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04화
104. 해저 도시(2)
“대단하네요, 한별 씨.”
“저도 통할 줄은 몰랐어요. 잘 받아 준 도윤 씨 덕이죠.”
박한별은 미소를 지은 채 속삭이며 엄지를 추켜세웠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피식 웃고 말았다. 많이 뻔뻔해진 박한별의 모습에서 고대 도깨비들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겹쳐 보인 탓이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예?”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곧 도착이네요.”
“그러게요. 왠지 두근거리는데요?”
박한별의 기대감 넘치는 모습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의 공간이라 그런지 확실히 가슴을 몽글하게 만드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적진인 걸 잊지는 마십시오.”
“알겠어요.”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앞서 가던 정찰병들이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래, 자네도 수고했네.”
나는 문어 어인에게 그간의 수고를 치하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인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고, 바라는 게 잔뜩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채 고개를 들었다.
“흠흠. 내 지금은 가진 것이 없어 지금은 이대로 갈 수밖에 없지만, 절대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걸세.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데모스라고 합니다.”
“데모스라…… 똑똑히 기억해 두겠네.”
몇 번이고 이름을 중얼거리는 나를 본 데모스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의 계획이 딱 들어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멍청하게도,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은 조금도 자각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우리는 속내를 숨긴 채 문어 어인 데모스와 작별한 뒤, 해저 도시 안으로 향했다.
띠링.
[최초로 해저 도시 ‘아틀리안’을 발견했습니다.]
[칭호 ‘위대한 모험가’를 획득합니다.]
첫걸음부터 기분 좋은 신호였다.
드디어 텅텅 비어 있었던 칭호 칸을 채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잔잔히 올라가는 입꼬리를 뒤로한 채, 박한별에게 물었다.
“한별 씨도 칭호 얻으셨나요?”
“네, 위대한 모험가라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얻었다면 동승자인 그녀도 얻었을 터.
왠지 모를 씁쓸함을 뒤로한 채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천도윤]
레벨: 오류
칭호: 위대한 모험가 - 유니크
특성: 천가의 피 – 전설
스킬: 활력 – 신화
레벨은 여전히 오류였고, 칭호 칸은 유니크 등급의 ‘위대한 모험가’가 박혀 있었다. 나는 칭호에 대한 상세 페이지를 열람했다.
[위대한 모험가]
-당신은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이는 대단한 업적이며, 수많은 고난을 헤쳐 나간 이에게만 허락된 일일 것입니다.
위대한 모험가에게 더 이상 두려움은 없습니다.
-상태 이상 면역 80퍼센트, 공포 완전 면역.
세부 내용을 확인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썩 마음에 드는 칭호였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한들 상태 이상 부분은 조금 다른 문제였으니까.
공포, 환각, 중독 등 상태 이상은 아무리 약한 것일지라도 변수를 만들어 내기엔 충분한 능력들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일신의 무력을 완전히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을 80퍼센트나 막아 준다니, 정신계통의 면역이 전혀 없는 나에게는 사기템을 얻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마음에 드네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능력치가 좋은데요?”
박한별 역시 칭호에 대한 상세 내용을 확인했는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해저 도시를 걷기 시작했다.
해저 도시 안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어린 인어들이 자유롭게 헤엄쳐 다니고 있었고, 잡화상, 대장간, 음식점 등 수많은 상점이 즐비해 있었다.
외형을 제외하고 보면 인간 세상과 그리 다른 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곳이었다.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요?”
주변을 둘러본 박한별은 짐짓 심각해진 말투로 내게 물었다.
“뭐가요?”
“어인들은 모두 사납고 해악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어찌 됐건 그들은 몬스터니까요.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
“인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요?”
“……네.”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한별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같지도 않을 거예요.”
“그게 무슨…….”
나는 의문을 표하는 박한별에게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우악스러운 외모를 자랑하는 어인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기를 들지 않은 선두와 후미의 손에는 밧줄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저건…….”
“예, 노예들일 겁니다.”
우람한 그들의 덩치와는 달리 그들이 지키듯 서 있는 존재들은 나약해 보이기 그지없는 어린 어인들이었다.
“저런 미친……!”
“진정하세요.”
“그래도 너무하잖…….”
“지금 난장을 피우면 위험해지는 것은 우리입니다.”
박한별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한별 씨, 이거…….”
나는 불안하게 일렁이는 도깨비불을 가리켰다. 온몸을 둘러싼 도깨비불이 박한별의 분노에 동요라도 하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박한별은 깜짝 놀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온 힘을 집중해 도깨비불을 진정시킨 그녀는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어머! 도윤 씨, 미안해요.”
“혹시, 제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왔습니까?”
“아니요. 그건 아닌데…….”
뒷말을 흐리는 그녀에게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어떻게 변했었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박한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흔들렸어요. 마치 컴퓨터가 고장 난 것처럼.”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누가 지켜보는 것 같네요.”
나는 날카롭게 날아드는 하나의 시선을 느끼며 도시의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유통업자인 야센은 기쁜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오늘 잡아들인 상품은 모두 특등상품에 해당하는 노예였기 때문이었다.
“장막처럼 막혀 있던 해저의 통로가 뚫린 게 신의 한 수였지.”
유통업자 야센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야센은 여느 때처럼 도시 밖 은밀한 곳에서 사냥꾼들과 접촉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방랑자 중 젊은 녀석들만 골라 데려올 것을 지시한 야센은 사냥꾼들과 헤어지기 전,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우연히 위쪽을 바라본 것이 시작이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봐도 경계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느낀 야센은 동료 사냥꾼들에게 물었다.
-야, 저기 이상하지 않냐?
-뭐가?
-잘 봐, 경계가 안 보이잖아.
-어? 정말이네?
야센의 말을 들은 사냥꾼들은 모두 의아함을 느끼며 경계가 있던 자리를 바라봤다.
-나가 보자.
-뭐? 위험한 거 아니야?
-너 사냥꾼 맞냐?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야센의 도발에 사냥꾼들은 모두 경계 밖으로 나섰고, 해저 깊은 곳으로부터 점점 올라온 어인들은 마침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어? 저기!
어인 중 가장 시력이 좋은 돛새치 어인이 커다란 뿌리로 한 곳을 가리켰다.
사냥꾼들과 야센은 돛새치 어인의 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감탄했다. 그곳에는 상상치도 못했던 생물이 살고 있었다.
인간!
전설 속에서나 전해 듣던 인간들이 반쯤 옷을 벗은 채, 신나게 뛰어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중에는 물 안에 들어와 이상한 판 위에 올라가 파도를 타고 있는 인간들도 있었다.
그 환상적인 장면을 본 야센은 눈을 밝혔다.
-대박이다!
그는 야욕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야센의 눈에는 저 생물들이 모두 흑진주이자 금덩이로 보였다. 마치 심해광산을 발견한 위대한 모험자 애커만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냥꾼들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가장 먼저 인간을 발견한 돛새치 어인은 휘파람을 크게 불었다.
-야센, 나랑 같은 생각이지?
-물론.
야센은 돛새치 어인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단 맛부터 봐야 하지 않겠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상어 어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축 늘어진 인간을 물고 돌아왔다.
물을 잔뜩 마셔 배가 볼록 튀어나온 인간.
기절한 인간을 탐스럽게 바라보던 어인들은 동시에 입을 벌렸다.
-으웩.
-생각보다 맛이 없군.
-귀한 것을 입속으로 집어넣는 녀석들이 없을 테니 오히려 좋은 것 아닌가?
-그렇지.
눈을 밝힌 사냥꾼들과 야센은 광소를 터트렸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녀석들의 가치는 더욱 빛이 날 것이다라고 말하며 황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한 녀석들은 모조리 죽이고, 젊은 녀석들은 모두 포획해! 나는 웃돈을 주고서라도 인어들에게 아가미를 살 테니까.
-그래, 그동안 조금 즐기고 있어도 되겠지?
-물론.
야센은 싱글벙글 웃으며 왕국으로 돌아갔다.
* * *
인어에게 얻은 아가미는 모두 15개.
이를 전해들은 어인들은 열다섯 명의 인간들만 선별한 뒤, 인간들을 모조리 죽이기 시작했다.
삼지창으로 배를 꿰뚫고, 물로 작살을 만들어 인간들을 명중시켰다.
그 와중에 더러운 오물 녀석들이 튀어나와 방해하긴 했지만 그들의 유희를 멈출 수는 없었다.
사냥꾼들이 즐기건 말건, 15명의 인간을 포획한 야센은 인간들에게 모두 인어의 아가미를 붙인 뒤, 바닷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살려 달라는 애절한 절규를 짓씹듯 무시한 야센은 오히려 인간을 협박했다.
이동 중 소리를 지르거나, 방해하는 인간이 있다면 당장 쳐 죽일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입을 꾹 다문 인간들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바라본 야센은 정찰병들의 눈을 피하고, 경비병들에게 웃돈을 찔러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후, 끝났다.
이제부터 리스크는 없었다.
야센은 자신만의 비밀 창고에 갇힌 열다섯의 인간을 바라봤다.
내일모레면 그 어느 노예보다 비싸게 팔릴 녀석들.
자신을 돈방석에 데려다줄 녀석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야센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창고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제2 사냥조가 돌아올 시간이었으니까.
사냥조가 데려온 귀한 노예들을 지키는 것 또한 야센의 임무였다.
불법과 합법을 오가는 일을 하는 만큼, 노예들을 노리는 패거리가 적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습격을 당할지 모르는 사냥조와 노예를 지키는 것이 야센의 주된 임무였다.
야센은 야탑에 올라가 저 멀리 노예를 끌고 오는 제2 사냥조와 그의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는 녀석이 있다면 재빨리 조치해야만 함으로…….
매서운 눈으로 광장까지 들어온 사냥조를 살피던 야센의 눈에 한 쌍의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여성으로 보이는 어인이 희미하지만, 확실한 살기를 내비쳤고. 이어 옆에 있던 어인의 존재가 흔들렸다.
“존재가 흔들려?”
야센은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도 믿기지 않는 현상을 빤히 바라보며 경계심을 올렸다.
무언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으슥한 골목으로 사라지는 녀석들의 뒤를 밟기 위해 건물 위를 뛰어다니고 있을 때였다.
등 뒤로 스산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내 목을 콱,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뒤를 돌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생겼다.
“누구십니까?”
“내가 묻고 싶은 말이군. 너는 누구지? 왜 우리를 따라오고 있나?”
야센은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