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9화
149. 대비(7)
“전쟁 준비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네?”
“호호.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 말을 남긴 실버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을 황망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스테니언이 도깨비 보따리 안에 담긴 보물들이 궁금하다며 테론 보다도 빨리 도깨비 보따리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황당함에 도깨비 보따리와 은빛 용이 사라진 하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안 한다더니.”
피식 웃은 나는 보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들은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내심 나를 도와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정이 많이 쌓이긴 했지.
다시 한번 고마움을 느끼던 나는 갑작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테론 페르몬드를 바라봤다.
“천도윤.”
“응?”
테론 역시 이글거리는 비늘을 불태우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악마 녀석들이 어떻게 인간계로 온전히 넘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분명 제약이 걸릴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심각하게 말하는 테론의 음성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즉,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한껏 걱정 섞인 음성. 나는 진중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안 돼도 해야지.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인데.”
테론이 들으면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이미 각오한 일이었다.
새 삶을 시작할 때부터…….
가문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지구로, 지구에서 세계로 사이즈가 커져 버리기는 했지만 내 목표는 언제나 같았다.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것.
조금 오그라들긴 해도 이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좋다.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 보마, 너희가 무너지면 우리도 위험해지니까.”
내 의지를 읽은 테론 페르몬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에 나 역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응했다.
“꼭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잠시 뜸을 들인 테론은 이내 웃기 시작했다.
“큭. 크하하하하! 맞다. 오랜만에 생긴 제자인데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자신의 감정을 더 이상 숨기지 않고 내비쳤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가슴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됐다. 마음 둘 것 없다.”
웬일로 호탕하게 웃어 재끼는 테론을 보며 나는 또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처음엔 무섭기만 한 존재였는데.’
이제는 제법 편안한 사이로 발전했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나는 빤히 테론 페르몬드를 바라봤다. 그 역시 천천히 나를 바라보다 거대한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구나. 너는 너희 동료들과 실버를 기다렸다가 지구로 향하거라.”
“예.”
테론 페르몬드는 그 말을 끝으로 마고의 도깨비 보따리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텅 비어 버린 지젠의 활화산.
내 손에는 낡아 보이는 보따리 하나와 두꺼운 공책 하나가 들려 있었다.
“동료들은 언제 오려나?”
나는 저 멀리 활화산 하단부에서 고룡들과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는 암살이와 우마를 바라보다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명상과 전략을 세우기를 3일째.
미약한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깨달음이나, 달관을 통한 변화는 아니었다. 단지…….
멀리서부터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아직 눈을 뜨지 않았음에도 느껴지는 날렵한 기운. 나는 그 기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아름답게 정제되고 깎인, 단단함과 시리도록 찬 기운을 동시에 가진 존재가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용암의 기운을 배척하기라도 하듯 장대한 냉기를 흩뿌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좁쌀만 해 보이던 존재가 축구공 크기로, 축구공 크기에서 눈에 꽉 찰 정도의 크기로 가까워지기까지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쿠우웅-!
바닥이 진동했다.
지젠의 악명높은 더위에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상대방이 내뿜는 냉기의 기운은 악랄했다.
[주인, 잘 있었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웅혼하기 그지없었지만 고룡들에 비해서는 아직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반갑게 일어나 반 페르데이스를 맞이했다.
“어서 와! 반!”
반 페르데이스는 만년설로 덮인 비늘을 펼치며 그릉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팔을 벌린 채 얼굴을 비볐다.
“이 아비는 안 보이는 게냐?”
그때, 반 페르데이스의 등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반에 비해서 턱없이 작고 초라한 몸집. 그러나 결코, 밀리지 않는 기운을 내뿜는 이는 다름 아닌 천가의 가주 천태산이었다.
“아버지.”
“천도윤.”
평소보다 더욱 차가워진 아버지의 눈빛이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벼락같은 잔소리가 떨어질 것을 예상한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할 때였다.
“강해졌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려왔다.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어째서인지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강해져, 너에게 실망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진심이었다.
옆으로 봐도 위로 봐도 아래서 봐도…… 아버지의 말은 진심이었다.
과도할 정도의 자신감에 나는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참으로 아버지다운 발언이었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고고하고도 콧대 높은 태도.
자칫 보면 오만한 자라 폄훼할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아버지의 말과 행동은 모두 실력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반 페르데이스는 분명 강해져 있었다. 세 마리의 왕들과 매일 살을 맞부딪치며 성장했던 나와 비교해 봐도 크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놀라움을 넘어 믿지 못할 정도로 성장한 아버지와 반 페르데이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 역시 얼마나 가혹한 훈련을 진행에 왔는지 단숨에 느낄 수 있었다. 고룡은커녕 성체 취급도 받지 못하던 반 페르데이스가 고룡과 맞먹을 정도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으니 길게 말하면 입만 아플 정도였다.
“저도 실망하지 않아도 돼서 기쁘네요.”
하여 나 역시 웃으며 그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핏줄은 어디 안 가나 보죠. 뭐.”
“큭.”
“크하하하하.”
우리는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기쁨일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자의 상봉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꿈틀거리는 아버지의 미간을 보며 고개를 돌린 나는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또 다른 기운을 목도 했다.
반 페르데이스와 아버지가 혹한의 삭풍처럼 거칠고 맹렬한 기운이었다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운은 좀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잡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제되고 은밀한 기운이었다.
“저들이 은빛 용이더냐?”
“예.”
뛰어난 기감으로 거의 은빛 용의 접근을 알아차린 아버지가 물었다.
“대단하구나.”
아버지 역시 은빛 용들의 긴밀한 기운 안에 숨겨진 진짜 힘을 어느 정도 눈치챘는지, 놀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어, 찬란한 비늘을 뽐내는 은빛 용들이 내려앉았다. 한 마리의 왕과 세 마리의 고룡. 그들이 지젠의 활화산에 내려앉자, 짙은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에서도 나는 눈을 밝히며 앞으로 나아 갔다.
이미 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힘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서 와요. 한별 씨.”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란 박한별이 말했다.
“아, 뭐예요!”
응?
박한별의 얼굴은 황당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담긴 얼굴이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친한 척을 했나? 아닌데, 친한데…….
나는 그녀의 당황스러운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네?”
“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제가 뭐 실수라도…….”
“했죠. 실수.”
싸늘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걸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거? 그래 이건 내가 봐도 좀 심하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생각이 많아지는 사이, 이어진 박한별의 대답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새로 배운 기술로 한껏 골려 주려고 했더니…….”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헛숨을 내뱉고 말았다.
“고작 이런 일로.”
“고작이라니요. 제가 3년 전부터 얼마나 기대하던 일이었는데.”
박한별은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저기 박한별 씨.”
“왜요.”
“제가 누구한테 배우셨는지 잊었어요?”
그제야, 박한별은 상황을 깨닫고는 입술을 잘근 씹어댔다.
“저도 매일 지구가 돌아가고, 왼손을 뻗으면 오른발이 나가고 왼발을 뻗으면 왼팔이 나가는 환각 속에서 3년을 고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박한별은 공감하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내 곁으로 와 어깨를 토닥이던 박한별은 처음으로 인사다운 인사를 건넸다.
“많이 힘들었죠?”
덤덤하게 내뱉는 인사에 울컥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나는 박한별과 함께 실버에게 다가갔다.
“이분들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
실버의 뒤에 있는 세 마리의 고룡은 모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난기 넘치는 표정으로 나에게 환각을 걸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니 어떻게?”
“대장. 이게 무슨.”
고룡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들의 왕을 바라봤고, 실버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누구 제잔데 그런 조악한 환각에 걸리겠습니까.”
“크윽.”
고룡은 잠시간 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정도도 하지 못하면 그 간악한 박쥐 새끼들의 해코지에 당할 게 뻔하지.”
내뱉듯 말하던 고룡들에게 다가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흥, 딱히.”
“난 단지 도깨비 보따리 안이 궁금할 뿐이다.”
“마고의 귀물은 어디에 있나? 인간이여!”
이들의 목적은 지구의 탈환보다는 도깨비 보따리에 가 있는 듯했다. 대체 마고의 보따리가 뭐라고…….
이유야 어찌 됐든 이들이 우리를 도와주러 온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흔쾌히 보따리를 열어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건?”
“오~ 정말이다. 이건 그 도깨비 녀석의…….”
도깨비 보따리를 확인한 고룡들은 마치 값비싼 보물이라도 취급하듯 조심스럽게 도깨비 보따리의 외형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별이의 도깨비방망이도 대단했지만 이건…….”
“내 보물들을 모두 담아내고도 공간이 텅텅 남겠지?”
“그걸 말이라고. 야 잠깐만 비켜 봐. 잘 안 보여.”
“나도 좀만 보자.”
그들은 어느새 으르렁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실버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들을 말리려고 할 때였다.
실버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다들 조심해!”
콰아아아앙!!
지젠의 활화산을 찢을 듯한 굉음이 들려왔다. 순식간에 짙은 안개가 흩날리며 사라졌다. 시야가 밝아지고…… 우리는 고막을 강타한 굉음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든 종의 정점이자 고룡들의 왕과 비견해 봐도 결코, 밀리지 않는, 아니 그 이상의 광포한 힘을 폭발하듯 내뱉는 존재. 흉흉하기 그지없는 기운을 흩날리는 존재가 거기 서 있었다.
“광룡?”
“크핫! 여기 버러지들이 모여 있구나.”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도깨비 보따리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이던 고룡이었다. 그는 광룡을 발견하자마자 죽일 듯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크헉.”
그러나 그 태도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어느새 폴리모프한 모습으로 몸을 축소 시킨 광룡은 은빛 고룡의 목을 틀어쥐고 있었으므로.
“분질러 줄까?”
덤덤한 그의 음성에 은빛 고룡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