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쩔 수 없네~ 팔찌의 존재는 숨겨줄게. 하지만 그 팔찌를 없애는 건 내가 동의 못 해. 팔을 잘라 없앤다면 그다음엔 목에 걸어주겠어. 나의 귀여운 바둑이가 되고 싶은 건 아니게찌용?]
귀여운 바둑이라니. 그 부분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
[그리고 지금 네 몸 상태. 너무 괜찮지 않아?]
어찌나 정신이 없었는지 잊고 있었다. 분명 루카스는 이곳으로 텔레포트한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었다.
그런데 지금 상태는 너무나도 말끔했다.
[맞지~?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그건 정~말 내 역작이거든!]
치유 능력에 방어까지 갖춘 아티팩트라고? 저 또라이의 말대로 정말 가지고 있어 나쁠 건 없었다. 아니, 사실 엄청났다.
“…….”
[그 시커먼 타라스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상에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걸 알아두라구~]
-뾰롱!
아모레가 지팡이를 한번 휘두르자 팔찌는 모습을 감췄다.
“……이건 또 뭐야?”
하지만 팔찌가 있던 곳엔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붉은 반점이 생겨났다. 그것도 작은 하트모양의 붉은 반점이.
[내 마음. 그것마저 못 하게 하진 않겠지~? 그럼 아모레 서운해~]
포기다. 두손 두발 다 들었다.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루카스가 손을 휘휘 젓자, 아모레는 만족스럽다는 듯 어깨를 한껏 올려 방긋 웃었다.
‘제발 꺼져라.’
[오늘은 이만 가야겠네. 아쉬워라… 아! 꼭 기억해~ 사랑의 힘으로~ 뾰. 롱. 뾰. 롱!]
그 말을 끝으로 아모레의 모습이 천천히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