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6화
146. 대비(4)
콰앙-!
굉음과 함께 호탕하고 강대한 음성이 들려왔다.
“일단 실력부터 보자꾸나.”
나는 만년설의 주인 스테니언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하며 그를 바라봤다.
“앞뒤 순서가 바뀐 거 아닙니까?”
“크하핫. 그런가? 그래도 인간치곤 제법이군. 못 피할 줄 알았는데.”
머리를 긁적이는 그에게 나는 싸늘한 대답을 날렸다.
“저를 죽일 셈이셨습니까?”
“자격이 없다면.”
이에, 스테니언의 건조한 대답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 오싹 닭살이 올라왔다. 확실했다. 확실히 저 스산한 음성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콰앙-!
다시 한번 활화산의 달궈진 바닥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우선 죽지 않고 버텨보거라.”
“……젠장.”
나는 바닥을 구르며 몸을 날렸다.
누구는 필사적으로 공격을 피하고 있는 반면, 폴리모프 상태의 스테니언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무런 노력도 느껴지지 않는 무성의한 주먹질. 그러나 그 형편없는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드래곤 한 종족의 정점에 서 있는 자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콰아아앙-!
스테니언의 주먹이 휘둘러질 때마다 믿기 힘든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믿기 힘든 양의 파편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크핫! 제법이구나.”
가히 재앙이라고 불러도 좋을 수준. 나는 멀리 발걸음을 옮기며 전방을 주시했다. 스테니언은 즐겁다는 듯 웃고 있었고, 테론은 그런 나를 그저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실버라고 불리는 은빛 용들의 왕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할 거예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얼굴로 마음에 들지 않음을 어필하자, 그녀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제일 멀쩡하다고 생각했건만…….’
그녀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녀를 향해 다시 한번 인상을 구길 때였다.
위이이이잉-!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단순 느낌만이 아니었다. 정말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이어, 눈앞에 있던 스테니언의 몸체가 하나에서 두 개로. 다시 두 개에서 다섯으로 늘어났다.
“이게 무슨……!”
콰앙-!
몸이 붕 떠올랐다. 이내 복부에 끔찍한 고통이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저 당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커억-!”
울컥 피가 터져 나오며 정신이 흐릿해졌다.
그 사이 스테니언의 몸체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어느새 세상을 덮을 정도로 무수히 많아진 스테니언이 눈에 들어왔다.
“미친……!”
아무리 드래곤이지만 이게 무슨…… 머리가 멍해졌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종의 최상위에 있는 드래곤이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세상을 덮을 정도로 본체를 늘린다니…….
“이게 대체 무슨!”
어이없음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이죽거리는 스테니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넋 놓고 있다가는 죽는다. 인간.”
동시에 움직이는 스테니언의 분신.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어? 잠깐…… 설마!”
스테니언은 만년설의 주인이었다. 이는 곧 스테니언의 분신 또한 만년설로 만들어져야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느껴지는 한기는 단 하나다.”
만년설의 냉기를 품은 존재는 오직 하나였다. 나머지 분신들은 전부다…….
“그렇군.”
나는 이제야 이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쏟아지는 별처럼 무수히 많은 스테니언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은빛 용이었다.
“정신 차리라는 게 이런 거였군.”
은빛 머리칼을 자랑하던 그녀의 기술은 아무래도 환영과 관계된 능력인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흑운의 힘을 끌어올렸다.
흑운의 힘은 기본적으로 분리와 단절에 있었다. 나는 흑운의 힘을 이용해 눈을 어지럽히는 환영을 단절하기 시작했다.
스스스.
그러자 시시각각 바뀌는 환영이 하나, 둘 ‘인식’되기 시작했다.
눈으로 조금만 주시하고 있어도 어느새 현실과 구별이 사라지는 은빛 용의 환영을 인식하기 시작하자, 훨씬 움직임이 수월해졌다.
“호오. 제법이네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미색의 음성이 들려왔다.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콰앙-!
이어지는 스테니언의 공격을 피해야 했기에…….
“너무 치사한 거 아닙니까? 위대한 종들의 왕들이 인간 하나를…….”
“크핫! 재미있지 않으냐?”
“지구를 구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시간이 없을 텐데요.”
첫 번째 스테니언의 대꾸는 무시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실버의 말은 결코 허투루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시간이 없었다. 각 종족의 왕들이 가공할 만한 힘을 이용해 시간을 벌어 주긴 했지만,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뒤틀린 시간의 오차는 크지 않을 터. 나는 하루라도 빨리 성장해야만 했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생각난다는 말이지…….’
생의 끝자락.
혹은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 가는 훈련방식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다시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자, 나의 스승.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천가의 영원한 이인자.
천태백.
지금은 마치 스승님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컥 쏟아지는 피보다 더욱 참기 힘든 무언가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하거라,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 약점이 드러나고 만다.
스승님의 가르침이 뇌리에 번뜩였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스승님의 음성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본이다. 기본이 처음이자 끝이다. 올바르게 걷고, 올바르게 피하거라.
스륵.
맹수처럼 날아드는 발차기를 피해 냈다.
달라진 움직임에 번뜩이는 스테니언. 그러나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호흡과 움직임에 집중할 뿐이었다.
스륵-!
스테니언이 내지른 주먹질을 근소한 차로 계속해서 피해 냈다.
“호오. 조금 강도를 올려야겠구나.”
나를 향해 오는 주먹과 발차기의 속도가 월등히 빨라졌다. 또한 시야를 어지럽히는 존재들이 무수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떨 때는 박한별이, 또 어떨 때는 스테니언의 숫자가 늘어나며 현실과 환영의 경계를 어그러트렸다. 그러나 나는 그럴 때마다 흑운의 힘을 더욱 끌어 올렸다.
단절로 인한 약간의 부조화.
그것이면 족했다.
실제와 환영을 구분 짓는 것은.
콰앙-!
얼핏 느낀 시전자의 기척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첫 번째 반격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실버가 가볍게 공격을 쳐 냈다.
“공격까지 해내다니, 제법이군요.”
실버의 상냥한 음색이 들려옴과 동시에 그녀는 환영 뒤로 모습을 숨겼다. 언제 공격이 들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의 실력으로는 그것까지 생각하며 싸울 수는 없었다.
“이 새끼가, 나를 무시해?”
그때였다. 관심에서 조금 멀어졌다고 느낀, 스테니언의 분노가 들려왔다.
“그건…….”
급격히 늘어난 스테니언의 살기가 공간을 에웠다. 고룡을 뛰어넘는 강대한 냉기에 일순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콰앙-!
다시 한번 아찔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폴리모프로 전투력을 죽인 뒤 오직 팔과 다리만을 이용해서 공격하던 이전과는 달리, 그의 손에선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냉기가 터져 나왔다.
절대 녹지 않는 얼음이라는 만년설.
“크윽!”
나는 만년설을 방출해 스테니언의 만년설을 맞받아쳤다. 아니 맞받아치기보다는 궤도를 틀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았다.
전력을 다한 공격에도 스테니언의 만년설에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 하마터면…….’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내 몸은 온통 꽁꽁 얼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가까스로 막아 낸 지금도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헉, 허억.”
옆구리가 깊게 꿰뚫리고 말았다. 나는 상처를 붙잡은 채 전방을 주시했다.
“젠장!”
잠시라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대가는 컸다. 어느새 눈앞이 흐릿해졌다. 아마 피를 많이 흘린 반응이리라. 나는 애써 눈을 부릅뜬 채 호흡을 골랐다.
천천히 시야가 돌아오고 있었다.
밝혀진 시야에는 스테니언의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척도 없이 바짝 다가온 스테니언은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컥, 커억!”
조여 오는 숨통과 함께 상체의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차갑다 못해 아린 느낌이 몸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목을 잡은 채 거세게 발버둥 쳐 봤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조여 오는 손길이 더욱 강대해질 뿐이었다.
“컥, 커억!”
“그 힘, 어디서 났느냐?”
지금껏 보지 못한 싸늘한 시선이 몸 전체를 얼어붙게 했다.
나는 스테니언이 무엇을 말하는지 단숨에 알아들었다. 흥분한 푸른 용들의 왕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응전했던 방법 때문이리라.
나는 만년설을 막기 위해 만년설을 사용했다.
그 부분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만년설을 사용할 수 있냐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제 기술입니다.”
“기술? 만년설이 말이냐?”
스테니언의 분노 섞인 음성이 몸을 짓이길 듯 조여 들어왔다.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 이것 좀 놓아주면 안 됩니까?”
“자세한 설명부터.”
스테니언의 단호함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하기 전까지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의 스테니언 옆에는 어느새 나타나 대답을 기다리는 실버가 있었다.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다 생각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게 그러니까…….”
“……!”
모든 이야기를 들은 스테니언과 실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스테니언은 자신의 만년설은 이리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허탈해했고, 그것은 실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테론! 알고 있었습니까?”
깜짝 놀란 실버가 뒤돌아 물었다.
테론은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테론은 짧게나마 내 전투를 지켜본 유일한 사람, 아니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이분을 남기신 거군요.”
“그래.”
잠시 테론을 노려본 둘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마치 동물원 원숭이를 바라보듯 이리저리 나를 돌려 본 녀석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키울 맛이 나겠어.”
“그러니까요. 다른 녀석들에 비해 떨어지면 쪽팔려서 어떡하나 생각했었는데.”
당사자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의지를 다지던 실버와 스테니언은 각자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좋아요.”
“좋다. 너를 내 정식 제자로 받아 주지.”
아주 제멋대로인 드래곤들의 허락이 떨어졌다.
* * *
만년 설산, 은빛 안개 언덕, 검은 사막에는 각각 다른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크윽!”
“허억. 헉.”
“꺄아아악!!”
붉은 두루마리를 전하기 위해 떠났던 이들 또한 천도윤과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만년설의 정수를 알려 주지.
-도깨비 녀석들의 허깨비도 좋은 기술이긴 하다만 우리 은빛 용의 환영엔 비할 바는 아니지.
-크하하하핫! 인간 그 어둠의 힘은 쓰레기다. 제대로 된 힘을 배우거라.
그들을 둘러싼 용들의 입들은 열의를 불태우며 한 명의 인간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들의 모든 기술을 전수해 줄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