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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143화 (143/175)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3화

143. 대비(1)

처음에는 테론이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이런 시기에 이런 가혹한 요구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테론의 말에 생각이 조금 바뀌고 말았다.

“이것을 들고 가거라. 아마 이것들을 들고 가면 실력 있는 용들을 한 마리씩 내어 줄 테니.”

테론의 손에는 어느새 3개의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붉은색 두루마리 중간에는 뜨겁게 불타고 있는 붉은 용의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붉은 용들의 왕 테론을 상징하는 인장인 듯했다.

“모든 내용은 이곳에 쓰여 있으니 데려오기만 하거라, 한곳에 데려온 순간 모두 지구로 돌려보낼 테니.”

고맙게도 테론은 우리에게 지원군을 붙여 줄 생각이었다. 나는 여태 흘러내리던 눈물을 닦은 채 테론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너희들이 무너지면 우리의 세계도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으니 투자라고 생각해 두려무나.”

무심한 듯 말하는 테론의 음성에는 근심이 섞여 있었다. 이만한 존재가 걱정한다는 것부터가 상황이 심각하다는 증거였다.

나는 달라진 눈빛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반을 좀 불러 줄 수 있겠느냐?”

뜬금없는 제안에 빤히 붉은 용들의 왕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걸린 혹한 군주의 목걸이에 힘을 불어넣자,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곧 만년설의 피부로 뒤덮인 반 페르데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오오오.

잠시 테론의 분노가 공간을 에웠지만, 이내 사라졌다.

“잠시 자리를 비키거라. 이 녀석에게 할 말이 있으니.”

“…….”

나는 빤히 붉은 용들의 왕을 바라봤다. 이에 한숨을 푹 내쉰 테론이 말했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걱정 말거라.”

“예.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대화를 끝마치고 아버지와 박한별, 천지현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자 일행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카렐 페르데이스와 또 다른 고룡 제릭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일행에게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와 이 녀석은 영역의 경계까지만 데려다줄 것이다.”

얼핏 보면 무책임해 보일 수도 있는 말에 박한별이 물었다.

“그다음에는 어디로 움직여야 하나요? 저희는 다른 종족의 드래곤을 생김새도 영역도 제대로 모르는데…….”

시간도 없는데 알아서 찾아가라고 할까 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굳이 찾아 나설 필요 없다. 저쪽에서 마중 나올 테니.”

“네? 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한다는…….”

반의 아버지 카렐은 고개를 저었다.

20대 초반 미남의 형태로 폴리모프한 카렐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건 따라와 보면 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또 다른 고룡 제릭이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오거라. 그리고 저 여자는 카렐이 인도할 거다. 그리고 너는 여기 남으면 된다.”

제릭은 손으로 우리를 가리키며 자리를 분배했다. 박한별을 카렐에게, 천지현은 자신이 데려간다고 선언했다. 고룡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택이 영 이해가 가지 않던 탓이었다.

천지현은 현재 혼절한 상태. 각 부족에 전해야 할 두루마리는 총 3개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닌 천지현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제릭은 선택을 번복하지 않았다.

“나머지 한 곳은 네가 가거라.”

제릭은 남아 있던 두루마리를 아버지에게 건네며 말했다. 단호한 대답.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룡은 두 마리.

전해야 할 두루마리는 3개였던 탓이었다. 이렇게 되면 아버지를 인도할 용 또한 없었다.

“설마 아버지는 테론님이 직접 데려다주십니까?”

제릭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냐며 나를 나무랐다.

“저 녀석은 반이 데려간다.”

나는 뒤를 돌아 아버지와 반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게다가 반을 데리고 갈 거면 주인인 내가 가야 효율적이지 않은가?

나는 가시지 않는 의문을 쥔 채, 제릭에게 물었다.

“그럼 저는……?”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여기에 남아 있으라고. 너는 남아서 할 일이 있다.”

의미심장한 그의 음성이 무겁게 울려왔다.

* * *

[주인. 잠시만 기다려라.]

테론과 대화를 마친 반은 카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본 아버지에게 반 페르데이스는 고개를 조아렸다.

[페르데이스가의 17대손이 아버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카렐 페르데이스는 다소 복잡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대답했다.

“많이 바뀌었구나.”

[예, 죄송합니다.]

“사정은 들었다.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느냐! 너를 빨리 찾아내지 못한 내 탓이다.”

[아닙니다. 아버지. 제가 부족해서…….]

“얘야. 살아 있으니 아버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단다.”

따뜻한 음성에 반 페르데이스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부자의 상봉은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짧았다. 짧은 대화를 끝으로 카렐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해야 할지 대충 들었겠지?”

[예,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저 녀석을 데리고 페로노프로 가거라.”

카렐 페르데이스는 내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에 반 페르데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임무를 수행하겠습니다.]

“좋다. 대처를 잘해야 할 것이야.”

[예, 아버지.]

“출발하거라.”

고개를 끄덕인 반 페르데이스는 순식간에 날개를 펼쳤다.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준비를 끝마친 반은 나를 바라봤다.

“허, 참.”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보다야 수천 년씩 사는 드래곤의 판단이 더 정확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조심히 다녀와. 다치지 말고.”

[고맙다. 주인.]

녀석의 이동을 허락한 나는 반의 앞에서 붉은 두루마리를 꽉 쥔 채 서 있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조심하세요. 아버지.”

“걱정 말거라.”

우리의 인사도 반과 카렐의 인사만큼이나 짧고 무심했다. 그러나 서로를 위하는 마음만큼은 온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가지.”

카렐과 박한별은 먼저 떠난다며 자리를 떴다.

이어 반 페르데이스와 아버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남은 것은 천지현과 제릭 그리고 나뿐이었다.

“충격이 클 겁니다.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나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제릭에게 말했다. 이왕이면 나를 데려가라는 무언의 요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룡 제릭은 단숨에 고개를 저었다.

“힘든 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지금은 여유가 없다. 이 녀석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단호한 대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동시에 조금 마음의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사실 나 역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이 아려왔다. 흑운 천태백은 내가 다시 살아난 뒤, 처음으로 마음을 연 사람이었으니까.

게다가 나를 강하게 키워 준 은인이었다.

조건 없는 지지를 해 주었던 스승님이 돌아가셨다는데 슬퍼하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또 한 번 올라오려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진심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말거라.”

믿음직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천지현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이 지나고 난 뒤였다. 몇 번이나 깨고 혼절하기를 반복한 그녀는 마침내 힘없는 몰골로 깨어났다.

여전히 울고 있는 그녀에게 우리는 잔인한 말을 전해야만 했다.

“움직여야 해.”

원망 섞인 그녀의 눈빛이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그녀의 충혈된 눈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녀의 특성이 온몸을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분위기였다. 이성을 잃을 것 같은 천지현에게 말을 건넨 것은 어느새 다가온 붉은 용들의 왕 테론이었다.

“따라가거라. 네 아비도 그것을 원할 것이다.”

“다, 당신이 뭘 안다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마는 천지현은 진한 살기를 내비치며 말했다.

그러나 붉은 용들의 왕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가 보거라. 가 보면 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테론은 그대로 뒤돌아섰다.

“저 자식이!”

“인간 말조심해라.”

굳은 표정의 제릭이 힘을 방출했다.

온몸을 짓이길 듯한 살기에도 천지현은 이를 악문 채 반항했다.

“뭐, 어쩌라고!”

나는 깜짝 놀라 천지현을 만류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간 상태라지만 상대는 고룡과 그런 용들의 정점에 있는 자였다.

“천지현!!”

“왜!!”

소리를 빽 지르는 천지현을 바라본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호흡을 깊게 한 뒤 그녀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반항하던 천지현은 두루마리를 전해 주어야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빨리 모이라고 해. 아버지 만나야 하니까.”

울먹이는 천지현은 결국 제릭의 등 뒤에 올라탔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돌아섰다.

“제가 여기서 뭘 해야 하죠?”

어느새 다가온 테론의 입이 움직였다.

* * *

카렐 페르데이스의 등 뒤에 올라탄 박한별은 주변을 둘러봤다.

드넓게 펼쳐진 황야와 도시 그리고 이계의 종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급한 일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여행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계의 경치는 훌륭했다.

“꽤 괜찮은 세계지?”

“예, 아름답네요.”

진심이 물씬 묻어 나오는 대답이었다.

이에 카렐이 말했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 놀러 오거라. 반과 함께 온다면 언제든 환영해 줄 테니.”

미래를 떠올리게 하는 카렐의 말에 박한별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고룡의 지혜인가? 싶을 정도로 카렐 페르데이스가 풍기는 언어와 느낌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레드 드래곤이라 불같은 다혈질만 있을 줄 알았는데…….”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혼잣말에 박한별은 냉큼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크큭. 나도 꽤 다혈질이라네.”

큭 웃으며 거대한 입꼬리를 들어 올린 카렐은 박한별에게 말했다.

“자네도 꽤 좋은 불꽃을 가지고 있군.”

도깨비불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도깨비불은 드래곤조차 탐내는 불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박한별은 절로 어깨가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그 장난꾸러기 종족과는 인연이 깊은 모양이야.”

“예, 친구이자 스승입니다.”

도깨비들과의 추억을 회상한 박한별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푸른 불꽃을 사용하는 인간이라…… 마음 같아서는 자네를 지젠에 남기고 싶었지만, 이쪽보다는 저쪽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말이야.”

카렐의 알 수 없는 말에 박한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움이 된다니 그게 무슨……?”

“만나 보면 알 걸세. 이제 거의 다 왔으니 떨어지지 않게 꽉 잡고 있게.”

그렇게 말한 카렐 페르데이스는 아가리를 쫙 벌린 채 하늘을 바라봤다.

콰과과과과과-!

그의 입에서 초열의 화염이 맹렬한 속도로 솟구쳤다. 하늘을 태워 버리기라도 할 듯 엄청난 위력으로 쏘아져 나갔다.

“갑자기 이게 무슨……?”

“보고나 있게.”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마친 카렐은 이젠 지상으로 급강하했다.

깜짝 놀란 박한별은 그의 비늘을 꽉 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곧, 지상에 도착한 카렐은 쉴 새도 없이 미친 듯 울어 대기 시작했다.

크롸롸롸롹-!

대기가 진동하고 전방의 나무들이 꺾여나가기 시작했다. 박한별은 또 한 번 카렐의 정신 나간 짓을 바라만 봐야 했다.

“카렐님 대체…….”

“보고나 있게.”

콰라라라락-!

이대로라면 전방의 숲이 통째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그만해라. 뒤지기 싫으면.”

까탈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왔냐?”

카렐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감히 엘레움을 향해 드래곤 피어를 날려? 이거 전쟁하자는 거 맞지?”

어느새 그곳에는 인간의 모습을 한 고룡이 서 있었다.

“그럴 리가, 이 인간 좀 데려가라고.”

“인간?”

박한별을 발견한 고룡의 인상이 한없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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