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린 양을 혼자 내버려 두오! (1)
“얻어낸 것은?”
“없습니다. 피의 서약인 듯싶더군요.”
이민족들에게 알베르토를 넘겨준 뒤 루카스를 찾아온 아만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놈의 피의 서약.”
언제나 피의 서약이 문제였다.
“옛날이 참 좋았다. 나 때는 말이야, 피의 서약이 뭔가? 사람들이 먹는 건지 입는 건지도 몰랐다.”
“…….”
“아니, 그런데 어느샌가 인간들이 그 서약을 알아내서는 응? 그걸 막 써먹더라 그 말이야.”
“……그걸 알려준 게 로드라는 말이 있던데요.”
“……누가 그러던가?”
흠칫 놀란 듯한 루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어오자, 아만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하셀… 이놈 자식을……!”
루카스가 죽기 전 로드의 자리를 물려주었던 하셀 테리디어, 아만의 아버지였다.
“그런 건 몰라도 된다. 아니 불피우는 거 알려줬는데 인간들이 방화하는 거랑 뭐가 다른가? 엉?”
“아이고~ 맞습니다!”
루카스의 격앙된 목소리에 아만은 과장되게 움츠러든 모습을 보이며 몸을 오소소 떨었다.
“……하셀을 많이 닮았군.”
“제가요?”
“그래. 그런데 하셀이 그건 말 안 해줬나 보군?”
“…….”
“걔 나한테 많이 맞았었는데…….”
싱긋 웃어 보이는 루카스의 눈빛이 살벌했다.
그의 정체를 알고 있어서일까. 분명 루카스는 작은 인간에 불과한데도 저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전대 로드와 같은 위압감이 느껴졌다.
“흠흠, 이제 갈 시간이…….”
“같이 가지.”
“로드도 함께 말입니까?”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루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폴리모프 시켜.”
“……예, 그래야지요.”
뻔뻔스럽게 한 걸음 앞으로 나온 루카스에게 폴리모프를 시전하자, 순식간에 모습이 바뀌었다.
“하, 언제나 높이가 적응이 안 되는군.”
훌쩍 커버린 키에 적응하기 위해 고개를 한번 세차게 흔들어 보인 루카스가 어서 가자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예, 가셔야지요.”
-파앗!
***
아만과 함께 이민족들의 마을에 도착한 루카스는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아만이 준 두둑한 금화 덕분인지 마을은 빠르게 그 모양을 갖춰 꽤나 정돈되어 있는 상태였다.
“크흑! 이런다고 네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그만해……!”
눈물로 범벅이 된 여인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알베르토의 시신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들은 마음속에 화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해명을 들을 수도 없었으며, 화풀이를 할 상대도 없었다.
차라리 누구의 잘못인지 정확하게 알 방법이라도 있었다면 이렇게 허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남편이, 이웃이, 아이들의 아빠가 순식간에 아동 살해범으로 내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들의 시신을 수습해 갈 수도 없었으며, 그들의 장례 역시 치를 수가 없었다.
온 제국 사람들이 그들에게 손가락질했고, 돌을 던졌다.
하지만 더욱 서글픈 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의심의 씨앗이었다.
제 남편이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지며 욕을 하는데, 그들에게 맞서거나 반박할 힘도, 증거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간혹 사실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내 남편이 혹시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한 것일까?’라든지, ‘우리 아빠가 지난번에 내게 준 인형을 사려고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작은 의심이 문득문득 들곤 했었다.
그런 작은 의심이 피어오를 때마다 그들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재울 수가 없었다.
더욱 슬픈 것은 그 분노를 풀어낼 대상도, 사실이 아니라며 그들을 다독여 줄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마을에서 내쫓기면서도 그들은 당장 눈앞에 있는 제 자식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엄마였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다들 마음이 조금 편해지셨습니까?”
“…….”
분노와 슬픔이 한데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바라보던 아만이 입을 열었다.
들려오는 아만의 목소리에 여인들은 울음을 삼키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아만의 말에 대답을 한 사람은 족장이었다.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에 물기가 흥건했다.
그 역시도 참담한 심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 노인의 말에 아만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일행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눈치 빠른 노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시선을 돌려 알베르토의 시신을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고국의 잔혹한 현실을 피하려 목숨을 걸고 이주를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손에 또다시 피를 묻히고 말았다. 아만은 이 참혹한 현장을 보며 자신이 과연 옳은 결정을 하였는지 의문이 들었다.
알베르토를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드래곤인 그에게 인간이란 한낱 동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그저 동물 중에 지능이 높고 말이 통한다는 점이 있을 뿐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하지만 아만은 이 가엾은 인간들에게 화풀이할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걸로 모든 노여움을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루카스의 다정한 말에 노인은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삼켜냈다.
“크흡… 이걸로… 제 아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노인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 준 아만의 표정이 씁쓸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성, 성함이라도 알려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그들이 떠나려 하자 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마록 입니다.”
“아마록… 감사합니다. 꼭, 꼭 기억하겠습니다.”
자신의 진명을 알려준 아만.
“가시지요.”
“그래.”
루카스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자, 아만은 알베르토의 시신을 수습해 텔레포트했다.
***
알베르토의 시신을 지하 던전 한구석에 잘(?) 놓아둔 아만과 루카스는 이제 다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 황제를 잡아 족쳐야지.”
“네, 그런데 얘를 어디서 어떻게 잡아 족칠까요?”
루카스의 시원한 말에 아만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만 역시도 바라던 바였다.
제 레어가 있는 영역까지 들어와 몬스터들을 조종한 간 큰 인간 놈들을 언제나 잡아 족치고 싶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황제다. 내가 이번 생을 잘 끝내려면 황제를 한 방에 잡아 죽여서는 안 돼.”
“그럼요?”
루카스의 말에 조금 실망한 듯 어깨를 살짝 내려 보인 아만의 표정이 침울했다.
“협박.”
“오~ 협박?”
하지만 이어 들려온 루카스의 말에 어깨를 활짝 편 아만의 눈이 다시금 빛나기 시작했다.
“그래. 협박. 한 나라의 황제씩이나 되는 작자가 뭣 하러 이런 짓까지 벌였을까?”
“흠……. 누가 영생을 준다고 한 것일까요?”
‘영생’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던 그것.
천수를 누리는 다른 종족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욕망 중 하나였다.
오래 살면 좋은 점? 분명 있었다. 하지만 오래 살면 살수록 질리게 되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짧은 수명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래. 말이 되는군. 영생을 꿈꾸는 인간들은 언제나 있었으니 말이야.”
“그렇죠? 게다가 시도하는 인간들도 많았구요.”
“그래, 하지만 이 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흑마법을 이 정도로 다루는 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언제나 빠르게 발전하니까요.”
생각을 거듭하면 할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화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더 생각해 뭐 해? 그냥 잡아 와. 협박하다 보면 뭔가 나오겠지.”
“맞습니다!”
루카스의 시원한 대답에 속이 뻥 뚫린 듯한 아만이 냉큼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나도 데려가야지!! 미친 도마뱀아!!!”
얼마나 신이 났는지 루카스까지 두고 간 아만이었다.
***
황성 주변으로 텔레포트한 아만은 알베르토 때와 다른 작전을 쓰기로 했다.
조용히 황제를 협박해야 하는 입장인데, 아무래도 황제라는 자리에 있는 사람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생기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게 만들면 되지~’
그리하여 펼친 작전. ‘어린양을 혼자 내버려 두오!’ 작전이었다.
혼자 작전명을 생각하던 아만은 자신의 센스에 스스로 감탄이라도 한 듯 작게 미소 지었다.
‘하, 정말… 나란 드래곤… 센스있는 드래곤……!’
잔망스러운 손짓으로 제 머리를 한번 휙 쓸어 넘긴 아만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크게 들이키는 건 큰 마나를 끌어 올려 운용할 때마다 나오는 그의 버릇 중 하나였다. 숨을 참아내면서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콰콰콰쾅!! 쾅!!
천지를 울리는 굉음.
그 굉음과 함께 완전히 무너져 버린 성벽 주위로 희뿌연 연기가 올라왔다.
“꺄아아악!”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지기 시작하고, 황성을 지키는 경비대들 역시도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갑작스레 받은 공격에 모든 군사들은 방어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고, 무너져 버린 마법진에 마탑의 마법사들 역시도 재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호오… 빠른데?’
황성을 감싸고 있는 2중 3중의 보호막을 뚫는 것은 드래곤인 아만에게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지.’
다시 한번 머리를 챠르륵 흔들어 보인 아만이 무너진 성벽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모든 경비 태세가 무너진 성벽에 집중하고 있을 때, 아만은 황제가 있는 집무실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처음엔 성벽을, 그다음엔 황제궁을, 그다음엔 집무실을.
그렇게 점점 거리를 좁혀가다 보면 황제는 황궁 안에 위치한 벙커에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
최소한의 호위만을 남겨둔 채 말이다.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들이키는 아만.
-콰콰쾅! 쾅!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쉽사리 무너져 내리는 황제궁의 외벽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제국의 가장 높은 곳. 황제가 사는 황제궁은 사람들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그런 황제궁이 이리도 쉽게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제국민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멀찌감치서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거리던 사람들도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강 건너 불구경도 가운데에 강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지, 눈앞의 불구경이 되면 재미없는 것 아니겠는가.
순식간에 황성 주변엔 개미 한 마리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자, 이제…….’
남은 것은 황제의 집무실.
본인 역시도 황제를 몇 번 본 적 있기에 그 집무실의 위치를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곳을 지키는 방어 마법이 문제였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탑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방어 마법을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으니, 이번엔 힘이 조금 들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아만이 숨을 크게 한번 들이켜자, 수십 개의 썬더스피어가 황제궁에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쾅! 콰르릉! 콰콰콰쾅! 쾅! 쾅!
방어 마법을 풀어내는 것은 몇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힘이지!’
힘으로 밀어붙여 깨어내는 방법. 그 방법이 무엇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가끔 부작용이 있다면 힘 조절이 잘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정도.
몇 겹을 깨어냈지만, 아직 남아있는 방어 마법을 바라보는 아만이 작게 미소 지었다.
‘됐다.’
이 정도면 힘 조절도 완벽했다.
이제 황제가 자신의 벙커로 옮겨갈 시간만 주면 되었다.
‘자, 이제 지옥을 보여주지!’
비릿하게 미소 짓는 아만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