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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141화 (141/175)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41화

141. 새로운 구도(3)

목숨의 위협을 받는 와중에도.

“붉은 용들의 왕을 뵙습니다.”

반 페르데이스는 거대한 무릎과 날개를 접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만으로도 테론 페르몬드의 위치를 잘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반 페르데이스의 출신은 레드 드래곤. 가문의 수장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인사를 받은 테론 페르몬드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는 간단한 인사치레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족을 배신한 이유가 무엇이냐?”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배신한 것이 아니다? ……다음 말이 마지막이 되지 않도록 생각하고 지껄이거라. 내 인내심의 길이는 짧다.”

테론 페르몬드는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손 위로 초열의 용암을 불러내기 시작했다. 불타는 화염 구가 스멀스멀 크기를 부풀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만년설을 뒤덮은 반 페르데이스를 녹여 버릴 기세였다. 웬만한 열에는 반응도 하지 않는 만년설이 녹아내리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크윽!”

고통스러워하던 반 페르데이스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언가 결심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제가 어디 갇혀 있었는지 아십니까?”

쿠구구구구.

대지가 진동했다.

정답이 아니라는 듯 분노한 얼굴이었다.

“되묻는 것이냐?”

그 악귀와 같은, 일그러진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반 페르데이스가 입을 열었다.

“삭풍조차 단숨에 얼려 버리는 만년설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레드 드래곤이 말입니다!! 저를 찾기나 하셨습니까?”

테론의 기세에 질세라, 원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에 테론의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감히……!”

테론 페르몬드의 눈이 도마뱀처럼 변했다. 그의 주변으로 태양과도 같은 열기가 뿜어져 나갔다.

반 페르데이스의 철갑 같던 피부가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러나 반 페르데이스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천 년 만에 얻은 귀한 자손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찾지 않으신 겁니까!”

“……반!!”

반 페르데이스의 목숨을 건 반항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악마의 시체를 끌고 온 두 마리의 고룡 중 하나였다.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그는 반 페르데이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다부진 체형의 드래곤의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복잡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얼굴.

자신을 향해 소리친 자를 바라보던 반 페르데이스 역시 지진이 난 듯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어서 사과드리거라!”

“아버지!!”

“어서!!”

레드 드래곤의 특징인지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그의 머리칼 역시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부자의 상봉을 감상하기도 전에 붉은 용들의 왕 테론 페르몬드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이 우리 붉은 용을 포기한 이유더냐?”

정열과 불의 종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싸늘한 음성이었다.

반 페르데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그것은…….”

잠시 뜸 들이던 반 페르데이스가 말을 이었다.

“제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 대한 저의 보답이자, 망가진 신체에 의한 불가결한 선택이었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라.”

이어 반 페르데이스의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자신이 어떻게 타락한 엘프들에 의해 만년설에 갇혔으며, 누구에 의해 구해졌는지. 또, 복구할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 신체 때문에 만년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던 이유까지……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반 페르데이스의 설명이 계속됨에 따라 테론 페르몬드와 카렐 페르데이스는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모든 설명을 마친 반 페르데이스를 빤히 바라보던 테론이 말했다.

“그래서 종족을 버렸단 말이지.”

“염제, 아니 형님!!”

설명을 모두 듣고도 여전히 반 페르데이스가 종족을 버렸다고 말하는 테론에게 카렐이 반발했다.

평소 막역한 사이인지, 카렐 페르데이스는 붉은 용의 왕 테론에게 소리쳤다.

어쩌면 오랜만에 완전히 모습을 바꿔서 나타난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반 페르데이스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초연하게 대답했다.

“예.”

“반! 너 조용히 못 해!!”

“종족을 버린 자에게 어떤 벌이 내려지는지 또한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심장을 망가뜨리지요. 하십시오. 반항하지 않겠습니다.”

“흥. 그것뿐일까.”

“염제!!”

“넌 닥치고 있어!”

처음으로 테론의 호통이 들려왔다.

그의 음성을 들은 인간들의 귀에서는 모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 쓰는 드래곤은 없었다.

“붉은 용의 규율이다. 수장인 내가 규율을 어기라는 말인가!”

웅혼한 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고고한 자태를 유지하던 반 페르데이스의 아버지 카렐은 절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입술을 짓씹는 그의 얼굴에 많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너는 한낱 인간의 개가 되었다. 이는 결코 심장만 망가트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알고 있느냐?”

테론의 진노한 음성이 울렸다.

“……모릅니다.”

“뭐라?”

황당한 대답에 테론의 미간이 꿈틀댔다.

반 페르데이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테도라스 활화산 앞에서 맹세한 붉은 용의 맹약을 잊지 않았습니다.”

“[은혜는 붉은 심장에 각(刻) 해라!].”

“예.”

“은혜는 목숨을 내주더라도 갚으라는 그 구결을 말하는 것이냐? 정녕 나에게 그런 말장난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테론의 음성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더 이상은 말장난을 받아 줄 생각이 없다는 듯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그럼에도 반 페르데이스의 표정은 초연했다.

“붉은 용의 수장이 붉은 용의 맹약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감히!”

테론의 감정이 격해지자, 반 페르데이스의 만년설이 눈에 띄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괴로워하는 반 페르데이스를 본 테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결코 고운 음성이 아니었다.

“둥지 밖에 살더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오냐, 넌 긍지를 지키거라, 난 붉은 용의 규율을 지킬 테니!”

화아악!!

결심한 듯한 테론의 온몸이 불타기 시작했다.

붉은 용들의 왕은 반 페르데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죽거라! 배신자여.”

“안 돼! 반!!”

카렐 페르데이스의 절규가 들려오고…….

테론의 손에선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한 용암이 쏘아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언젠가 반 페르데이스가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은 언젠가 일족을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처음엔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의 종족과 마주칠 일은 희박했다. 아니 솔직히 평생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는 레드 드래곤이 3마리나 서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레드 드래곤이 아닌 고룡 두 마리와 레드 드래곤의 대장이.

지금에서야 나는 반 페르데이스가 어떤 선택을 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종족을 바꾸고.

긍지를 버렸으며.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저는 주인을 섬긴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조차 주인의 긍지를 지켜 주고 있었다.

머리가 망치에 맞은 듯 강하게 울려왔다.

코끝이 시큰하게 올라왔다.

그러나 감동에 물들어 기분을 만끽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염제라 불리는 붉은 용들의 왕이 반 페르데이스를 소멸시키려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결코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화아아아악!

용암보다도 더 뜨거운 용암이 반 페르데이스의 존재를 없애기 위해 쏘아져 나갔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소환 해제.”

순식간에 반 페르데이스가 혹한 군주의 목걸이 안으로 들어왔다.

테론의 용암이 허공을 녹이고…….

동시에 테론 페르몬드의 고개가 돌아갔다.

“뭐 하는 짓이지?”

테론은 단번에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도마뱀 같은, 쫙 찢어진 눈동자를 마주하자 당장이라도 몸이 압축되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안간힘을 써 가며 말을 내뱉었다.

“녀석은 제 것입니다. 크윽!”

온몸이 압축되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더욱 강해졌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견뎌야만 했다.

지금껏 녀석이 희생한 결정들에 반만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는.

[뭐 하는 짓이냐! 죽는다, 주인!! 입조심하란 말이다!!]

머릿속에서 반 페르데이스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시했다.

“감히 위대한 종을 네놈의 개로 삼겠다는 말이냐!!”

“개가 아닙니다. 제 동료입니다.”

“그딴 곳에 가두어 놓고 말이냐? 나를 기만하려는 것이냐!!”

그의 손에 다시 한번 용암 같은 불길이 치솟았다.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날릴 기세였다.

“내가 너희를 살려 준다고는 했지만, 철회할 수도 있다.”

“붉은 용들의 왕이 그리 가벼운 자였습니까?”

“선을 넘는구나. 고통스럽게 목숨만 붙여 놓는 방법도 아주 많다. 다치고 싶지 않거든 녀석을 내놓거라.”

염제의 기운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터져 나왔다.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힘을 풀어도 땅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기왕 인심 쓰는 거 이 친구에게도 쓰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나는 물러날 수 없었다.

솔직히 염제라는 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냥 반 페르데이스는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나를 향해 많은 것을 포기해 준 녀석을 배신할 순 없었으니까.

냉소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욕심이 많구나.”

“그 덕에 이리 강해졌지요.”

나를 빤히 바라보던 테론은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내 앞에서 강함을 논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위대한 종 앞에서 주름잡기는 싫습니다.”

“그런 놈이 반을 속박하고 있느냐?”

“속박이 아니라 동행입니다.”

“말은 잘하는구나.”

“맞습니다. 그러니 제 장점을 살려 협상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 물음에 테론은 다시 한번 실소를 내뱉었다. 왠지 호기심이 생긴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보시지요.”

“아몬의 세 치 혀가 잘린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듣기 싫으셨다면 벌써 제 혀를 녹였겠지요. 아닙니까?”

당당한 물음에 테론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핫! 오냐 들어는 보자꾸나.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 네놈이 뭘 줄 수 있겠느냐. 이건 애초에 성립되지 않을 거래이니라.”

맞는 말이었다. 상대방은 드래곤. 애초에 없는 물건이 거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

나는 번뜩이는 생각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건 어떻습니까?”

내 손에는 애커만의 여행 일지가 들려 있었다.

예상하건대, 테론은 위대한 모험가 애커만에게 큰 호감이 있었다.

역시, 물건을 본 테론의 동공이 흔들렸다.

테론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정녕 애커만의 것이 맞느냐?”

“확실합니다. 애커만의 후예에게 직접 들어 찾은 물건입니다.”

“……눈빛을 보니 확실하겠군. 그런데 저것이 없다면 너희는 지구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여기서 동료를 잃는 것보다야 낫겠죠.”

내 대답에 테론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인이 아닌 반 페르데이스를 지키려 했다는 것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녀석은 내 말에 진위를 파악하는 듯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눈빛을 당당히 받아 냈다.

판단을 내렸는지 녀석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귀한 것을 얻었구나.”

테론이 말함과 동시에, 애커만의 여행일지가 테론의 손으로 이동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왜? 거래하기 싫더냐?”

“아닙니다.”

테론의 물음을 들은 나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저 말은 즉, 반 페르데이스를 살려 준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입꼬리가 귀에 걸린 듯 올라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심을 담은 인사였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진 테론 페르몬드의 말은 충격적이었으니까.

“그냥 살려 주는 것이 아니다.”

“네?”

“녀석이 지구의 인간을 택했다면 그에 맞는 책임을 져야겠지.”

테론은 계속해서 알지 못하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미천한 제 머리로는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다시 한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테론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나와 동료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측은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세계선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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