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98화
98. 페이즈(3)
세계는 떠들썩하게 변해 있었다.
모든 플레이어에게 전달된 메시지.
페이즈 2로 돌입한다는 메시지는 전 세계의 방향을 크게 뒤바꿔 놓았다.
“페이즈 2라니 대체 무슨…….”
“야야, 저기…….”
“갑자기 왜…… 헉!”
명동에서 대화를 나누던 플레이어 두 명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캬아아아악!!”
전조도 없는 던전 브레이크.
두 명의 플레이어는 그대로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든 채 전투 자세를 취했다.
“갑자기 뭔 일이야! 명동 한복판에 던전 브레이크라니.”
“그러니까, 설마 조금 전 알림음과 관련이 있던 건…….”
“일단, 피해!”
콰앙-!
두 명의 플레이어 가 있던 아스팔트 바닥이 산산조각 부서졌다.
“트롤이야.”
만화나 소설 속에는 자주 등장하지만, 던전 안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트롤 수백 마리가 서울의 중심지를 마구잡이로 활개 치고 있었다.
트롤의 존재를 확인한 플레이어 하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다행히 몰려다니며 사냥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을 거야. 시간만 잘 끌면 돼. 여기는 대형 길드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곧…….”
퍼억.
플레이어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동료에게 트롤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던 남자의 목숨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전방을 주시하며 경계하긴 했지만, 후면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결과였다.
트롤이 던진 거대한 몽둥이에 머리가 날아간 플레이어는 온몸이 허물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동료 플레이어는 그대로 넋이 나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트롤은 익히 알고 있던 몬스터 중 하나였다.
C등급쯤 되는 플레이어라면 트롤 몇 마리쯤은 너끈히 상대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고 B등급은 열 마리가 넘는 트롤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단 한방에 즉사하고 말았다.
B등급의 플레이어가!
넋이 나간 플레이어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트롤을 바라봤다.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이었다. 거대한 몸집만큼이나 거대한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트롤이 햇빛을 가리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어…… 어.”
발이 굳은 플레이어는 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단지 형형한 눈빛으로 입맛을 다시는 트롤의 입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트롤의 지독한 악취가 코끝을 찔러 댔다. 바닥에 침이 툭 떨어지며 치이익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플레이어는 느낄 수 있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부웅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몽둥이가 휘둘러졌다. 단숨에 목숨을 끊으려는 듯 몰아치는 강력한 소리와 함께!
플레이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
지독하리만큼 끔찍한 파육음이 찾아들고, 고통에 몸부림칠 미래가 빠르게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대한 신의 보상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무 빨리 죽어 버려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걸까?
플레이어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떴다. 그러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후세계가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신을 맛있는 먹이를 보듯 혀를 날름거리던 녀석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을 따라 하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 빳빳이 굳어 있었다.
들려오는 것은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괜찮습니까?”
트롤을 앞에 둔, 사내가 뒤를 돌아 물었다.
몬스터를 앞에 두고 하기에는 위험천만한 행동. 그러나 목숨을 건진 플레이어가 든 감정은 안도였다.
어째선지, 트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맹수 앞 초식동물이라도 된 듯 온몸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네, 네…….”
“다치지는 않은 것 같으니, 몸을 숨기고 계세요. 금방 다시 찾아올 테니까.”
사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다시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걷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걷는 듯 보였지만,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사내가 트롤의 옆을 지나가자, 트롤이 무너졌다. 무너졌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트롤은 실 풀린 인형처럼 맥없이 허물어졌다.
다른 몬스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트롤은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다.
목숨을 구한 플레이어는 입을 떡 벌린 채 그를 바라봤다.
“허…….”
아무리 봐도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비록 이번에 각성을 했고, 어디 가서 높은 등급이라고 자랑하고 다니기에도 애매한 C등급의 헌터였지만, 분명 눈앞의 헌터는 차원이 다른 실력자였다.
‘A급? 아니다. 최소 S급은 되어야…….’
머릿속으로 그의 등급을 가늠하던 플레이어는 멈칫했다.
그는 많은 시민을 구하고 있었다. 목숨을 잃기 바로 전 목숨이 건져지는 사람들 또한 많이 있었다. 그런데 왜…….
저자가 말을 건 시민은 오직 하나였다. 바로 자신. 이 점도 의아하기 그지없는데 또 기다리라고 말했다. 플레이어는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기다려야겠지?”
혈흔이 낭자 하는 명동 한복판에서, 갓 플레이어가 된 헌터 서현우는 의아한 얼굴을 품은 채 서 있었다.
* * *
“다 정리됐나요?”
“네.”
자리로 돌아온 박한별은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상황이 너무 급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괜히 저 때문에 그런 건 아닌지…….”
나는 박한별의 표정이 왜 어두워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고민은 나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바로 신화등급을 가진 자가 일정 숫자를 넘어서면서 발동된 페이즈 2. 그 원인이 바로 자신이라고 자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도 괜히 찝찝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건 우리의 탓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
우리가 조금 빨리 알을 깨뜨렸을 뿐이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신화급 특성은 한별 씨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까요.”
“그건 알고 있지만, 아, 혹시 도윤 씨도 갖고 있나요……?”
알림창에는 분명 신화등급을 가진 플레이어가 다섯을 넘어섰다고 했다.
신화등급을 가진 플레이어 다섯이 페이즈 2의 발동 조건이라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녀석들이 있었다는 소리였다.
최소 세 명. 많게는 네 명.
인버스 타워에서 지구로 돌아올 때, 나와 박한별이 카운팅 되었을 테니까, 현재 신화등급을 가진 플레이어는 지구 전체를 통틀어 5명에서 6명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한별은 다시 한번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조용히 바뀐 상태창을 살피기 시작했다.
[천도윤]
레벨: 오류
호칭: 없음
특성: 천가의 피 – 전설
스킬: 활력 – 신화
단출하기 그지없는 상태창.
눈에 띄게 바뀐 점이라면 활력이 신화등급으로 바뀌면서 호칭이 새로 생겨났다는 점과 레벨 시스템이 도입되었다는 것이었다.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레벨이 생겨난 것이다.
“레벨은 오직 소환수들에게만 적용되는 시스템인 줄 알았는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슬리는 단어 때문이었다. 오류라고 뜨는 것은 오직 나만의 문제였다. 박한별은 고스란히 레벨이 나와 있었고, 오며 가며 확인한 녀석들 모두 버젓이 레벨이 표기되어 있었다.
감히 예측해 보자면, 회귀로 인해 중복되는 시간이 생겨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뿐이었다.
“도윤 씨도요? 아 하긴, 도윤 씨라면…….”
박한별은 내가 신화등급의 스킬을 가졌다는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나라면 뭔가 대단한 비장의 한 수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녀와 마고가 수련 중일 때, 청화의 불꽃을 뺏었다고는…….
“크흠.”
소환수들의 격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속성을 뺏기 위해 죽을 듯 맞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히도, 그저 유심히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자연스레 능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확실히 편리해졌어.’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도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청화의 불꽃을 흡수했던 때를 회상했다.
도깨비불. 그중에서도 최상의 불꽃을 자랑하는 청화(靑火)는 레드 드래곤조차 탐낼 만큼 격 높은 불꽃이었다.
마고가 열심히 침을 튀겨 가며, 박한별에게 청화에 대한 강의를 할 때였다.
[청화(靑火) - (신화)를 흡수했습니다.]
문득 들려오는 알림음.
그리고 연이어 들려오는 미친 특전.
[속성이 추가됩니다.]
[청화의 푸른 불꽃이 만년설의 진정한 힘을 깨웁니다.]
[만년설의 등급이 올랐습니다.]
[신화급 속성을 두 가지 획득하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속성의 격에 맞춰, 스킬 ‘활력’의 등급이 올라갑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단숨에 두 개의 신화급 속성을 얻었다는데, 넋이 나가지 않는 플레이어가 어디에 있겠는가.
구석에 앉아, 박한별과 마고를 바라보며 실실 웃고 있을 때, 환호성이 들려왔다.
“됐다!”
박한별의 환호.
곧이어, 박한별은 청화를 터득해 신화등급의 스킬을 얻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기쁘기도, 배가 아프기도 했지만, 어쨌든 축하할 만한 일이었다. 천외천의 멤버가 두 명이나 신화등급을 지닌 플레이어가 되었으니까.
“흠흠, 대충 정리가 끝난 것 같으니, 이동할까요?”
회상을 마친 나는 마른침을 삼켜 가며 박한별에게 말했다.
“그래요. 헌터 협회로 가서 천가의 의견을…… 왜 그래요, 도윤 씨?”
원래의 목적지인 헌터 협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박한별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해, 하지 못했던 일이 생각났던 탓이었다.
“아, 잠깐만요! 먼저 가 있을래요? 금방 갈게요.”
“네? 네, 그렇게 하세요. 그럼.”
박한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주변은 아직 어수선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의 중심 명동에서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나타났으니까.
나와 박한별이 빠르게 트롤들을 정리하긴 했지만, 피해 규모는 결코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어느새 나타난 대형 길드와 헌터 협회 직원들은 빠르게 수습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치신 분! 이리 오세요!”
“혹시 실종자 있으시면 여기로 와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 모든 소음을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대형 길드와 헌터 협회의 통제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짐에 따라 이동하는 인구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만약 그가 움직였다면, 찾기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자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 있었다.
이마가 찢어진 것 같다며, 자리 이동을 권유하는 의료반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혹시 기다려 주신 겁니까?”
“아니, 뭐…… 기다리라고 하셔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하는 그에게 미소를 지은 나는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서현우 씨.”
“제 이름을 어떻게……?”
서현우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너무 반가워 실수했음을 느꼈지만, 애써 빠르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천가의 천도윤입니다.”
“천도윤…… 아! 천외천의! 바가렐라의 인터뷰 잘 봤습니다.”
서현우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이제야 기억이 났다며 호들갑을 떨어 대는 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활력의 힘을 이용해 눈에 집중시키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과 상태창.
기존, 상대방에게 활력을 걸어야 사용할 수 있었던 능력을 이제는 간단히 사용할 수 있었다.
“역시 등급빨.”
“네?”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 서현우 씨…….”
서현우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다. 그의 상태창은 조금 전 내가 확인한 것과 완전히 일치한 문구를 내뱉고 있었다.
“네, 무슨 일로……?”
“천외천에 들어오시겠습니까?”
내가 가장 영입하고 싶어 했던 포지션의 헌터였으며……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가공할 만한 잠재력을 지닌 플레이어가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