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8화
148. 대비(6)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천가 내에서 벌어진 회의의 유일한 외부인인 서현우는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몇 달 전 새로운 천외천의 일원이라며 쭈뼛대며 서찰을 내밀던 사내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원로가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방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분명 조금 전에 모든 플레이어를 모아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소.”
원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지어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서현우가 입을 열었다.
“지방 쪽은 따로 맡아줄 분들이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원로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땅을 모두 맡는다는 말이오?”
“예.”
자신 있는 서현우의 대답에 장내에 모인 인물들은 궁금증을 표했다.
“누구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잠시 뜸 들인 서현우가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에 원로 중 하나가 침음을 삼켰다.
노골적인 불편함을 나타내는 행동에도 서현우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보다 협회에 연락해 플레이어들을 모으는 것이 우선입니다. 언제 2차 공습이 이어질지 모르니까요.”
“그건…… 알겠소. 내 당장 연락해 보리다.”
서현우의 말을 들은 원로 천수환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을 보좌하던 직원에게 말을 전했다.
“당장 협회장한테 전화해.”
협회장을 이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은 천가의 원로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말을 전해 들은 직원은 급히 핸드폰을 꺼냈다.
곧 통화음이 울리더니, 누군가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수환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회의했던 내용을 전하기 시작했다.
“예,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드립니다.”
툭.
핸드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천수환은 짐짓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빨리 모아보겠다고 하는군. 지금 협회 쪽도 비상사태라 할 일이 많은 모양이야.”
“알겠습니다.”
즉각적인 반응이 없어 실망한 서현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몇 가지 사안에 대한 회의가 이어졌다.
“그럼 일단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지. 다들 긴장하고 경계 태세 확실히 유지하도록.”
“예.”
군기 잡힌 목소리가 회의장 안을 크게 울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 회의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네는 잠깐 남게.”
천수환은 마지막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서현우를 불러들였다.
모두 나갔음을 확인한 천수환은 서현우에게 다시 앉기를 권했다.
“앉게.”
“네.”
영문도 모른 채 다시 착석한 서현우는 의아한 얼굴로 천수환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
잠시 뜸을 들인 천수환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자네.”
“괜찮습니다. 물어보십시오.”
“모를 것이 뻔하네만…… 도윤이의 행방을 아는가?”
질문을 한 천수환은 당황한 듯 주먹으로 입을 가렸다. 생각해 보니 참 바보 같은 질문이었던 탓이다. 서현우는 그동안 인버스 타워에 들어가 있었고, 악마의 습격으로 천태산과 천도윤, 천지현이 사라진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서현우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사실. 천수환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실낱 같은 희망을 담은 질문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뼈아픈 가시가 되어 되돌아왔다.
“내가 괜한 말을 했구먼. 미안하네. 가 보게.”
얼굴이 조금 붉게 달아오른 천수환은 손을 내저었다. 빨리 볼일을 보러 가보라는 뜻의 손짓이었다.
이기적인 축객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살아 있습니다.”
“그래 그건 자네도 알 수 없는 사실이…… 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수환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자네!”
얼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한다기에는 지나치게 큰 음성이었다.
“살아 있습니다, 도윤이. 아마 함께 있던 분들도 모두 살아 있을 겁니다.”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가?”
천수환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긴 서현우가 입을 열었다.
“음…… 느껴지거든요.”
“느껴진다니?”
“저도 최근에서야 느끼게 된 건데…… 저랑 도윤이는 미약하지만,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게 끊어지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무사한 것 같고요.”
천수환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에 서현우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며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잠시 적막이 일었다.
조금 길었던 침묵이 깨진 것은 천수환의 입으로부터였다.
“고맙네.”
천수환은 서현우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조금의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영 믿기지 않는 외부인의 말. 하지만 실낱같던 희망이 조금 더 커진 것은 사실이었다.
‘위로를 건네기 위해 지어 낸 이야기인 것도 같지만…….’
3달이 넘는 시간 동안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모두 다 같이 그 끔찍한 악마와 동귀어진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믿어 봐야지…… 천가의 핏줄이 어떤 핏줄인데.’
조금만 더 믿어 보기로 한 천수환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서현우를 배웅했다.
* * *
“축하해요.”
“이런, 미친놈.”
“진짜로 해낼 줄이야.”
나는 혀를 내두르는 실버와 스테니언, 테론 페르몬드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허억. 헉. 다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헐떡이는 숨을 삼키며 내뱉은 말에 세 마리의 고룡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래.”
“크흠. 원래 용들은 한 번 내뱉은 말은 죽는 한이 있어도 지키는 법이다.”
“…….”
“왜 실버는 대답이 없어?”
“……좋아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마지막 실버의 대답으로 나는 모든 고룡들의 왕에게서 ‘약속’을 받아 냈다.
만족스러운 웃음을 내보이는 나에게 스테니언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짜로 인간이 3년 만에 우리의 기술을 모두 습득하다니…… 게다가…….”
“저희 기술도 다 뺏겼잖아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내비치는 스테니언을 실버가 거들었다.
“진짜 한계가 어디까지인 거야? 이 녀석.”
“크큭. 내가 말했잖아. 너희 기술들 모조리 습득해 주겠다고.”
나는 용의 비늘만큼 단단해진 가슴을 팡팡 쳐 대며 말했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용암을 마시던 테론 페르몬드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그래도 키울 맛이 나는 제자였다.”
이에 실버와 스테니언 역시 거대한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약속을 지키겠다.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씩 말해 봐라, 애송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건 안 돼요.”
각종족의 왕들은 한마디씩 거들며 소원을 재촉했다. 3년 전, 세 종족의 왕들과 했던 내기를 이긴 나는 눈앞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고룡의 진체를 바라봤다.
“다 필요 없고, 내 소원은 하나야.”
그들의 고개가 한층 더 가까이 밀착했다.
나는 거대한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는 그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인 뒤, 품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하거라. 소원이 무엇이냐.”
결국 참지 못한 스테니언이 재촉했다.
“기다려 봐. 아, 여기 있다.”
나는 오랜 기간 꺼내지 않았던 아이템을 꺼내 그들 앞에 내보였다.
“어? 이건?”
“그 귀하다는 도깨비 보따리 아닌가요? 이걸 왜…….”
의아해하는 실버와 스테니언과는 달리, 뒤에 서 있던 테론의 동공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마치 대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하는 눈동자를 겨우 바로잡은 테론이 소리쳤다.
“너 설마!?”
“그래.”
씨익 웃어 보인 나는 붉은 용과 푸른 용 그리고 은빛용을 대표하는 왕들을 바라보며 도깨비 보따리를 활짝 열었다.
“들어가시지요. 스승님들.”
“뭐?”
“뭐라고요?”
“저런 미친!”
잘 듣고도 모른 척하는 우리의 스승님들을 향해 나는 다시 한번 말했다.
“들어가시라고! 우리 약속했잖아?”
뻔뻔한 내 말투에 드래곤들의 왕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허.”
“무슨…….”
“…….”
들어 줄 수 없다는 듯한 태도들 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아니, 우리 세계가 끝난다면 다음은 여기라며, 기왕이면 같이 힘을 합쳐 두 세계다 지켜 내는 게 좋잖아!”
“천도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우리가 모두 넘어갔을 경우 세계선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다. 그러면 마계 쪽에서 72 악마들이…….”
“이미 넘어오고 있는 거 몰라?”
조금 낮아진 내 음성에 세 마리의 용들은 움찔했다. 용들에게 배운 말에 의지를 담는 성음이었다.
“나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야.”
싸늘한 음성이 울렸다.
나는 지금껏 장난식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속에 담긴 심정만큼은 절박했다.
내 마음을 읽은 용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결코, 짧지 않은 3년이라는 시간. 나는 죽을 듯 수련했다.
말이 수련이지 매일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니 실제로 매일 죽을뻔했다.
한 마리도 아닌 세 마리의 용. 그것도 각 종족을 대표하는 용을 상대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배운 것도 많긴 하지만.’
어쨌든.
세 마리의 용이 시간을 뒤틀어댄 탓에 지구의 시간은 3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여 나는 드래곤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천하의 고룡. 그중에서도 각종족을 대표하는 왕들께서 약속을 안 지키지는 않겠지.”
“도윤 씨, 아무리 그대로 이건…… 각 세계간의 혼란만 줄 거예요.”
“혼란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멸망하는 것보단 말이야. 내가 볼 땐 이대로 놔두면 지구는 그대로 멸망이고 당신들 세계도 위태로울 것 같은데.”
“저희는…….”
“72 악마 중 고위급에 다섯 손가락 안에 속하는 녀석들은 당신들과도 맞먹는다며. 그들이 모두 넘어와도 피해 없이 막을 수 있을까?”
“그건…….”
“지구를 삼킨 녀석들이 세계선의 균형 따위를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사납게 외치는 나의 외침에 세 마리의 용들은 침묵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붉은 용들의 왕 테론 페르몬드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군.”
“테론!!”
“테론님!!”
스테니언과 실버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테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자, 너는 이걸로 이동하거라.”
테론은 가지고 있던 애커만의 여행일지를 나에게 넘겼다. 묵직하고 낡은 여행일지를 받아 든 나는 테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흥, 이럴 때만 존댓말이구나.”
“격식 차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던 게 누군데.”
“조용하거라. 그런데 설마 저곳 안이 좁지는 않겠지.”
퉁명스러운 테론의 대답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도깨비들의 왕이 쓰던 물건인데 좁을 리가. 아주 바다처럼 넓으니 걱정 마쇼.”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테론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것은 실버와 스테니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뭘 그렇게 봅니까?”
“지금…… 도깨비들의 왕이라고…….”
“네, 그게 뭐요.”
“허, 이 미친놈은 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이게 마고 것이라고?”
그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입을 떡 벌린 채 보따리와 나를 번갈아 가며 보는 용들의 모습이 썩 볼만했던 탓이었다.
한참을 침묵하던 실버가 스테니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세계선의 균형을 망치지 않고도 이동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말이야. 이 녀석 이런 귀물이 있으면 진작 말할 것이지. 야 이 보따리 나한테 팔 생각 없냐? 내가 후하게 쳐줄게.”
아무래도 마고의 도깨비 보따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물건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