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2화
142. 새로운 구도(4)
“녀석에게 죽음 대신 내리는 벌이다.”
테론의 웅혼한 음성이 대기를 울렸다.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해지는 음성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경계선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또 금기는 대체 뭐고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테론 페르몬드가 입을 열었다.
“말 그대로다. 세계의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어. 가뜩이나 불안했던 상황에 이 녀석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테론은 반의 아버지가 가져온 아몬의 시신을 발로 툭 차며 말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선이 무너지고 있다니……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러나 마냥 믿지 않을 수만도 없었다. 말한 이가 다름 아닌 붉은 용들의 왕 테론 페르몬드였으니까. 만약 말한 이가 테론 페르몬드가 아니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소식이었다.
테론의 말을 들은 동료들은 사뭇 진지해진 얼굴이 되어 있었다.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아버지가 물었다.
“금기라고 하셨는데 금기가 무엇입니까?”
늘 고고한 태도를 유지하던 아버지조차도 붉은 용들의 왕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빤히 바라보던 테론이 말했다.
“인간계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마계는 4000년 전 약속했다. 인간계를 건들이지 않겠다고. 이건 세계 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룰이었지. 그러나 너희도 알겠지? 인간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마수가 나타나고 힘 있는 자들이 생겼을 것이다.”
테론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힘 있는 자들은 다름 아닌 우리를 칭하는 것이었으니까.
“그 시기부터 세계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고 마계의 악마들이 넘어온 것이지.”
“그럼 금기란…….”
“마지막 억제기다. 우리는 다른 세계로 갈지언정 어느 정도 힘을 봉인하기로 약속했다. 그것이 바로 금기다.”
테론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던 박한별이 물었다.
“만약 금기가 깨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박한별의 물음에 테론의 인상이 빳빳이 굳어졌다.
“금제가 풀린다.”
“금제라면…….”
“우리의 힘을 억제하는 약속의 힘. 아몬에 의해 금제가 풀려 버렸으니 우리 역시 힘을 온전히 지닌 채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
테론의 말에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마, 아몬 녀석은 금제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알고 있었다면 절대 금제를 풀 일이 없었겠지.”
붉은 용들의 왕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몬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녀석을 바라보던 테론은 고개를 들어 다시 우리에게 말했다.
“지구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가 용들을 보낼 테니.”
“그렇게 되면 지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만약 마계에서 더 이상 악마들을 보내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만, 계속해서 악마를 보낸다면 전쟁터가 되겠지.”
깜짝 놀란 박한별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막을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네놈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녀석들은 아마 꾸준히 준비했던 모양이야. 지구를 점령하고 아마 여기까지 노리려는 수인 것 같다.”
차갑게 내려앉은 테론의 목소리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저희가 어찌해야 합니까?”
“나약한 지구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호한 대답.
그 대답을 들은 천외천 그리고 아버지의 눈빛은 차게 식어 갔다.
“그래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지구인들은 그래도 꾸준히 강해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테론이 한쪽 입꼬리를 진하게 비틀어 올렸다.
“아무리 너희가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다. 보지 않았느냐? 아까와 같은 악마가 70마리는 더 있단 말이다!”
찍어 누르듯 무겁게 내리깔리는 테론의 음성에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완전히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천가의 대표 천태산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알려 주십시오. 이대로 한 세계의 멸망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천태산을 시작으로 천지현 역시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용들의 왕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붉은 용들의 왕께서 조금 도와주시지요.”
벼락 같은 호통이 내리쳤다.
“내가 나서서 금제를 풀란 말이냐! 그럴 순 없다. 내가 지구로 가면 인과에 의해 벌어진 틈으로 악마들이 더욱 쏟아질 뿐이다.”
테론은 단박에 천지현의 청을 거절했다.
본인 같은 강대한 존재가 지구로 넘어가는 순간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반대쪽의 입구를 넓혀 주는 꼴이라나 뭐라나. 어쨌든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일으킬 거라는 소리였다.
우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구가 멸망하는 것도 정말 머지않은 일이었다. 당장에야 입구가 좁아 많은 악마가 한꺼번에 쏟아지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악마가 출현할 거라는 사실은 정해진 결과였다.
이에 만약 지구를 지키기 위해 용들이 일정량 이상 넘어온다면 악마 역시 일정 수 이상 넘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꼴이었다.
테론은 세계선의 틈을 건들이지 않고 균형을 맞출 수 있을 만큼의 용만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굉장히 고마운 일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당장 한국이 전쟁터로 사용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서울은 물론 경기도 강원도 할 것 없이 지역 하나가 날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재수 없을 경우 지키고 싶었던 가문과 박윤식 영감을 단번에 잃을 수도 있었다.
“젠장, 내가 뭣 때문에 힘을 키운 건데.”
정말 이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미래를 많이 바꾼 탓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반 페르데이스를 지구로 데려와 틈을 벌린 탓인가…….
재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미래가 틀어진 이유가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민은 깊어졌다.
천외천과 아버지 역시 심각한 얼굴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좋은 수가 생각나면 당장이라도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생각을 멈춘 일행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뜨거운 활화산 중턱에서 고민을 더해갈 때였다.
나에게 다가온 천지현이 입을 열었다.
“먼저 지구로 돌아가는 것이 우선 아닐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구로 돌아가야, 시간이라도 벌지.”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돌아가서 천가의 인원들을 모으자. 우리 아버지까지 합류하면 확실히 도움이 될…….”
쿠웅.
돌연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음이 일어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분노한 얼굴로 아몬의 시체를 짓밟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껏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마치 소중한 것을 잃고 분노하는 듯한 모습.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아버지의 저 표정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슬픔을 한가득 머금은 분노.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을 본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설마, 아니죠?”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표정은 풀어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내 표정 역시 굳어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천금처럼 굳게 닫혀 있던 아버지의 입술이 움직였다.
“천가의 수호자이자, 전대 흑운 천태백은…….”
쿵.
“죽었다.”
심장이 발아래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갑자기 왜…….
“그게 무슨 개소리야!!”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마음이 동한 것은 역시 그의 하나뿐인 자식 천지현이었다.
천지현은 완전히 눈이 돈 상태로 아버지의 멱살을 잡았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다시 말해 봐!! 당신 지금 상황이 어느 때인데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
그녀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을 쓰며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 않은 채 모두 받아 주었다.
“미안하구나.”
짧은 사과가 천지현의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로 얼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 역시 눈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끓어오를 듯한 분노가 터져 나올 듯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천지현을 떼어 놓으며 물었다.
“아몬에게 당한 겁니까?”
“아니다.”
아버지의 짧은 대답에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태백이다. 어디 가서 쉽게 당할 인물도 아닐뿐더러 위기의 상황에 자기 몸 하나 빼내지 못할 능력자도 아니었다.
비록 부상이 심해 온전한 힘을 사용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웬만한 상황에서는 목숨 정도는 지킬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름 아닌 천가의 이인자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던 천가의 수호자였다.
믿지 못할 상황에, 이어진 음성은 더 충격적이었다.
“천태백을 죽인 것은 천지훈이었다.”
* * *
진정 아닌 진정이 된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드래곤 역시 말없이 우리를 기다려 주고 있었다.
레이드 도중 발생한 천지훈에 관련된 일에 대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천지현은 울다 지쳐 혼절하고 말았다. 나 역시 마찬가지. 멍해진 정신을 되찾을 수 없었다.
나에게 다가온 박한별이 말했다.
“일단 돌아가요. 도윤씨. 돌아가야 수습이라도 하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돌아가지 않는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 될 것이 뻔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마음과 몸이 가지 말라고 다리 가랑이를 붙잡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움직여야만 했다.
붉은 용들의 왕 테론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런 말씀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제가 드린 애커만의 여행일지를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꼭 다시 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 중 이것보다 빠른 방법은 없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테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빌려 주마.”
나는 곧장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단, 내 부탁을 먼저 들어 주려무나.”
테론의 뜻밖의 말에 절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분노에 차 있는 상태였다. 만년 묵은 드래곤의 농담 따위에 어울려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그럼에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것 외에 지구로 돌아갈 방법은 알지 못했으니까.
분노 섞인 대답에 테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하는 녀석들을 데리고 오너라. 아마 너희에게도 썩 나쁜 조건은 아닐 게다.”
테론이 말한 ‘녀석들’은 어이없게도 다른 부족의 용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