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53화
153. 귀환(4)
“이게 뭡니까?”
길드장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작은 창을 바라봤다.
“수락하십시오.”
“이게 뭔 줄 알고…….”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넘실거리는 서현우의 기운에 압도된 길드장들은 조용히 침음을 삼켰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반투명의 상태창.
그곳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플레이어 ‘서현우’와 ‘계약’하시겠습니까?]
압도적인 서현우의 기세에 주춤했던 길드장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알아야 승인을 할 거 아닙니까?”
큰 소리를 낸 것은 더원의 정민우였다. 두려움을 떨쳐 내고 싶어 하기라도 하듯 그는 거대한 대검을 탁상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쾅-!
그 모습을 본 서현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 내용을 공유해 드리죠.”
영 내켜 하지 않는 모습의 서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반투명의 창이 움직였다.
[계약]
-갑(서현우)은 을(계약자)의 신변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
-갑은 을이 상처 입었을 경우 최선을 다해 치료해야 한다.
-갑은 을을 정당한 이유 없이 보호하지 않았을 경우 목숨을 잃는다.
-갑은 을을 정당한 이유 없이 치료하지 않았을 경우 목숨을 잃는다.
“이게 무슨…….”
여기까지 계약 내용을 읽은 길드장들은 경악했다. 비록 갑의 위치에 적힌 것이 서현우이기는 했지만, 서현우에게 좋은 조항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엄청난 불공정계약.
길드장들은 서현우가 대체 왜 이런 계약을 내밀고 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 다음 장으로 넘겨 보세요.”
서현우의 낮은 음성에 길드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한 길드장들은 다음 장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을은 갑에 대한 행동 의무가 없다.
첫 줄을 읽은 길드장들은 경악했다.
“이게 무슨……?”
“뭐 이런 계약이…….”
대부분의 길드장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지었지만, 유독 도드라진 반응을 보인 것은 오성 길드의 구태민이었다.
“이, 이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 오성의 후계자이자 오성 길드의 대표인 구태민은 믿을 수 없다며 몇 번이나 눈을 끔뻑였다.
“침착하고 아래를 보게.”
계속해서 넋이 나가 있는 구태민은 보다 못한 정민우가 그를 툭 치며 정신을 일깨웠다.
정신이 돌아온 구태민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 그래. 아직 끝까지 보진 않았으니까.”
자신의 뺨을 강하게 내려친 구태민은 계속해서 계약서를 읽어나갔다.
-을은 ‘악마’와의 대결에서 절대 도망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을에게 부여된 버프 효과는 모두 사라진다.
-계약을 통해 갑을 관계가 성립되면 을은 ‘공생’의 효과에 따라 버프를 부여받는다.
-계약을 통해 갑을 관계가 성립되면 갑은 ‘자기희생’의 효과에 따라 버프를 부여받는다.
“……끝?”
구태민은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눈을 비빈 후 손가락을 이용해 계속해서 다음 페이지로 화면을 넘겼다. 그러나…… 아무리 옆으로 페이지를 넘겨 보았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즉, 여기까지가 내용의 전부라는 뜻.
허탈할 정도로 어이없는 계약 내용에 구태민은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질 때까지 수많은 계약서를 봤지만, 이런 얼토당토않은 계약서는 난생처음이었다.
철저히 갑에게만 불리한 내용. 모두 을을 위한 내용이었을 뿐만 아니라 갑이 받는 이익은 없었다. 아니 하나 있긴 했다. 버프.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였다. 오직 하나. 갑이 받는 이익은 오직 버프 하나뿐이었다.
반면 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엄청난 이익을 얻는 구조였다. 을에게 강요된 의무는 단 하나였다. 악마와의 대결에서 결코 도망치지 않는 것. 하지만 그마저도 손쉽게 파기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버프 하나만 포기하면 되니, 사실상 페널티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구태민은 계약서의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나 바뀌는 내용은 없었다. 즉, 모두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다는 뜻.
몇 번이고 내용을 확인한 길드장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이런 꿀 같은 계약을 안 하는 게 병신이지.”
“맞아, 시스템이 공증해 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의심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플레이어 사이에서 떠도는 진리 같은 문장이었다.
길드장들은 시스템을 믿고 하나둘 계약을 수락하고 있었다.
반면.
“왜 이런 계약을…….”
구태민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현우에게 이익이 없었기 때문. 영 믿기 힘든 계약이었다. 그러나…… 여기저기서 수락 버튼을 누르는 것을 본 구태민의 손은 어느새 수락 버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한번 믿어 봐?’
조금 전 봤던 서현우의 무위와 치유 능력. 자신이 여태껏 본 그 누구보다 훌륭한 플레이어였다. 사실상 계약을 승낙하기만 하면…….
“여분의 목숨이 생기는 꼴인데…….”
잠시 중얼거린 구태민은 멈칫했다.
여러 가지 사업을 운영하면서 느낀 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꿀처럼 보이면 그것이 사기는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라!’
항상 마음속에 새겨 두었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충고였다.
“흠.”
구태민은 조용히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그때 오른쪽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구태민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미친.”
계약을 수락한 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빛이었다. 그들이 흩뿌리는 광채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빛이었다. 하얀빛을 두른 길드장들은 자신들의 몸을 둘러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오, 뭐야!”
“몸이 너무 가벼운데?”
“와! 시발. 이거 버프도 최상위급이야.”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구태민은 고개를 돌려 서현우를 바라봤다.
서현우의 몸에도 마찬가지로 빛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계약을 승인한 플레이어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약한 빛.
이상함을 느낀 구태민은 수락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서현우에게 다가갔다.
끼긱 거리며 의자의 다리가 비틀거렸다.
비대한 풍채가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2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몸집이 움직이자, 모두의 눈빛이 쏠렸다.
“구태민 회장?”
“구태민 회장이 왜…….”
여기저기서 구태민의 돌발행동에 의문을 품고 있을 때였다.
“왜 그런 거지?”
싸늘한 물음이 이어졌다.
구태민의 의도를 알고 있기라도 하듯 서현우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에게 도움 되는 일이니까요.”
“이렇게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얻은 게 이렇게 나약한 빛인데도 말이냐?”
사납게 날아드는 물음. 대마도사라 일컬어지는 구태민의 지팡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모든 마나를 끌어들이기라도 하듯 엄청난 양의 마나를 흡수한 지팡이에서는 이글거리는 화염이 꽃피어 있었다.
“대체 사람들에게 무슨 짓을 한 게냐!!”
노기를 가득 담은 안광이 번쩍였다.
이에 서현우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나약하지만, 끝은 창대한 힘입니다.”
“그게 무슨……!”
둘은 서로를 조용히 노려봤다.
말 한마디 없는 그들의 눈빛 교환에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쿠구구구구.
“어르신…….”
“왜 그러지?”
“눈치채셨습니까?”
갑작스러운 서현우의 물음에 구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구구구.
구태민의 등 뒤로 세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화륵!
붉은 원의 마법진은 토해 내듯 화염을 내뱉기 시작했다.
어느새 방 안을 가득 메운 화염구.
불타는 화염구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 일렁이고 있었다.
구태민은 매서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할 수 있겠지?”
“예.”
“그렇다면 믿고 가도록 하지.”
서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구태민의 입꼬리도 하늘을 향했다.
구태민과 서현우의 대화는 듣는 입장에서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전개.
죽일 듯이 싸우려다 갑자기 할 수 있겠나 묻질 않나, 믿겠다고 하질 않나,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구태민은 고개를 끄덕인 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앞에 서 있는 서현우가 아닌 자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지 않은 한 중소 길드장을 향해!
콰르르릉!
모든 화염구가 갈색 머리의 젊은 길드장을 향해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본 다른 길드장들은 경악했다.
‘대체 왜?’라고 묻는 듯한 얼굴.
그러나 이어진 상황을 마주한 길드장들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아차렸네?”
화염 공격을 맞은 길드장의 얼굴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 * *
붉으락푸르락 떠오른 거품이 터지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화살촉 모양의 꼬리를 가진 검은 생물체였다. 찢어진 인간의 가죽을 뚫고 거대한 날개가 펄럭였다.
“악마?”
화면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생명체를 목격한 길드장들은 단번에 전투태세를 취했다.
놀랄 새도 없이 전투 준비에 돌입한 그들은 괜히 각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의 주위에 있던 존재는 빠른 대응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콰앙-!
귀찮다는 듯 휘두른 꼬리에 10명에 가까운 길드장이 목숨을 잃었다.
“후, 이제야 더러운 냄새가 좀 안 나네.”
주변을 깨끗이 한 악마는 장난기 넘치는 눈으로 서현우를 바라봤다.
“그나저나 너는 좀 강하네?”
서현우가 대답할 새도 없이 고함이 들려왔다.
“다들 이쪽으로!!”
구태민은 믿을 수 없는 일격으로 넋이 나가 버린 길드장들의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움직여!”
“탱커 앞으로!!”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3대 길드의 대표들이었다. 그러나 악마는 다른 녀석들은 관심도 없다는 듯 오직 서현우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일대 수십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을 확인한 악마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숨어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서현우는 악마의 물음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중이었다.
“괜찮으세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그 순간.
악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시에.
콰아아앙-!
맹렬한 살기가 플레이어들을 덮쳤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고, 나타난 것은 멀쩡한 모습의 사람들이었다.
“……?!”
악마의 공격은 반투명의 하얀빛에 가로막혔다.
악마는 흥미로운 물건을 발견했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서현우는 마지막 남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다.
“내 예상보다 더 빠르군.”
“흐흐흐. 아니 어떻게 알았냐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느껴졌다.”
“호오? 그럼 내가 있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전략을 나불댔던 거야?”
악마의 물음에 서현우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야…… 넌 오는 여기서 살아서 못 돌아갈 테니까.”
“크큭. 네가? 나를 죽여?”
악마는 가소롭다는 듯 조소를 흘렸다.
“왜? 못할 것 같아?”
“크큭.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런데…… 날 이긴다고 이 상황이 끝날 것 같아?”
악마는 여전히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서현우의 싸늘한 물음이 이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아까 네가 그랬잖아. 72 악마가 하나 나타나면 서울이 초토화되고, 둘이 있으면 한국이 반파된다며! 그리고 셋이 있으면…… 키킥.”
악마의 말에 서현우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너 지금…….”
“여기 72 악마가 몇이나 와있는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