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노루 상회 (5)
이름도 묻지 않은 노루 무역의 사장과 단 둘이 남은 아만.
“아, 안 돼! 제발…… 제발!!!”
사내의 처절한 외침에 아만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짜 소중하긴 한가 봐? 아주 난리가 났네 그래.”
아만의 냉정한 시선 아래에 있는 사내는 허공을 응시하며 끊임없이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일루전 마법. 서클이 높아짐에 따라 당하는 자에게 더욱 생생한 환상을 보여줄 수 있는 상위 마법이었다.
지금 사내는 환상을 보며 처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제발 자신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죽이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끄아아아! 크리스! 안 된다!!!”
“이만하면 됐으려나?”
사실 사내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내가 여태 저지른 만행에 비하면 그의 가족에게 실제로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크흑…… 제발…… 여, 여긴?”
일루전 마법이 해제되자 사내의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고, 그의 시선이 아만에게로 향했다.
“까꿍! 놀랐쪄?!”
“!!!”
양 손바닥을 활짝 펴며 웃어 보이는 아만. 그 장면을 마주한 사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냐 그거야. 응?”
“크흑…… 제발 뭐든 말씀 드릴 테니 제 가족들만은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사지가 꿰뚫린 사내는 고통도 잊었는지 아만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 빌었다.
“나도 알아. 네가 다 말할 거라는 거.”
“그, 그런데 도대체 왜…….”
“너는 그럼 왜 그랬는데? 죄도 없는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런 짓을 벌이고. 응? 네가 잡아 온 이민족들은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노예가 되어 팔려나갔어.”
아만이 사내에게로 천천히 몸을 숙였다.
“왜 그랬어? 응? 이것 때문에?”
-짤랑! 차르르르르륵!
아만의 손에 생겨난 금화가 사내의 머리 위로 우수수 쏟아졌다.
“인간들은…… 참 잔인해.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아닌데 말야.”
“…….”
“그런데도 이깟 돌멩이를 위해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야. 게다가 이건…… 아무런 능력도 없어. 마나석보다 훨씬 값어치가 없는 건데…… 이걸로 마나석도 사고~ 집도 사고. 응?”
아만은 금화 한 닢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알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이걸 너 혼자 한 건 아닐 거 아냐. 그치?”
“그, 그건…….”
“아, 나 진짜 화낸다? 지금부터 말 흐리는 거 금지. 다시 한번 그러면…….”
“……?”
“조금 전 네가 봤던 환상이 현실이 될 거야.”
눈을 접어 활짝 웃어 보인 아만이 턱짓으로 초상화를 가리켰다.
“저거. 단체 영정초상화로 쓰고 싶어?”
“저,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부요!”
“그래, 그래야지. 자, 그럼 이제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해 봐.”
“예. 노루 상회엔 후원자들이 있습니다.”
침을 한 번 삼켜낸 사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
-파앗!
빛이 터져 나오는 짧은 소리에 루카스가 고개를 돌렸다.
“다녀왔습니다!”
그곳엔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만이 서있었다.
“그래.”
“아이들은 아직 자고 있군요. 아까 해독 마법을 써두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점차 괜찮아질 겁니다.”
아만의 말대로 아이들의 숨소리는 처음보다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보다 일 처리는 잘했나?”
“물론입니다!”
-툭!
아만의 품에서 나온 두꺼운 서류철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게 뭐지?”
“노루 상회 후원자 목록입니다.”
“후원자…… 목록?”
“예. 그놈에게 물어봤더니 노루 상회 뒤에 후원자가 있었더군요. 기존 회원들을 점차 몰아낸 것도 그들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계속 해보게.”
다소곳하게 손을 모은 아만이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흠흠! 맨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었더군요. 이따 목록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부분이 중앙 귀족이고, 그 외에 라스칸 왕국, 에스나, 모라인 왕국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중앙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에 후원자가 있다는 소리지요.”
“하, 모든 왕국에?”
“그렇습니다. 처음 시작은 십여 년 전 아란트 제국 신년회에서부터였답니다.”
어이가 없었다. 중앙 대륙에 있는 네 개의 나라에 후원자가 골고루 퍼져있다니? 그게 말이나 된다는 소린가.
루카스는 입 밖으로 몇 번이나 ‘어떻게?’가 튀어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딱! 로드리고 백작가가 시타타로 쫓겨나던 그 시기쯤입니다.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옛날에 있던 노예제도가 참 좋았다며 농담 삼아 이야기하던 중, 그리스코 남작가에서 이런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지요.”
“……힘없는 시타타를 거점으로 삼고 나쁜 짓을 저지르자?”
“그렇죠!”
“하…….”
루카스는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들의 만행은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백번 양보해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노루 상회를 지원했던 자신의 아비 된 자가 문제였다.
‘물러 터져도 너무 물러 터졌군. 아둔하기 그지없어.’
순식간에 걱정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 하시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제가 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말해봐라.”
일 처리를 잘 해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낸 듯 신이 나서 이야기하는 아만. 평소였다면 진즉에 한소리 했을 그였지만, 지금은 머리가 복잡해 그 한소리가 나올 틈조차 없었다.
“가장 걱정하시는, 누가 뒤에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미 여기!”
아만이 손으로 서류철을 턱 하니 가리켜 보였다.
“언제 누구에게 얼마를 어떻게 받았고, 어떤 노예를 넘겼는지, 그들의 취향이 무엇인지까지 낱낱이 적혀있습니다.”
“……잘했다.”
“또한 이들의 조직도까지 이 안에 모조리 적혀있습니다. 아까 사장되는 자가 겁이 많아 혹시 자신이 잘못되는 때에 대비해 모두 기록해 두었더군요. 협. 박. 용!으로 말입니다.”
‘협박’이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하는 아만.
“그 말인즉…… 우리도 협박을 하자?”
“그렇죠. 어찌 되었건 이미 죽어버린 노예나 이민족은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천계에 올라가 데려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이미 희생된 자들을 되돌려 올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걱정되는 백작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협박을 하자 그 말이죠. 물론 백작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꾸며야겠지만요.”
이것 역시 맞는 말이었다. 아만이 자꾸 맞는 말을 청산유수처럼 뱉어내자, 루카스는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져 왔다.
“어떻게 할 생각인가?”
“하하! 로드도 참…… 협박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은푸른 머리를 귀 뒤로 슥 쓸어올린 아만의 표정이 순간 건방져 보인 것은 기분 탓이었겠지.
“……?”
“겁을 주는 일 아닙니까?”
갑작스러운 아만의 자문자답에 루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겁을 주는 방법이야 수천수만 가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인간을 겁주는 일은 너무나도 쉽고요. 이 아만만! 믿으십쇼!”
자신의 가슴을 팡팡 쳐 보이는 아만을 보니 정말이지.
“믿음이 가질 않는군.”
젠장. 머리가 복잡하니 속으로 생각하려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오고 말았다.
루카스가 무심하게 뱉어낸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아만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지고, 루카스의 표정 역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그게 아니다. 네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그래! 이 서류! 서류가 믿기질 않는다 그 말이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분명 제가 저를 믿으라고 한 다음에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저, 정말이래도? 너 알지 않느냐? 내가 거짓말을 잘 못 한다는 거 말이다. 보, 보아라! 이것이 어찌하여 거짓이라는 말이냐? 그, 그러니까…… 이게…….”
루카스의 동공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아만의 동공 역시 초점을 잃어갔다.
“그, 그러니까…… 응?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거라.”
안절부절못하는 루카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만의 고개가 세차게 저어졌다.
“아뇨? 됐습니다. 제가 이번 기회에 로드께서 다시는! 저를 못 믿겠다는 소리를 하시는 일 없게 만들겠습니다. 그럼 되는 거 아닙니까?”
“……응?”
“예. 이 아만이 한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일 처리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아만의 눈이 일순 투지에 불타올랐다.
***
루카스와 아만은 먼저 노예로 잡혀있는 이민족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어이가 없군. 가장 먼저 한 것이 노예들을 빼돌리는 일이었다니 말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아이들을 남겨둔 것도 일부러 그런 거였답니다. 아이들에게 눈을 돌린 사이 값이 비싼 노예들을 빼돌리려고요.”
토악질이 나왔다. 생명을 값어치를 그저 금전의 크기로만 책정하는 그들의 잔인함에 치가 떨렸다.
“저 배인가?”
“네. 저기 노루 깃발 있네요.”
항구에 도착한 그들의 눈에는 돛 머리에 노루 깃발을 달고 이제 막 출발한 배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숨어있죠. 저들이 바다 한가운데에 도착할 때까지.”
루카스 역시 동의했다. 이제 막 항구를 출발한 배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가는 피곤해질 것이 분명했다.
-사아아
아만이 투명화 마법을 시전하자, 그들의 모습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가지.”
-파앗!
출발한 배 위로 텔레포트한 그들의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시타타에서 만났던 세 명의 사내였다.
“크하하! 그 자식들 순진한 거 봤어?”
“낄낄…… 그러게나 말이야. 괜히 겁먹었어.”
사내들은 갑판 위에 서서 아까의 일을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란테만 불쌍하지 뭐. 그러게 뭐하러 달려들어서는…… 쯧”
“내가 란테한테 항상 그랬다고! 그 성질 좀 죽여라. 그러다 언제 봉변당한다! 하고 말이야. 그런데 오늘 어떻게 됐어? 응?”
빨간 머리 사내가 다른 사내들에게 대답을 부추겼다.
“내가 항상 그랬지? 너 그 입! 입을 조심해야 한다고. 네 말대로 된 일이 한둘이 아니잖아!”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빨간 머리 사내의 입을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아니, 나라고 뭐 악담이라고 했겠어? 조심하라고 한 얘기지. 그리고 너희도 너무 그 상황만 보고 믿지 말라고. 응? 그 자식들이 우리한테 혹시 추적마법이라도 걸어두고 우리를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빨간 머리 사내의 말을 들은 아만이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사내에게 예지력이라도 있는 것인지 정말 신통했다.
“이 자식이 그래도? 그 주둥이 좀 조심하라니까!”
사내들이 투닥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아만이 루카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
“로드…… 지하로…….”
조용히 속삭이는 아만. 이곳에서는 누가 있는지 모르는 곳으로 텔레포트하는 것보다 걸어가는 것이 나았다.
“그러지…….”
루카스 역시 아만의 등에 조용히 속삭였다.
지하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선원들이 선내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두었기도 하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모든 선원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로 들어서자 바다의 짠 내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풍겨왔다.
배의 규모는 상당했다. 겉에서 봤을 때에도 왕실 무역선과 맞먹는 커다란 크기였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그 규모가 엄청났다.
지하 1층엔 식료품 창고를 비롯한 선원들이 쉬는 방이 있었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니 각종 화물이 쌓여있었다.
지하 3층. 배의 가장 아랫부분으로 내려오니 이전과는 다른 냄새가 섞여 풍겨오기 시작했다.
안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자 믿을 수 없는, 믿고 싶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