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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144화 (144/175)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4화

144. 대비(2)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카렐 페르데이스.”

은빛이 도는 머리칼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인간이 카렐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렐은 능청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별거 없어. 이 인간을 너희 대장에게 데려다주기만 하면 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카렐을 바라봤다. 카렐은 한숨을 푹 내쉬며 등에 올라타 있던 박한별을 내려보냈다.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인간, 그걸 보여 줘라.”

카렐의 요구에 박한별은 고개를 끄덕인 채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붉은 용의 왕 테론 페르몬드의 인장이 박혀 있는 두루마리. 붉게 타오르는 인장을 확인한 고룡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테론 페르몬드의 인장? 카렐! 무슨 꿍꿍이냐! 대체 왜 이 인간이 그 빌어먹을 자식의…… 아니, 붉은 용의 왕의 인장을…….”

자신들의 왕을 욕보이는 언행에 잠시 발끈하려다가 심호흡을 깊게 내신 테론은 손가락으로 두루마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든 내용은 그 안에 쓰여 있을 것이다. 너는 잔말 말고 녀석을 너희 대장 앞으로 데려가기만 하면 돼.”

카렐의 무시하는 듯한 말에 은빛 머리칼을 가진 용의 미간이 구겨졌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사내는 이내 재밌는 생각이 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

카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에 은빛 머리칼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했다.

“두루마리를 가진 인간을 해하지는 않겠지만, 대장에게 데려다줄 의무는 없다.”

“페로타!!”

카렐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흥, 경계 부근에서 화염을 발사하고 경계 너머의 자연을 훼손한 자의 부탁을 내가 왜 들어 줘야 하지?”

“알지 않느냐? 너를 부르기 위함이었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다. 서로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란 말이다!”

다급한 카렐의 말에도 페로타라고 불린 자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얼마나 급한 일인데?”

미간이 한껏 구겨진 카렐이 소리쳤다.

“오천 년간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두루마리가 쓰였다. 그것으로 부족한가?”

“내용.”

단호한 물음에 침음을 삼킨 카렐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세계선에 관한 이야기다. 붉은 용들의 왕이 직접 도움을 요청하는 글이지.”

극비에 부치는 내용은 아니었기에 카렐은 가감 없이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을 읊어댔다.

카렐의 말을 들은 은빛 용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들어. 특히 붉은 용들의 왕이 직접 도움을 요청한다는 부분이 말이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은빛 용을 본 카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척 보기에도 많이 참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잘못하다가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질 것 같던 박한별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조심스러운 박한별의 태도에 은빛 용은 손을 올렸다.

“인간, 이쪽으로 넘어와라. 붉은 용의 ‘부탁’을 전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은빛 용은 어느새 완전히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 자신이 갑이라는 위치를 철저하게 이용이라도 하려는 듯이 가슴을 내밀고 턱을 치켜올리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박한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이 든 고룡이라도 수컷들은 별반 다르지 않구나…….’하고.

안개 낀 숲이 시작되는 부분이 붉은 용과 은빛 용의 영역을 가르는 경계인지 카렐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경계 앞에서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애써 표정을 고친 카렐이 말했다.

“인간, 빨리 가보거라. 급한 일 아니더냐.”

“예,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은색 용들은 음침하기가 세계 제일이니, 꼭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속삭이듯 마지막 말을 전한 카렐은 거대한 손가락으로 박한별의 등을 떠밀었다.

카렐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박한별은 은빛 용이 서 있는 안개 낀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양손을 벌린 채 박한별을 환영한 은빛 용은 카렐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부탁’은 특별히 들어 주지. 앞으로 두고두고 갚아야 할 거야.”

“빨리 데려가기나 해라. 정말 급한 일이다.”

“흥, 알겠다.”

은빛 용은 더 놀리지 못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뒤돌아섰다. 박한별과 눈이 마주친 페로타가 물었다.

“인간, 이름이 뭐지?”

“박한별입니다.”

“박한별이라. 좋은 이름이군. 타라.”

짧게 말한 페로타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에서 찬란한 은빛 비늘을 뽐내는 거대한 용으로 변해 있었다.

붉은 고룡보다는 작은 듯한 몸집이었지만, 내뿜는 기운만큼은 그에 못지않은 강대한 힘이었다.

있는 힘껏 발에 힘을 준 박한별은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단숨에 은빛 용의 등 뒤에 안착한 박한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인간치곤 놀라운 실력이군. 간다. 떨어지지 않게 꽉 잡아.”

“네.”

은빛 용이 날아올랐다.

빠르게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는 은빛 용의 비행 속도는 붉은 용보다 월등히 빨랐다.

아마 거대한 몸집을 조금 줄인 대신 스피드를 택한 듯했다.

쇄애액.

기분 좋은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만큼은 영 별로였다.

박한별이 본 은빛 용들의 영역은 온통 회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좀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온통 안개뿐. 만약 페로타의 안내가 없었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 가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가 펼쳐 있었다.

영역 전체가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은빛 용의 거처에 눈이 익기 시작했을 무렵.

은빛 용이 강하하기 시작했다.

이를 다문 채, 거대한 은색 비늘을 꾹 잡은 박한별은 곧 지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박한별은 안개 숲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찍어 누를듯한 기운에 침음을 삼켰다.

“크윽.”

“나약하구나,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냐?”

같이 날아왔던 페로타는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박한별을 향해 이죽거리던 페로타는 눈앞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용 두 마리에게 소리쳤다.

“그만해라. 손님 왔다.”

당장이라도 서로를 죽일 듯 달려들던 용 두 마리가 우뚝 멈춰 섰다. 모습과 풍기는 기운으로 보면 고룡은 아닌 듯했다. 그럼에도 박한별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대놓고 기운을 표출하는 드래곤의 기운은 그리 쉽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박한별은 새삼 붉은 용들이 일행들을 배려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폴리모프 한 것과 안 한 것은 차이가 크구나.’

생각한 박한별은 어느새 다가와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묘령의 여인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자빠졌다.

“아악!!”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박한별은 눈앞의 여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기운과 심연에 빠져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눈. 거기에 모든 용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까지.

“은빛 용들의 왕을 뵙습니다.”

박한별은 용들의 예법은 알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예를 표했다.

“기특한 아이구나.”

싱긋 웃는 묘령의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한별을 일으켰다.

“붉은 용의 부탁으로 왔지?”

“그걸 어떻게?”

깜짝 놀란 박한별이 반문했다. 그러자 찰랑거리는 은발을 흩날린 여인은 재밌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능력 있는 여인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법이란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듯 싱그러운 미소를 본 박한별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번 더 웃어 보인 은빛 용들의 왕은 손을 내밀었다.

이에 박한별은 냉큼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돌연 은빛 용들의 왕이 엄지를 깨물었다. 얇디얇은 손에서 은색 피가 흘러나왔다. 그 피를 인장에 가져가자 굳게 닫혀 있던 두루마리가 활활 타오르며 봉인을 풀어냈다.

공중에 떠오른 두루마리를 낚아챈 은빛 용들의 왕은 안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흐음.”

“호오?”

“크큭. 역시 테론은 재밌는 분이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한참을 웃으며 두루마리를 읽어 내려가던 여인은 마침내 모든 내용을 확인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에 한 자리로 모인 약 8마리의 용을 바라보던 여인은 은색 용들에게 말했다.

“저는 잠시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은색 용들이 물었다.

“갑자기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저희에게도 말해 주십시오.”

생각보다 적극적인 그들의 질문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지젠에 다녀올 생각입니다.”

“붉은 용들의 땅에요?”

“그 미친놈들의 땅에는 왜?”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은빛 용들에게 여인이 말했다.

“초대받았거든요.”

싱긋 웃는 은빛 용들의 왕의 대답은 간단했다. 이에 다른 용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 가십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제가 따라나서겠습니다.”

“맞습니다. 그 불같고 멍청한 녀석들이 어떤 함정을 팠을지도 모릅니다. 혼자 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경계에서 봤던 것처럼 붉은 용들과 은빛 용들은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은빛 용들의 반발에 왕이 말했다.

“급한 일입니다. 혼자 다녀와도 충분하고요.”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할 일이라면…….”

의아해하는 은빛 용들과 고룡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들의 왕을 바라봤다. 왕이라고 추앙받기에는 지나치게 어리고 아름다운 은빛 용은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말했다.

“여기 이 인간. 아니 한별 씨 좀 훈련 시켜 주세요.”

그 황당한 명령에 은빛 용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 * *

활화산을 떠난 다른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 페르데이스와 천가의 주인 천태산은 눈보라가 몰아닥치는 설산 앞에 와있었고, 지젠을 따라나선 천지현은 해 들지 않는 검은 사막 앞에 서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반 페르데이스는 어쩐지 환영받는 느낌으로 경계를 지나쳐 설산의 꼭대기까지 단번에 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크하하하하. 어떻더냐? 만년설의 시원한 비늘이 온몸을 덮었을 때 말이다!”

혹한의 푸른 용들은 반 페르데이스를 둘러싼 채 그에게 질문 세례를 쏟아 내고 있었다.

당황한 반 페르데이스를 내버려 둔 천태산은 자신의 임무에 따라 푸른 용들의 왕을 찾아 두루마리를 건넸다.

“기다리거라.”

그러고는 박한별과 같은 식의 전개가 펼쳐졌다. 푸른 용들의 왕은 지젠으로 떠났고, 남겨진 천태산은 용들에게 둘러싸여 훈련받아야만 했다.

한시바삐 지구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반 페르데이스가 끝까지 해야 한다며 이것만이 지구를 지킬 길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 탓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공손한 태도에 혹한의 용들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면, 검은 사막의 한가운데에 도착한 천지현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크하하하하. 병신 같은 짓거리를 하려고 하는군.”

검은 용들의 왕은 붉은 용들의 왕의 두루마리를 확인하고는 단숨에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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