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5화
145. 대비(3)
심신이 미약한 상태의 천지현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검은 용들의 왕 제프리. 그는 강대한 기운을 조금의 조절도 없이 모두 내비치고 있었다.
고룡들의 정점에 이른 용의 기운. 그것은 한낱 인간이 버티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힘이었다. 하물며 심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라면야…….
곧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한 천지현이 바위에 몸을 기대며 정면을 응시했다.
“하아. 하.”
검은 용들의 왕은 나약한 인간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낄낄대고 있었다.
“볼품없는 인간이여. 힘들면 버티지 않아도 된다.”
“버티지 않으면 죽습니다.”
“크큭. 알고 있구나.”
제프리는 꽤 흥미롭다는 듯 천지현을 바라봤다. 천지현은 입술을 꽉 문 채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용이 흩뿌리는 힘은 다른 용들과는 확연히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정신을 좀먹고 머릿속을 어지르는 힘. 한순간만이라도 정신을 놓는 순간 육체를 뺏기고 마는 불길한 힘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천지현은 서서히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위대한 종에 반항하기 위함이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스스슥-!
검은 사막만큼이나 어두운 힘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제는 별이 되어 버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힘 흑운(黑雲)이었다. 온몸을 덮는 검은 먹구름에 고고한 자태로 그녀를 내려 보던 제프리의 눈이 커졌다.
“잠깐. 저건……?!”
살의와 광기로 가득 찼던 음성이 사뭇 진지해졌다.
영문을 알지 못한 천지현은 ‘페브니르의 망치질’을 이용해 흑운을 더욱 강화했다. 검은 먹구름이 강대해진 용의 기운을 가로막으며, 어느 정도 완화해 주기 시작했다.
천지현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하자, 제프리는 천지가 떠나갈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핫. 크하하하하하!!”
단순한 웃음임에도 불구하고 천지현은 전력을 다해 바닥에 몸을 고정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기에…….
한바탕 웃어 재낀 제프리는 이내 천지현의 앞으로 불쑥 나타났다.
콧김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 천지현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했다.
“테론 그 자식 아주 재밌는 걸 보냈군.”
광기로 가득 찬 제프리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오소소 닭살이 올라왔다.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천지현은 검은 사막의 경계 앞에서 제릭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인간 잘 들어라. 검은 용은 절대로 만만히 봐서는 안 되는 존재다. 언제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한다.
걱정 섞인 음성이었다.
광룡이라 불리는 검은 용의 왕 제프리는 여느 용들과는 달리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그저 수천 년을 고고하게 홀로 지낸 용이었다. 무리를 이루고 있지 않음에도 그가 한 종족의 왕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오직 그의 힘 때문이었다.
강대한 그의 힘을 무시할 수 있는 고룡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광포한 그의 힘은 다른 용들까지 겁에 질리게 하는 거칠고 위험한 힘이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분이다.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하도록.
제릭은 어울리지 않게, 끝없이 걱정을 쏟아부었다.
그 모습을 떠올린 천지현은 긴장감을 최대치로 올렸다.
그녀의 생각에 반응해 흑운의 기운이 더욱 어두워졌다. 마치 바깥 세계와 주인을 단절이라도 시키려는 움직임이었다.
흑운을 빤히 바라보던 광룡 제프리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재밌는 게 들어와서 가지고 놀다가 죽이려고 했는데 말이야.”
입맛을 쩝 다시는 광기의 용을 본 천지현은 온몸의 털이 쑥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힘을 탐욕스럽게 훑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천지현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이 힘을 보니 그럴 수 없겠군.”
입맛을 다시는 제프리의 말은 한없이 진지해져 있었다.
“테론…… 영악한 녀석.”
잠시 허공의 한쪽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린 제프리는 천지현을 바라봤다.
“인간. 운 좋은 줄 알아라.”
투박하고 거친 음성이었다.
격과 품위와는 거리가 먼 제프리의 말이 이어졌다.
“이제부터 너는 내 제자다.”
* * *
지젠의 활화산에는 붉은 용들의 왕 테론 페르몬드의 부름을 받고 온 두 마리의 용이 있었다. 만년설의 주인 스테니언과 안개 숲의 주인 실버.
각각 푸른 용과 은빛용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모여 있었다.
“이렇게 모이는 건 이만 년 만이군.”
“반가워요. 테론.”
먼저 인사를 받은 것은 실버였다. 미색의 음성에 이어 투박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 아주 반갑군. 테론. 선물은 잘 받았네.”
경쾌한 웃음을 내보이며 웃는 만년설의 주인 스테니언을 바라본 테론은 날개에 열기를 더했다.
“입조심해라. 반 페르데이스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종이니.”
가당찮다는 듯 웃어 보인 스테니언은 승자의 미소를 유지한 채 물었다.
“크큭. 만년설의 비늘을 가진 용이 말인가?”
“그래.”
테론 페르몬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자, 그만하세요. 매번 만날 때마다 싸우실 거예요?”
중재에 나선 것은 실버였다. 그녀는 양손을 넓게 뻗은 뒤 그들의 사이를 갈라놨다.
“혹시 더 올 용이 있나요?”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는 두 용을 바라본 실버가 말했다.
“하나 더 있긴 한데 아무래도 안 올 것 같군.”
테론의 말에 은빛용 실버가 물었다.
“테론. 누군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 그녀의 얼굴을 본 테론이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광룡.”
짧은 대답. 그러나 그 여파는 어느 때보다도 컸다.
스테니언은 어느새 채신은 땅바닥에 버려 두기라도 한 듯 테론을 쏴붙이기 시작했다.
“뭐? 너 미쳤어? 설마, 진짜로 광룡을 불렀다고?”
“테론!!”
그리고 깜짝 놀란 것은 스테니언뿐만이 아니었다. 은빛 머리칼을 흩날리는 실버 역시 동그랗게 눈은 뜬 채 소리쳤다.
“광룡이 어떤 성격인지 몰라서 부른 겁니까!”
“알고 있다. 하지만 녀석이 강한 것도 사실이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안 된다! 그 녀석은 아주 미친놈이야!”
“그렇게 미치진 않았다.”
거센 반발에 테론은 검은 용의 왕을 두둔하기 시작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녀석이 윌리언에게 한 짓 못 봤어?”
흥분한 스테니언이 소리쳤다.
이에 테론은 덤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겁먹지 마라. 어차피 이곳에 오진 않을 것 같으니.”
“겁먹기는 누가…….”
스테니언은 발끈하며 얼굴을 붉혔다.
“만년설이 붉어지기도 하는군.”
“뭐? 이 자식이 진짜……!”
한차례 복수에 성공한 테론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실버와 스테니언에게 말했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고 시작하지.”
상황을 일축하는 테론의 말에 흥분했던 두 용은 서서히 감정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알겠다.”
“좋아요.”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꾼 세 마리의 용은 각각 바닥에 그려진 복잡한 술식 위에 올라갔다.
“광룡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꼭 성공해야만 한다.”
“알겠다고.”
“알겠습니다.”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용을 바라본 나는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저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지 알고 있었다.
위대한 존재가 지젠의 땅에 도착하기 전, 테론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해 귀띔해 주었다.
-우리는 너희를 이곳에서 훈련 시킬 것이다.
-예? 지구는 지금 거대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하루빨리 돌아가야…….
-그것은 걱정하지 말거라.
싱긋 웃는 테론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 기가 막힌 방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궁금한 것 천지였지만, 점점 진지해지는 위대한 종들에게 다가가 물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기운이 한데 섞여 폭발하듯 팽창하고 있었다.
“크윽.”
나는 거리를 벌린 뒤 각종들의 왕이 모여 하는 의식을 유심히 바라봤다.
붉은빛과 푸른빛 그르고 은빛이 한데 섞여 조화롭게 구르기 시작했다. 이내 세 속성의 힘은 한곳으로 완전히 섞여 들어갔다.
일순, 일대가 깜깜해졌다.
마치 태양이 꺼진 듯한 분위기였다.
형용할 수 없는 기파가 하늘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 위로 퍼져 나갔다.
솨아아악-!
“크윽!”
“끄아아아악!!”
“으윽.”
상상할 수 없는…… 왕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왕들을 바라봤다.
그들의 비명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끄아아아아악!!”
“참아!!”
“더 많은 힘이 필요해!!”
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길고 길었던 그들의 비명이 잦아들었다. 더해 어두컴컴했던 주위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제자리를 찾아들기 시작한 것이다.
탈진에 가까운 상태로 땀을 흠뻑 흘리고 있는 테론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숨을 헐떡이던 그는 숨을 고른 채 대답했다.
“괜찮다. 광룡 녀석이 없어 에너지를 많이 뺏겼을 뿐이다.”
“에너지를 많이 뺏기다니 대체 어디에…….”
“지구와…… 이어지는 세계선의 틈.”
테론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던 탓이었다. 세계선의 틈에 힘을 불어넣다니 대체 왜…….
아직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도 전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또 다른 용. 실버가 뒤에서 말했다.
“당분간 이곳과 지구의 시간 흐름은 완전한 비대칭을 이룰 겁니다.”
그녀의 설명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 * *
세 마리의 용이 모두 정신을 차린 후 나에게 한 말은 참으로 어이없는 말이었다.
“너의 동료들은 이미 훈련 중이다. 너도 이젠 시작하자꾸나.”
테론의 무거운 음성에 나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갑자기 훈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다. 너의 동료들을 보낸 건 두루마리를 건네기 위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네? 그렇다면…….”
“그래, 가장 잘 성장할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 녀석들을 보냈지.”
“허.”
테론의 몇 수 앞선 실행력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시간도 뒤틀어 놨으니, 안심하고 수련하려무나.”
테론은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어깨를 들어 올린 채 가슴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나는 실소를 터트리며 웃었다.
솔직히 고마웠다.
어느 누가 처음 본 인간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자신들의 행성이 위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지만 테론의 친절은 과한 감이 있었다.
테론은 이런 내 맘을 간파하기라도 했는지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반을 살려 준 은혜를 갚는 것일 뿐이니까.”
테론은 무심한 듯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이 썩 따뜻해 보여 가슴이 따듯해지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겨우 이 정도로 무슨.”
손사래 치는 테론에게 실버가 다가왔다.
아직 회복이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핼쑥해진 모습이었다.
“훈련은 언제부터 시작인가요. 테론?”
실버의 물음에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테론을 바라봤다.
“네? 실버님이 훈련도…… 아니, 잠깐! 설마?!”
그러나 테론은 내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실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연이어 들려오는 두 마리 용의 목소리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재밌겠네요.”
“크하하핫. 오랜만에 인간을 가르쳐 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