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35화
135. 대격변(2)
천태백은 울컥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피를 삼키며 앞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 서 있었다.
“너, 너!!”
가문을 배신하고, 손잡아서는 안 될 것과 손을 잡은 천하의 패륜아.
천지훈.
“네, 네 이놈!!”
“영감이 막은 덕에 이놈들이 더 괴로워하잖아!”
클리어를 마친 던전에 난데없이 나타난 천지훈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천태백은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애써 붙잡은 채 주변을 둘러봤다.
“크윽.”
“끄아아아악!!”
주변에는 하나같이 정상적인 녀석이 없었다. 모두 중상 이상의 상처를 입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참담한 광경에 정면을 응시한 천태백이 입술을 짓씹은 채 외쳐 댔다.
“못난 놈! 네놈의 아비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울분을 토하듯 내뱉는 천태백의 말에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날 버렸어. 그리고 그 병신 같은 천진오와 머저리 천도윤을 선택했지.”
천태백은 차분하다 못해 냉랭하기까지 한 천지훈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바라본 천지훈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아니 완전히 바뀌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전의 이미지는 구제 불능 망나니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완전한 악인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게다가 지금 느껴지는 이 무력은…….
한없이 불길하기만 한 기운.
천태백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울컥거리는 혈흔을 다시 삼킨 천태백은 조용히 읊조렸다.
“못난 놈.”
“큭. 그래 맘대로 욕해 봐.”
천태백은 조용히 천지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결심을 굳힌 듯, 피가 흐르는 입을 천천히 떼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구나.”
“뭐라는 거야. 이 영감이. 아, 뒈질 시간을 이야기하는 건가?”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천태백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태산이에겐 미안하지만, 널 이렇게 보낼 순 없겠구나.”
“다 죽어 가는 노인네가. 뒤지려면 곱게 뒤져.”
그때였다.
천태백이 돌연 자신의 심장을 꿰뚫은 천지훈의 손을 잡았다. 질척한 느낌의 손을 느낀 천지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더러운 오물이 몸에 닿았다는 혐오의 눈빛이었다.
“이거 안 놔?”
“같이 가자꾸나.”
“뭐?”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천태백.
그 순간 천태백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후욱-!
가장 먼저 변한 것은 다리였다.
스스스슥!
땅으로부터 검은색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천태백의 다리를 덮쳤다. 다리는 곧 검은색으로 변했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든 검은 힘은 차례차례 그 범위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다리를 타고 올라와 몸으로, 몸에서 팔과 얼굴로, 그리고 마침내 머리끝까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천태백의 몸을 덮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사용하는 힘 흑운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흑운은 마치 시전자의 몸을 집어삼키기라도 하듯 게걸스럽게 천태백의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내 온몸을 검은색으로 떡칠한 천태백이 입을 열었다.
“내 마지막이 조카와 함께라니 쓸쓸하진 않겠구나.”
그륵거리는 천태백의 목소리. 그것은 얼핏 듣기에도 좋아 보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내뿜는 기운은 진짜였다. 이제껏 본 적도 없는 강대한 기운.
마치 몸을 재물로 힘을 얻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당신 지금……!”
천지훈의 얼굴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시간이 없다고. 잔말 말고 따라오거라.”
천태백의 몸을 모두 휘감고 있던 흑운이 손을 타고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가슴을 꿰뚫은 천지훈의 손을 타고 계속해서 그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처음으로 천지훈의 비명이 들려왔다.
천지훈은 손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천태백의 우악스러운 손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검게 물든 눈동자로 천지훈을 매섭게 노려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너의 업보다. 짊어지거라.”
“미친 새끼가!!”
천지훈의 뇌룡이 천태백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그러나 천태백의 몸을 감싼 흑운은 그 매서운 공격마저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모습이었다.
“이게 어떻게?”
천지훈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계속해서 몸을 집어삼키는 흑운을 떨쳐 내기 위해 발악했다. 그러나 그 어떤 공격에도 천태백은 천지훈의 손을 잡은 채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내 흑운이 천지훈의 전신을 덮었다.
* * *
“그륵.”
저 멀리 먹물을 뒤집어쓴 두 명의 사내가 있었다.
천승현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자신 외의 모든 단원은 조금 전 천지훈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허망한 죽음. 하지만 분노가 치밀기에는 상황이 긴박해 보였다.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이의 목숨 역시 간당간당해 보이는 상태였다.
흑운 천태백은 마치 자신을 불태워 적과 함께 사라질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평소와는 다른 흑운의 기운이 천지훈의 전신을 모두 덮고 나자, 회전했기 때문이었다.
“미친……!”
천승현은 욕설을 내뱉었다.
흑운은 마치 분쇄기처럼 맹렬한 속도로 돌기 시작했다. 천승현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소용돌이처럼 돌기 시작한 흑운을 뚫고 거대한 비명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지독한 비명이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하나. 단 하나였다. 보고 있기만 해도 고통이 밀려올 정도로 아찔한 상황에 들려오는 비명의 수가!
“……!”
천승현은 경악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 천태백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분명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이가 천지훈이라는 소리였다.
“다 죽어 가던 노인네가…….”
천태백은 저런 상황에서조차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그 고강한 정신력에 혀가 내둘러질 지경이었다.
후두둑.
흑운을 뚫고 핏방울들이 날리기 시작했다. 맹렬히 회전하는 흑운 사이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양의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천승현은 아찔한 장면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움직임을 멈춘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서서히 멈춰 선 흑운은 점점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회전이 멈추며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기술의 시전자였던 천태백이었다.
“단장님!!”
천승현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천태백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온몸이 찢기다시피 했고, 피를 어찌나 흘렸는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솔직히 살아 있다고 볼 수 없는 몰골이었다.
털썩.
천태백의 육신이 무너져 내렸다.
그 순간 천승현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상상하기 싫었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아, 안 돼!!”
바닥에 쓰러진 천태백을 수습하기 위해 천승현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점점 거두어지는 흑운.
그 사이로 천지훈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천태백과는 달리……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꼿꼿이 서 있는 천지훈.
“어떻게……?”
천승현은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천지훈은 손에 묻은 천태백의 피를 툭툭 털고는 천승현에게 물었다.
“크큭. 왜? 신기해? 다 연기였는데.”
천승현은 말을 잇지 못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게, 무슨…….”
온전한 천지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게도 천지훈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천승현은 사고가 완전히 멈춘 듯한 느낌이었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천지훈은 킥킥대며 천승현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천승현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공포가 해일처럼 몰려들어왔다. 지금 드는 생각은 단 하나뿐이었다.
‘죽는다!’
흑운 천태백을 가볍게 농락했던 녀석이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지훈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천승현은 그에 맞춰 한 발 두 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발자국이 고작이었다.
한 발짝을 더 떼려는 순간, 어느새 천지훈이 눈앞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얼굴인데. 너도 우리 가문 사람이었나?”
천승현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넵! 그렇습니다!!”
천승현은 군대에 막 전입한 신병처럼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포가 전신을 집어삼킨 것이다. 지금 천승현은 그 어떠한 자존심도 부릴 수 없었다. 적에게 자존심을 굽히느니 죽고 말겠다는 그의 신념은 무너진 지 오래였다. 조금이라도 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 근데 어쩌지? 나는 가문을 버린 지 오랜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버려진 거지.”
천지훈의 눈빛에 진한 살기가 배어들기 시작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천승현은 몸을 잘게 떨었다. 그만큼 천지훈이 내뿜는 죽음의 공포는 압도적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천승현은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천지훈은 그런 천승현을 보며 킥하며 웃어 대기 시작했다.
“천하의 천가도 많이 죽었네. 이런 새끼를 가문에 내버려 두고 말이야.”
천지훈의 말에 천승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 행동했으면 안 됐나?’, ‘더 당당하게 굴었어야 했나?’, ‘아니, 어차피 저 녀석은 다 죽일 생각이었겠지?’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천승현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다.
“크큭. 아주 맘에 들어.”
이어진 천지훈의 목소리를 듣고, 천승현은 어이없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어떻게 해야 살아나갈 수 있을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가, 감사합니다!!”
빠릿빠릿한 대답에 천지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다!’
동시에 천승현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살려 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던전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천승현.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천지훈의 반응은 썩 좋지 않았다. 천지훈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차피 죽일 건데.”
“……!”
일순 천승현은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오금이 저리기 시작했다.
“크큭. 장난이야. 장난. 어차피 말 전할 사람은 필요해서 한 명은 살려 두려고 했어.”
놀리듯 웃은 천지훈은 당황한 천승현을 두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이야기를 계속해서 지껄이기 시작했다.
“이제 복수의 시작인데 녀석들도 긴장을 좀 해야 하지 않겠어?”
천지훈은 재밌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웃고 있었다.
반면, 천승현은 천지훈이 말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복수의 시작이라니, 그게 무슨…….”
“알 필요 없어. 그냥 넌 내가 시키는 일만 하면 돼.”
천지훈은 천천히 천승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움찔 떠는 천승현을 재밌다는 듯 바라본 그가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하기 시작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아버지에게 전해. 하나도 빠짐없이 말이야.”
맹수 앞에 놓인 사냥감처럼 천승현의 목덜미가 빳빳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