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골드 나인
“넬라, 이쪽으로 와.”
“…….”
루카스는 정원 한쪽에 서서 넬라를 다정히 불렀다.
넬라 주변을 맴도는 나이아스들은, 그녀가 직접 소환한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습이 보이지는 않아도 기운은 느껴졌다.
“왜 그래?”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넬라는 발만 꼼지락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나이아스가… 오빠 무섭대…….”
“그게 무슨 말이야?”
억지로 웃어 보이는 루카스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옘병할 나방 같은 게 내가 무섭다고 떠들어?’
당장이라도 눈앞에 있는 나이아스 한 마리를 역소환 시켜버리고 싶었지만 꾸욱 참아냈다.
“몰라… 무섭다는데…….”
“하하! 그게 무슨 말이니? 나이아스랑 오빠가 따로 이야기를 해볼까?”
루카스의 이마에 작은 힘줄이 돋아났다.
“아, 아니야. 내가 말할게… 오빠 안 무섭다고…….”
“그래, 그럼 이쪽으로 와볼래?”
루카스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넬라의 마법 실력을 초급반까지는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라이트 마법이 되었든 작은 전격 마법이 되었든, 간단한 기초마법을 가르칠 생각이었다.
“자, 넬라. 나이아스를 부를 수 있다는 건 너랑 나만 아는 비밀인 거야.”
“왜?”
“음…… 사람들이 네가 나이아스를 부를 수 있다는 걸 알면 널 데려가려 할 거야.”
“……나를?”
넬라가 정령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분명 피곤해질 것이다. 저 어린애를 여기저기서 데려가겠다고 난리겠지.
“응. 너를 데려가면 우리랑은 떨어지게 돼.”
“그건 싫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넬라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래. 그건 나도 싫어. 그러니까 우리 나이아스를 부를 수 있는 건 비밀로 하자. 알겠지?”
“응. 나 지킬게. 비밀.”
“착하다. 그럼 오늘은 오빠랑 마법 연습하자.”
“응!”
작은 꼬마의 천재성은 엄청났다. 이미 상상하는 것만으로 작은 불빛은 쉽게 불러낼 수 있었다.
“자, 이게 파이어 마법이야.”
루카스가 손을 펼쳐 제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불러일으켰다.
“응. 파이어.”
“따라해 봐.”
“……어려워.”
“작은 불꽃을 불러낸다고 한번 생각해 봐. 이 손끝에 네 심장에 있는 마나를 조금 끌어오는 거야.”
“끄응…….”
주먹구구식 가르침이었지만 아이에게 이것보다 더 나은 설명은 하기가 힘들었다.
계산법이나 수식을 가르쳐 간단한 마법을 쓰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넬라는 너무 어렸다.
간단한 마법 정도는 수식이나 주문 없이도 발현하게 될 수 있어야 그다음이 더욱 쉬워지기도 했고.
기초 파이어 마법을 시작으로 더 나아가 헬파이어나 메테오도 불러올 수 있게 될 것이다.
크기와 위력은 서클을 얼마나 그려내느냐에 따라 달려있겠지만.
“잘하고 있어.”
넬라의 손끝에 마나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 마나를 불꽃으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이제 불꽃을 일으켜.”
“……끄으응.”
넬라는 잘되지 않는지 한참을 끙끙거렸다.
-콰앙!
“콜록, 콜록!”
순식간이었다. 손바닥에 모이던 마나는 점점 커지더니, 넬라가 불꽃을 불러일으키는 그 순간 펑! 폭발하고 말았다.
꽤 큰 폭발이었지만 넬라나 루카스가 다친 곳은 없었다. 의아함을 느낀 것도 잠시,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어린이 여러분! 불장난은 위험해요.”
“……아만?”
어쩜 이렇게 딱 맞춰 나타났는지! 아만이 폭발 직전에 방어 마법을 써준 듯 보였다.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 아만이 희뿌연 연기를 손으로 휘휘 저어 날려 보내며 걸어왔다.
“어린이 여러분을 데리러 왔어요. 이제 학교 갈 시간입니다.”
***
아만은 예정보다 며칠 더 일찍 시타타로 돌아왔다.
그는 오자마자 백작과 함께 광산을 시찰했다. 제 땅에서 나온 마나석들이 캐내어 지는 것을 보니 잠시 속이 쓰렸지만, 이내 루카스의 창고를 생각하며 쓰라린 속을 달랬다.
“아만님 덕분입니다. 아, 그리고 바마라스에서 오시기로 한 상단은 언제쯤…….”
“아!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겁니다. 안 그래도 그때를 맞춰 온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허허허. 이것 참…… 신세만 지게 되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아닙니다.”
대화를 건네는 백작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광산의 가치는 어마어마했으며 백작저의 사정은 나아지다 못해 활짝 폈다.
아만이 내어준 광산에선 한 뼘 걸러 하나씩 마나석이 나왔고, 한 뼘 걸러 하나씩 귀중한 보석들이 쏟아졌다.
은과 금은 덤이었다. 그러니 백작가가 돈방석에 앉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게다가 값비싼 보석류와 마나석은 거래가 무척이나 중요한데, 아만이 무려 골드 나인 상단과 연결까지 해주었다.
바마라스를 거점으로 한 골드 나인 상단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그들은 대륙과 대륙 사이에 위치한 섬나라인 바마라스를 무역의 요충지로 거듭나게 한 장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골드 나인은 그저 대륙을 이동하는 뱃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가던 섬나라였던 바마라스에 물류 창고를 건설하고, 대륙간의 무역의 장을 열어 그들에게 거래 수수료를 받는 엄청난 사업수완을 보이고 있었다.
“정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계약서 내용은 수정하실 수 있습니다. 20퍼센트가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은 지분도 언제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하, 아닙니다. 저는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렇게 많은 것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충분합니다.”
백작은 아만을 볼 때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애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백작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아만이 아니었더라면, 광산은커녕 지나가는 돌 하나도 캐서 팔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 그리고 그거 아십니까? 시타타에 사는 붉은 멧돼지 말입니다.”
“아, 예. 큰 골칫거립니다. 온 밭을 다 망쳐놓는 것은 물론이고 포악하기까지 하니…… 농민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예, 그렇지요. 게다가 잡기도 힘들구요.”
“예.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붉은 멧돼지는 왜……?”
“그 붉은 멧돼지에게 특효약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시타타에 사는 동물 중 하나인 붉은 멧돼지는 일반 돼지보다 덩치가 세 배는 컸으며, 성격 또한 포악해서 주민들의 기피 대상 중 하나였다.
붉은 멧돼지 고기 역시도 일품이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냥이 쉽지 않으니 일 년에 두어 마리 정도 잡으면 많이 잡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크나 웨어 울프 같은 포식자들에게 잡아 먹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번식력 때문인지 좀처럼 숫자가 줄어들지도 않았다.
민가에 종종 내려와 온 밭을 망치고 울타리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붉은 멧돼지에 특효약이 있다니? 백작은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예. 붉은 멧돼지에 특효약이…….”
“특효약이…….”
“골드 나인 상단에서 알려줄 겁니다!”
“예?”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헤 벌린 백작에게 싱긋 웃어 보인 아만이 백작저 입구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특효약을 줄 상단이 들어오고 있군요.”
마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차의 모양이 마치…….
“저건 무슨…? 호박…… 마차?”
생김새가 마치 커다란 호박 같았다. 그것도 온통 금칠을 해 휘황찬란한 그런 호박 마차.
“상단주가 조금 특이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저번보다는 낫군요.”
“저번엔 도대체 뭐였길래…….”
“가지 모양이었습니다. 금색 가지요.”
“……그런 마차가 가능합니까?”
입이 떡 벌어진 백작은, 어느새 백작저 코앞까지 다가온 마차를 보고 얼른 정신을 차렸다.
상단주가 왔다. 제 영지에게 돈을 가득 안겨줄 골드 나인 상단주가 직접!
마차 문이 열리자 백작은 얼른 계단을 내려가 상단주를 맞을 준비를 했다.
“흐으음~ 공기 좋고!”
한 여인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기지개를 쭉 켰다.
“저분이……!”
“예. 맞습니다. 골드 나인 상단주. 앨리 오리네우스.”
골드 나인 상단주는 백작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금발에 금안을 가진 그녀는, 많이 보아도 이십 대 초중반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보였다.
“어머, 안녕하세요? 정말 소박하고 공기가 좋은 영지네요!”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한 손을 척 내밀었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영주 시비에 로드리고 백작입니다.”
“호호, 네. 어머나 검을 다루시나 봐요? 손이 되게 거칠고…… 듬직하시네~”
조심스레 손을 맞잡은 백작과 달리, 앨리는 그의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감상을 뱉어댔다.
“그, 그만. 앨리? 소개해야지.”
“아, 아만! 정말 너무 보고 싶었지 뭐야?”
그제야 아만이 눈에 들어왔는지 그녀는 손을 홱 뿌리치고 그를 꼭 끌어안았다.
“윽, 숨막혀.”
“아~ 너무 좋다. 아! 맞다.”
아만의 볼에 가볍게 키스한 앨리가 그에게서 떨어지더니 다시 백작에게 다가갔다.
“소개가 늦었네요. 안녕하세요. 앨리 오리네우스 입니다. 골드 나인은 제 꺼구요.”
“예. 반갑습니다. 이 먼 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음~ 안으로 드는 건 이따 하고. 광산은 어디?”
아무리 상인이라 한들 앨리에게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천진해 보이는 그녀가 이런 큰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라니…… 백작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가 힘든지 아만을 연신 흘끗거렸다.
백작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아만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진짜 저 여자가 상단주가 맞다는 말이야?’
소문만 무성하던 골드 나인 상단주가 눈앞에 있는데 백작이 상상해 보았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상단주가 여자라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지만, 그 여자가 이렇게나 젊고 아름다운 것도. 게다가 이렇게나 천진한 것도…….
“아, 광산 말씀이십니까? 이쪽으로…….”
어느새 그녀의 페이스에 휘말린 건지 백작은 저도 모르는 새 광산으로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앞장서는 백작의 뒤를 따르는 앨리와 아만은 수다에 한창이었다.
“그래 가지고~ 거기서 내가…….”
“앨리, 이따가 말해. 이따가.”
“흥, 맨날 아무것도 못 하게 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마치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철없고 천방지축인 여자친구와 그런 그녀를 다정히 달래는 남자친구 같은 느낌.
‘연인인가…….’
***
광산을 보고 돌아온 그들은 응접실에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아, 광산 대단하던데요? 뭐, 저 정도 품질이면 내다 파는 건 문제가 안 될 거예요.”
차를 홀짝이는 앨리가 눈을 반짝였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네. 뭐 저 정도면 우리 상단 측에서도 상당히 이득이 되는 장사가 될 것 같네요. 자, 한번 살펴보시겠어요?”
앨리가 건넨 것은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 뭉치였다.
“아, 계약서입니까?”
“네. 뭐 다른 데서 계약하셔도 되긴 하는데, 아시다시피 저만한 물량을 한 번에 소화하긴 힘들겠죠. 저희와 계약하시면 원하신다면 세공과 가공까지도 연결해서 판매 가능합니다.”
“세공과 가공까지 말입니까?”
“네, 뭐. 저희 상단과 연결된 업체들은 상당히 많으니까요. 드워프에게 맡겨 마도구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고…… 여러 가지 이득이 되는 사업들을 함께 논의할 수 있겠네요.”
그녀는 상단주가 맞았다. 이익이 되는 모든 사업을 이미 머릿속에 구상해 놓은 그녀는 막힘없이 모든 사업 절차를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저희와 계약하신다면 계약금은 이만큼…….”
깃펜을 집어 든 엘리가 옆에 놓인 냅킨에 숫자를 몇 개 휘리릭 적더니 백작 앞에 밀어 놓았다.
“이만큼이라는 게……?”
“아, 실링 아니고 골드로.”
“……골드로?”
“네.”
백작은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앨리가 적어준 숫자의 0을 몇 번이나 세어보던 백작은 손까지 떨려오기 시작했다.
“적으신가?”
“아, 아니, 아니, 아닙니다.”
1천만 골드. 이 시타타를 통째로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수도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의 금액이 10만 골드 정도였다. 가장 크다고 소문난 오닐 공작저도 150만 골드면 충분히 사고도 남았다.
‘천, 천만 골드라니!’
“계약금은 지금 지급 가능하고…… 어떻게 하실래요?”
“계, 계약하겠습니다!”
“네, 좋아요. 골드 나인과 함께하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싱긋 웃어 보인 엘리가 손을 내밀자, 백작이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