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아카데미 축제 (3)
축제 첫날이 되자, 학생들은 자신이 참가하는 대회장 앞에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후우…….”
심호흡을 하는 학생들부터.
“셀레나 수식… 셀레나 수식은 첫 암호와 끝 암호가…….”
자신이 외웠던 것을 복기하는 학생들까지.
암호 해독 분야에 참가한 루카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회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반만년을 산 드래곤에게, 인간이 푸는 수식을 풀지 못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작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기는 했다.
‘흠… 인간들 수식은 오랜만인데…….’
어지간한 인간들의 암호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에겐 이미 입력해 둔 마법 수식으로 풀어낼 수 있을 만큼 간단했지만, 지금의 루카스에겐 그런 꼼수가 없었다.
마치 오랜 세월 계산기를 써 곱셈과 나눗셈을 하던 사람에게 암산으로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아냐, 그래도 인간들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회장 문이 열렸다.
“암호 해독 분야에 참가하신 학생들은 들어오세요!”
대회 진행을 돕는 사람이 학생들을 안으로 이끌었다.
“오오…….”
대회장에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다름아닌 거대 큐브였다.
“저게 1단계 문제라고……?”
큐브에 빼곡이 적힌 암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수준이었다.
“자 다들 자신의 번호가 적힌 책상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대회 시작 전 학생들은 저마다 번호가 적힌 명패를 하나씩 나눠 받았다.
루카스가 받은 명패엔 [18. 루카스 로드리고]라고 적혀있었다.
번호에 적힌 책상으로 가서 앉은 루카스의 눈은, 행사 진행자가 아닌 큐브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 큐브… 아는 큐븐데…….’
큐브. 그것의 시초는 먼 고대로부터 시작되었다.
신의 사도인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와 성유물을 봉인했을 때부터 시작된 큐브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봉인과 암호의 시초라고 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드래곤이 사용하기도 했고, 또 시간이 더 흐른 지금엔 인간들이 소중한 무언가를 봉인하거나 자신들이 감당하기 힘든 무언가를 가두는 데 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시험장에 놓인 저 큐브는 루카스가 분명 아는 큐브였다.
‘뭐였더라…….’
한참을 머리를 싸매고 눈앞에 놓인 큐브에 대해 생각하던 때였다.
“자! 집중해 주세요! 첫 번째 문제입니다!”
진행자가 가리킨 곳은 큐브가 아닌 칠판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큐브는 최종 시험문제입니다! 그러니 지금 여러분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는 바로…….”
천으로 가려진 칠판 옆에 난 줄을 잡아당기는 진행자.
-촤락!
천이 내려가자 칠판에 빼곡하게 적힌 수식들이 드러났다.
“셀레나 기초 수식입니다!”
셀레나 기초수식.
희대의 수학자이자 암호 해독가인 셀레나가 정의한 수식 중 가장 기초가 되는 풀이였다.
“야호!”
문제가 출제되자 누군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아까 문 앞에서 셀레나 수식을 복기하던 학생이었다.
“시간은 총 90분! 건투를 빕니다!”
맨 앞줄에서부터 정답을 적을 종이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학생들은 재빠르게 칠판에 있는 문제를 옮겨적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그의 말과 함께 칠판 앞에 놓인 대형 모래시계가 스르륵 돌아갔다.
-달칵
그때, 시험장 문이 열리고 잿빛 로브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아, 대신관님!”
“허허, 조금 늦었나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들어온 사내는 다름 아닌 대신관이었다.
‘대신관이 참관인이라…….’
모든 대회 일정엔 참관인이 한 사람씩 존재했다. 부정행위를 방지하고 후원을 한 사람들에게 베푸는 일종의 호의였다.
물론 후원을 한 사람과 연관이 있는 사람이 참가하는 시험장은 참관할 수 없다.
대신관이 자리에 앉자 그곳에 쏠렸던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 시험지로 향했다.
-사각사각
조용한 시험장에는 이제 종이와 펜이 마찰하는 소리뿐이었다.
‘흠… 셀레나 기초 수식이라…….’
칠판에 적힌 문제를 가만히 응시하던 루카스가 펜을 집어 들었다.
‘첫 번째 수식과 마지막 수식을 뺀 나머지를 먼저 계산하던가…….’
차분히 문제를 옮겨 적은 루카스가 책상 아래로 수식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어제 해둘 걸 그랬군.’
같은 수식이 반복되는 셀레나 수식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헷갈리기 쉬운 계산법이었다.
그렇기에 루카스는 작은 꼼수를 쓰기로 했다.
반복되는 수식을 빠르게 계산하기 위한 간단한(?) 꼼수.
‘이 정도면 됐나…….’
책상 아래서 꼼지락거리기를 수 분. 드디어 손을 꺼내 든 루카스가 펜을 집어 들었다.
‘녹슬지 않았군.’
그러자 펜을 잡은 손이 종이 위를 날아다니듯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사각
‘이제 앞에 있는 수식과 뒤에 있는 수식을 두 번 곱하고… 세 번 나누면…….’
-사각사각 탁!
순식간에 정답을 적은 루카스가 책상 위에 펜을 탁 내려뒀다.
그러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문제를 푼 사람은 없는지 모두들 고개를 푹 처박고 계산에 몰두 중이었다.
그렇게 시선을 한 바퀴 죽 돌리던 때였다.
‘저 자식은 지금 나를 보는 건가?’
대신관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을 느낀 루카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겠지.’
다시 시선을 내려 시험지에 두고.
‘아니… 겠지가 아니네?’
다시 앞을 봐도 대신관의 시선은 분명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봤나?’
혹시 책상 아래로 수식을 입력하던 것을 본 건가?
‘부정행위였나? 아니, 아니지… 어디에도 마법을 쓰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원래 암호 해독은 마법이 기초였다. 아무리 문제를 잘 풀어낸다 해도 암호는 마법으로 거는 것이니, 마나가 없으면 절대 풀어낼 수 없다.
그러니 방금 자신이 쓴 꼼수는 부정행위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미 수식이 입력된 마도구를 들고 시험을 보는 것은 명백한 부정행위지만.
‘왜 자꾸 쳐다봐?’
아무리 시선을 피하고 시험지를 내려다봐도 대신관의 눈은 계속해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드르륵
결국 참다못한 루카스가 시험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너무 일찍 일어났나.’
모래시계를 보니 시간은 불과 20분 남짓 흘러있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루카스는 그대로 걸어 시험지를 제출했다.
“오, 이렇게나 빨리! 루카스 로드리고 군. 시험지 제출받았습니다. 나가셔도 좋습니다.”
“네.”
제출 확인을 받은 루카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재수 없는 새끼.”
시험장을 빠져나온 루카스는 제 뒤로 닫힌 문을 한번 흘끗 바라본 다음 욕지거릴 내뱉었다.
줄기차게 따라붙던 그 짜증 나던 시선.
누가 마신의 종 아니랄까 시선마저도 거무튀튀한 느낌이었다.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몸을 떨어 보인 루카스가 걸음을 옮겼다.
“저쪽인가?”
루카스가 가려는 곳은 마법약 시험이 치러지는 시험장이었다.
넬라와 폴라 그리고 스키르까지 모두 마법약 대회에 참가했으니, 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
마법약 시험이 진행되는 시험장 안.
그곳은 곳곳에서 탄식과 탄성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저, 저기! 만드라고라 뿌리 좀 더 받을 수 있을까요?”
“모든 학생들은 주어진 재료 외에 추가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임하세요!”
“어쩌면 좋아…….”
마법약 대회의 첫 번째 문제는 해독제의 한 종류인 세릭타 해독용액이었다.
세릭타 해독용액은 하급 마수의 발톱이나 버섯 등에 중독이 되었을 때 쓸 수 있는 보편적인 용액이었으나, 그 제조법이 까다롭기로 악명높았다.
그렇기에 마법약 제조의 기초가 되기도 했으며, 그를 응용해 나온 해독제 역시 수없이 많았다.
“으앗!”
벌써 한 학생의 비커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32번 학생. 실격입니다.”
“어! 어어!!”
“29번 학생. 실격입니다.”
마법약은 다른 시험과는 달리 실패가 명확히 드러나기에, 실격되는 학생들 역시 속속 출몰했다.
“1.97 프리키 눈물…….”
그 속에서 넬라 역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계량에 힘쓰고 있었다.
“만드라고라 뿌리는 으깨서 넣고…….”
스키르와 폴라 역시 손을 바삐 움직였다.
-포옹!
“돼, 됐다!”
그때, 한쪽에서 경쾌한 방울 터지는 소리와 함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네. 2번 학생. 합격입니다.”
시험관이 다가가 결과물을 보고 합격 통지를 내리자, 팔짝팔짝 뛰며 기뻐하는 2번 참가자.
“자, 이제 절반 남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학생들의 눈이 일제히 모래시계로 향했다.
-퍼엉!
한쪽에서 들리는 폭발음에 깜짝 놀라는 학생들.
“17번 학생. 실격입니다.”
“아…….”
또 한 명의 학생이 실격되고. 이제 남은 학생들은 시작할 때보다 절반 남짓 줄어든 숫자였다.
“이, 이게… 뭐, 뭐였더라…….”
그때 넬라의 옆에 선 스키르의 눈동자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뭐, 뭐였지…….”
재료가 든 트레이에서 발견한 처음 보는 듯한 잎사귀 하나.
“베리타 잎사귀.”
그때 옆에서 넬라가 조용히 답을 알려주었다.
“아, 고맙다!”
그제야 생각난 듯 작게 탄식한 스키르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
-달그락달그락
폭풍과도 같은 탈락 행진이 지나자, 어느새 시험장 안에서는 돌절구와 비커 등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했다.
“20분 남았습니다!”
-쨍그랑!
남은 시간을 알리는 진행자의 말에 놀란 학생 하나가 손에 든 비커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이런.”
그걸 본 진행자가 빠르게 달려와 깨진 비커를 수습했다.
“비커는 앞에 있으니 가져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비어있는 비커였는지 학생은 재빨리 달려가 새로 하나를 들고 와 다시 시험에 몰두했다.
-포옹!
그때 들려오는 경쾌한 소리.
“5번 참가자. 합격입니다.”
-포옹!
“9번 참가자. 합격입니다.”
스키르의 옆에 있는 참가자 역시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스키르의 눈이 불안에 흔들렸다.
-포옹!
“7번 참가자. 합격입니다.”
이어 넬라까지 합격을 통보받자, 스키르는 손까지 떨고 있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는 스키르.
“먼저 나갈게… 오빠 힘내!”
넬라가 건넨 작은 응원 한마디에 어색하게 웃어 보인 스키르가 다시 시험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제 만드라고라 뿌리만 넣으면…….’
스키르가 잘 으깨어둔 만드라고라 뿌리를 비커에 넣자, 용액의 색이 푸른 빛으로 잠시 바뀌더니.
-포옹!
“돼, 됐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노란빛의 세릭타 용액이 완성되었다.
“8번 학생. 합격입니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스키르의 손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로브를 꽉 쥐어 땀을 닦아낸 스키르가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아직 고군분투 중인 폴라가 보였다.
“끄응…….”
폴라는 뭔가 잘 안 되는 듯 절구를 붙잡고 한참을 씨름하고 있었다.
“시험이 끝난 학생은 퇴장해 주세요.”
스키르가 합격 통보를 받고도 한참을 서서 폴라를 바라보자, 진행자가 그에게 주의를 줬다.
그의 말을 듣고 퇴장하던 스키르가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포, 폴라 힘내!”
큰 소리로 폴라의 이름을 외쳤다.
“뭐, 뭐야!?”
그러자 화들짝 놀란 폴라가 처박고 있던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곳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파닥이는 스키르가 서있었다.
“저, 저게……!”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볼이 붉어진 폴라가 다시 고개를 푹 처박았다.
‘미, 미친놈 아니야! 지체 높은 공작가의 영식이라더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기분은 썩 좋았다.
‘이건 왜 이렇게 안 으깨져! 됐다!’
만드라고라 뿌리와 한참을 씨름하던 폴라가 조심스레 그것을 비커에 넣었다.
-포옹!
“20번 학생. 합격입니다.”
“됐다!!!”
그렇게 폴라 역시 마법약 1차 시험에 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