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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113화 (113/175)
  •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13화

    113. 변화(3)

    새하얀 방.

    그곳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여자를 죽여!”

    “눈앞의 여자를 죽여!”

    “눈앞의 여자를 죽여!”

    “…….”

    가래 끓는 듯한 거북한 목소리에 미간이 구겨졌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천천히 돌아온 시야에 박한별이 들어왔다.

    명령에 맞춰 박한별을 죽이고야 말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생존 욕구처럼 너무나도 강력한 갈증. 나는 힘을 일으켰다.

    ‘죽여야 한다!’

    떨쳐 낼 수 없는 명령.

    그저 명령에 온전히 굴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왜 이러세요. 도윤 씨!”

    내가 이상해지기라도 했다는 듯 말하는 박한별의 목소리가 역하게 느껴졌다.

    ‘당신도 나를 공격했으면서…… 왜 날 이상하게 보는 거야.’

    그녀의 적반하장의 태도에 분노가 일었다.

    ‘역시 당신은 죽어야 해.’

    머릿속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명령과 생각이 일치되는 순간이었다.

    츠팟-!

    나는 박한별을 향해 도약했다.

    “도윤 씨!”

    “죽어!!”

    회전하는 흑운의 힘을 박한별을 향해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특성 ‘천가의 피’가 발동합니다.]

    [칭호 ‘위대한 모험가’가 발동합니다.]

    돌연 날아드는 메시지.

    툭.

    일순, 안개가 걷히듯 정신이 맑아졌다.

    [‘최면’ 상태가 해제됩니다.]

    그리고…….

    투쾅-!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박한별의 공격에 의해 바닥에 처박힌 나는 피를 토했다.

    박한별의 공격이 이어졌다.

    “더럽게 아프네. 한별 씨, 잠깐…… 잠깐만!”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도윤 씨!”

    투쾅.

    박한별의 도깨비방망이가 바닥을 파괴했다.

    “정신 차렸으니까…… 이제 그만!”

    “네?”

    그제야, 박한별의 도깨비방망이가 우뚝 멈춰 섰다.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박한별.

    그 의도를 느낀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정말입니다.”

    “정말이에요?”

    “네.”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박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돌아온 것 같네요.”

    박한별이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둔 순간, 옆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문어 어인의 목소리였다.

    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하찮은 인간이라서.”

    짧게 대답한 나는 박한별에게 말했다.

    “당분간 칭호를 위대한 모험가로 바꾸세요.”

    “네? 그건 갑자기 왜……? 아!”

    의문점을 갖던 박한별이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알겠어요.”

    긴말하지 않아도 되는 박한별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웃었다. 순식간에 박한별의 기운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신화급 칭호 이매망량(魑魅魍魎)을 비활성화하고 위대한 모험가를 선택한 결과였다.

    힘이 줄어들지라도 지금은 이쪽이 훨씬 안전했다.

    저 녀석에게 정신지배를 당하는 순간,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몰랐으니까.

    “이제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네.”

    짧게 대답한 박한별은 문어 어인을 바라봤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박한별에게 다시 최면을 시도했던 문어 어인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어떻게……?”

    “이젠 안 통해.”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녀석을 바라봤다.

    해저 도시에 들어오면서 얻게 된 새로운 칭호 ‘위대한 모험가’에는 특수한 능력이 있었다.

    상태 이상 면역 80퍼센트에 공포 완전 면역.

    이 사기적인 칭호를 사용해 최면에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각오해라.”

    잠깐이지만 정신이 누군가에게 지배당했다는 것이 기분 나빠진 나는 문어 어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 잠깐!”

    “어인들은 싸우는 중에 휴식 시간도 가지나?”

    싸늘해진 시선으로 흑운의 힘을 끌어올렸다. 어느새 옆에 선 박한별 역시 냉혈한 시선으로 문어 어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쿠웅-!

    육중한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션!!”

    “라미르 괜찮나?”

    어느새 다가온 션이 문어 어인의 앞에 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암살이를 바라봤다. 암살이는 새로 나타난 어인과 전투를 하는 중이었다. 부하를 미끼로 던지고 달려온 것이다. 션이 소리쳤다.

    “인간들이 왜 끼어드는 것이냐!”

    “말했을 텐데, 인간 세계에 위협이 된다고.”

    “흥, 네놈들이 아무리 막아 봐야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션은 그 자리에 우뚝 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시간을 끌기만 하면 해저 도시 아틀리안을 정복한 반란군이 도착할 테고, 힘을 합쳐 수로 밀어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녀석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박한별에게 말했다.

    “시간을 끌면 불리합니다.”

    내 시선을 따라 광장 쪽을 바라본 박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 보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반란군들의 최면을 깨워야죠.”

    “어떻게요?”

    라미르라 불린 문어 어인의 최면실은 물리적인 힘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릅니다.”

    “뭐라고요?”

    “일단, 저 녀석들을 부탁합니다.”

    “지, 지금!”

    “암살아, 이번에는 놓치지 말고 잘 맡아!”

    조금 전 과오를 되짚듯 음산한 기운을 내뱉은 암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한별과 적을 처치하고 돌아온 암살이에게 션과 라미르를 맡긴 나는 자리를 옮겼다.

    광장 안. 그곳에서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어인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참담한 전장을 본 나는 미간을 구긴 채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상태 이상을 다른 상태 이상 스킬로 덮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 그 작은 가정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흠…… 또 다른 상태 이상이라…….”

    중독?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만에 하나 통하지 않는다면 어인들을 사지로 몰아내는 셈밖에 되질 않았다.

    수면? 최면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었지만, 그만큼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것.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많은 어인들을 잠재울 능력도 없고…….’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최면 상태를 완벽히 풀어 버리고도 어인들이 멀쩡한 상태 이상…….

    ‘역시, 불가능한 건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때, 한 가지 이미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최면이 풀리고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켰던 상태창. 그 안에 쓰여 있던 것이었다.

    [위대한 모험가]

    그 상세 내용에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태 이상 면역 80퍼센트, 공포 완전 면역

    내가 주목한 것은 뒤에 쓰여 있는 문구였다.

    공포.

    강력한 상태 이상으로, 포식자 앞에 선 먹잇감처럼 상대방을 얼어붙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사용자와의 격차가 심하면 심할수록 혼절하거나 실금을 하는 등 다양한 반응이 나오는 상태 이상.

    나는 이 공포가 최면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광장 아래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어인들을 한순간에 얼어붙게 할 녀석을 알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다.”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고오오오오.

    정확히 말하면 가슴에 걸린 ‘혹한 군주의 목걸이’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푸른빛이 목걸이를 감싸고…… 웅혼한 빛이 터져 나왔다.

    어찌나 그 범위가 넓던지, 전쟁을 치르던 어인들의 고개마저 한쪽으로 쏠렸다.

    푸른 안광.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것처럼 밝고 투명한 피부.

    영험한 기운을 풍기는 반 페르데이스가 그들을 한심한 듯 내려 보고 있었다.

    “저, 저건!”

    “드, 드래곤?”

    “왜 저런 존재가?”

    “위대한 종이 왜 해저 도시에…….”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에 어인들은 당황했다.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크게 요동치는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난 오랜만에 바깥세상에 나온 반 페르데이스를 향해 말했다.

    “반, 뭘 해야 할지 알지?”

    만년설을 뒤덮은 드래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나는 그에 맞춰 귀를 틀어막았다.

    “콰라라라락!!”

    고막을 찢을 듯한 괴성이 해저 도시 전체를 덮었다.

    귀를 틀어막고 혼절하는 어인들이 속속히 나오기 시작했다.

    드래곤 피어.

    어지간히 격이 높지 않고서야, 모든 종의 정점에 서 있는 드래곤의 피어를 막아 내기는 불가능했다.

    산맥을 호령하는 산군일지라도 한낱 강아지 새끼로 만들어 버리는 드래곤 피어는 듣는 이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 페르데이스에게 한 번 더 드래곤 피어를 시전할 것을 명령했다.

    콰라라라락!!

    조금 전보다 더욱 웅장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최면에 걸렸던 어인들은 생기있는 눈을 되찾았다.

    “어? 내가 왜?”

    “뭐야…… 지금. 내 손이 왜…….”

    “야, 우리가 왜 싸우고 있는 거야…….”

    혼란스러워하는 반란군들.

    반란군들을 향해 삼지창을 내지르던 기사들 역시 어리둥절한 건 마찬가지였다.

    번쩍, 정신이라도 든 듯 무기를 내리는 반란군들.

    갈 곳을 잃은 삼지창. 목적을 잃은 싸움. 전쟁의 참가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재빠르게 도깨비 보따리를 열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좁은 입구 사이로 거대한 어인 하나가 튀어나왔다.

    해저 도시 아틀리안의 영웅. 전설로 내려오는 위대한 모험가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한 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박물관장 지테일 아니야?”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저 모습은…….”

    어인들의 시선이 단번에 지테일에게 쏠렸다.

    박물관에서만 보던 유물을 모두 착용한 채 갑자기 나타난 어인. 전설로만 듣던 드래곤의 위에 타 있는 모습은 어인들이 어린 시절 매일같이 상상했던 위대한 모험가의 모습과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반 페르데이스의 머리 위에 올라선 지테일을 본 젊은 어인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애커만…….”

    그 작은 중얼거림은 도화선이 되어 퍼져 나갔고, 이내 함성이 되었다.

    “애커만!! 애커만!!”

    “위대한 여행자여!!”

    어느새 환호성이 되어 버린 외침. 반 페르데이스의 머리 위에 서 있는 지테일은 썩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쟁을 막기 위해 목숨처럼 아끼던 애커만의 유물들을 착용한 채 보따리에서 나왔는데 모든 상황이 끝나 있으니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보고 애커만이라 환호하는데…….’

    퍽 난감하겠지.

    “여러분 저는 애커만이 아니라…….”

    “애커만!! 애커만!!”

    “위대한 모험자!!”

    변명하려던 지테일은 함성에 묻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황하는 지테일의 모습을 본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인간, 이것 좀 어떻게 해 봐…….”

    울먹이기까지 하는 지테일을 보며 큭큭대던 나는 겨우 표정을 다잡은 뒤 말했다.

    “나는 분명 말했었다. 너희의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이만큼 도와줬으면 된 거 아닌가?”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표정을 굳힌 내가 묻자, 지테일은 당황했다.

    딱딱히 굳은 내 표정과 발아래 어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지테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이제야 내 말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해저 도시를 통치하던 녀석은 죽었다. 서로에게 칼을 들이미는 전쟁이 끝났다.

    현재 해저 도시는 혼란 그 자체. 최면에 걸렸었던 어인들도 조금 더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혼란은 더욱 가중될 터였다.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하고 견고한 구심점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을 지테일은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자가 누구인지도 이미 알고 있겠지…….’

    이제 선택은 지테일의 몫이었다.

    당당히 아틀리안을 짊어지거나…… 모른 척 도망가거나.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들이마신 지테일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노린 것이었나?”

    “뭐…… 반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션에게 해저 도시가 넘어가는 것보다 이편이 100배는 인간들에게 이로울 테니까.

    나를 잠시 노려보던 지테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움과 얄미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상황을 넘긴 나에게 지테일이 물었다.

    “인간, 미안하지만, 너희들의 공을 가로채도 되겠나?”

    진중한 물음. 녀석의 다음 행동을 어느 정도 눈치챈 나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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