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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96화 (96/175)
  •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96화

    96. 페이즈(1)

    술판은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직설적인 욕설을 내뱉었으며, 또 누군가는 끝까지 웃음을 유지했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흘렀다.

    “정말 괜찮겠어?”

    “그래. 내가 남아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거든.”

    40층에 도착한 김수민은 지구로 돌아가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어 했잖아.”

    “내가 지구로 돌아가서 뭐 하냐. 다 늙은 할망구가.”

    “지금 모습은 할망구처럼은 안 보여.”

    김수민의 실제 나이는 아버지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보이는 나이는 많이 쳐줘 봐야 이십대 후반. 나는 그토록 지구를 그리워하던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궁금했다.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곳이야.”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말했잖아, 지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마계를 말하는 거지?”

    김수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은 마계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서 소문이 자주 들어오거든. 분명 조만간 그 녀석들이 사고를 쳐도 크게 칠 분위기야. 여기 사는 확실한 정보통을 통해 들은 이야기니 믿을 만한 소식이야.”

    나는 심각해 보이는 김수민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던 악마들의 움직임. 그리고 천지훈의 행태.

    분명, 이 모든 것은 결코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을 왜 김수민이 지려 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기 남아서 뭐 하려고?”

    “준비해야지.”

    나는 그녀가 무엇을 준비한다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고요했다. 마치 태풍이 일기 전 잔잔해진 바다 같이.

    분명 생각해 둔 바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나는 그녀에게 지구로 돌아가자고 재촉할 수 없었다.

    “……알겠어. 언제든 나오고 싶으면 나와. 저 입구를 통해 나오면 우리 가문이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될 거야. 나오면 섭섭하지 않게, 아주 극진하게 대접해 줄게.”

    “고맙다.”

    “고맙긴…….”

    감사 인사를 건네는 김수민이었지만, 그녀의 눈을 본 나는 확신했다. 절대로 불가능할 거라고. 그녀의 눈빛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나는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수십 년간, 인버스 타워 내에서 홀로 살아남으며 아버지를 찾아 헤맨 그녀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도 그녀의 눈앞에서. 아마 그녀의 마음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할 만큼 찢기고 너덜너덜해졌으리라.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장난스럽게 손을 휘두르며 나에게 물건을 건넸다.

    익히 나도 알고 있던 물건이었다.

    “이건…….”

    “선물.”

    “못 받아.”

    “내가 이곳에서 쓸 일이 뭐가 있겠냐, 보따리 안에 들어갔다 나와 봐서 아는데 별거 없더라.”

    김수민은 나에게 마고에게서 받았던 도깨비 보따리를 건넸다. 일반 아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값비싼 아이템들보다 몇 배는 거대한 저장 공간을 자랑하는 도깨비 보따리. 무려 인간을 담을 수 있는 아공간 아이템이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는 물건인데, 다른 누구도 아닌 도깨비들의 왕이 사용하던 아이템이었다. 금은보화라면 환장하는 도깨비의 특성상 안에 있는 물건들이 결코, 평범한 물건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못 받아. 이건…….”

    “아버지를 삼킨 녀석이 준 거야. 계속 보고 있으면 아빠 생각날 것 같아서 그래.”

    김수민은 받을 수 없다는 나에게 기어코 도깨비 보따리를 쥐여 줬다.

    나는 마지못해 보따리를 받고는 등을 떠밀렸다.

    “빨리 가.”

    “김수민, 이렇게 갑자기…….”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빨리 올라가서 강해지고 있으라고. 적들은 생각보다 더 강할 테니까.”

    그녀의 일축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들의 왕 마고와 오니들의 왕 염비가 싸우는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없이 약하다는 것을.

    만약 저런 녀석이 한 마리만 날뛰어도, 지구는 쑥대밭이 되고 말 터였다. 두 마리가 날뛰면 순식간에 지구가 멸망하고 말지도 몰랐다.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들을 막을 힘이 나에게는 없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도윤 씨. 제가 강해졌잖아요.”

    옆에서 나를 바라보던 박한별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조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지훈의 일을 포함해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서둘러야 한다.’

    나는 조용히 박한별을 바라봤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그녀가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도깨비들의 왕 마고에게 [전승]받은 박한별은 눈에 띄게 강해져 있었다.

    순혈 도깨비조차 전승으로 물려받는 힘은 10퍼센트 내외라고 하니, 후예인 박한별이 소화 가능한 힘은 그보다 훨씬 적을 테지만 그마저도 엄청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그녀의 상태창은 놀라우리만큼 엄청난 스펙을 자랑하고 있었다.

    [박한별]

    호칭: 이매망량(魑魅魍魎) - 신화 (해금 중)

    특성: 야차(夜叉) - 전설, 도깨비의 후예 - 전설

    스킬: 도깨비불[청화(靑火)] - 신화

    나는 그녀의 상태창을 훔쳐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설급 특성 하나와 신화급 호칭과 스킬을 얻은 그녀는 현재 지구에서 누구보다 강한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다.

    나조차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만큼의 성장이었다.

    배가 아프긴 했지만, 그녀는 우리 팀.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이제 그만 올라가, 너희들은 할 일이 많잖아.”

    나와 박한별을 떠미는 김수민의 모습에 그녀에게 말했다.

    “우리가 뭐 해 줘야 할 일 없어?”

    “있지.”

    그녀는 당당히 말했다.

    뭐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강해져.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할 만큼.”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이번에 느낀 게 아주 많거든.”

    대답을 들은 김수민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 그리고 사람 좀 찾아 주라.”

    “사람?”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손주.”

    나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손주가 있었어? 이거 진짜 할망구…… 으억!”

    배를 강타당한 나는 복부를 움켜쥐며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내뱉었다.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 내가 이곳에 들어올 때 딸 녀석이 8살이었으니, 아마 결혼해서 애를 낳았다면 있겠지.”

    “진짜 이곳에서 오래 살긴 했구나.”

    “찾으면 이것 좀 전해 줘.”

    김수민은 손을 내밀어 나에게 작은 환약을 쥐여 주었다.

    “이게 뭔데?”

    동그랗고 검게 빛나는 환약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물건이었다.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야. 일이 잘못돼도 그 녀석은 어떻게든 살아남았으면 해서.”

    “그런데 왜 하나야? 딸 몫은?”

    “죽었다더라.”

    김수민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는 괜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어떻게 지구에서 살아가는 딸의 생사 여부를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물을 수 없었다. 나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알겠어. 어떻게든 찾아서 전해 줄게.”

    나는 그녀의 딸에 대한 신상을 전해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인버스 타워의 출구 앞.

    마지막으로 김수민과 작별 인사를 나눈 나와 박한별은 망설임 없이 인버스 타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인버스 타워를 빠져나온 직후, 우리는 예상치 못한 알림음을 마주해야만 했다.

    [인간의 가능성을 초월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2페이즈로 돌입합니다.]

    * * *

    “약속대로 도윤이에게는 비밀입니다.”

    “헉…… 허억, 알겠어요.”

    천지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던전 안에서 여유롭게 서 있는 천우진을 바라봤다.

    실력이라면 자신 있었던 그녀가 벽을 느낄 만큼 천우진은 강한 상대였다.

    완전히 눈이 돌아가, 천가의 피와 광기의 도살자, 피의 연회를 모두 개방했음에도 천우진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천지현은 놀란 눈으로 천우진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비밀입니다.”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천우진이 얄밉긴 했지만, 천지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싸우기 전, 그와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제가 이기면 저에 대한 모든 것은 비밀로 해 주세요. 또 저에 대해 자세히 묻지도 말고요.

    그가 자신의 대결 신청에 응하는 조건은 간단했다. 비밀 유지. 강한 자만 보면 피가 끓는 천지현의 입장에서는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싸울 수만 있었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처참하게 당하고 나자, 궁금증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쉽네요.”

    “그런 표정 지어도 안 알려 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하는 천우진의 말에 천지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참이나 천우진을 바라보던 천지현은 이내 포기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그나저나 말한 아이템이 이거였어요?”

    “네.”

    뱀이 똬리를 튼 모양의 작은 병. 천지현은 던전의 몬스터를 잡고 나온 작은 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영약이나 뭐 그런 건가요?”

    “아니요.”

    “그럼……?”

    “독입니다.”

    싱긋 웃는 천우진은 너무나도 황당한 소리를 내뱉었다.

    “제가 암살에 특화된 능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독으로 플레이어를 죽이기는 쉽지 않아요.”

    플레이어는 기본적으로 독이나 유해 한 공격에 대한 면역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몬스터들이 내뿜는 엄청난 맹독이 아닌 이상, 금방 회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냥 독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이죠.”

    천우진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의아함이 든 천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냥 독이 아니라면…….”

    “오로치의 독입니다.”

    천지현의 눈이 번뜩였다. ‘오로치의 독’. 분명 자신이 들고 있는 ‘오로치의 검’과 연관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트 아이템이 좋은 시너지를 낸다는 것쯤은 플레이어가 아닌 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잔뜩 기대감이 넘치는 표정을 해 보인 천지현은 얼마 전 천도윤에게 받은 자신의 새로운 무기, 오로치의 검을 빼 들었다.

    일본의 시미즈가의 가주 시미즈 사토히로로부터 빼앗은 검이자, 아버지를 벤 검.

    오로치의 검은 자신이 마치 뱀이라도 되는 듯 칼날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오로치의 검은 오로치의 독을 흡수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천우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고 소드인 오로치의 검이 날뛰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병을 깨뜨리고 독을 취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애써 오로치의 검을 진정시킨 천지현은 천우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죠? 그리고 이 독이 여기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규격 외 던전을 같이 클리어하자고 했던 천우진은 수많은 던전을 제외하고 딱 이 던전을 골라냈다. 그리고 보스를 처치하고 나온 아이템을 자신에게 건넸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천우진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천우진은 싱긋 웃으며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이에 천지현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나요?”

    “말씀하세요.”

    “매우 의심스러워요. 도윤이가 당신을 가까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요.”

    딱딱한 음성이었다.

    “도윤이는 제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괴물 같은 실력은 모르고 있겠죠.”

    천지현의 대꾸에 천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조금 곤란하다는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군요. 그래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니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선물도 드렸는데…….”

    “이딴 선물 필요 없습니다.”

    천지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받아 들었던 병을 천우진에게 넘기려 했다. 그러자 오로치의 검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저 독은 내 것이라고, 당장 내놓으라고 말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천우진은 그 모습을 보더니, 싱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일단 저 녀석이 많이 원하는 것 같으니 조금만 먹여보세요. 그리고 돌려줄지 말지 결정하시죠.”

    천우진의 제안과 발광하는 오로치의 검을 본 천지현은 마지못해 병의 뚜껑을 열었다.

    “사용했으니 받지 않는다는 말은 안 통해요!”

    “하하, 그럼요.”

    싱긋 웃는 천우진을 한 번 더 노려본 천지현은 오로치의 검을 향해 오로치의 독을 몇 방울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톡. 톡.

    새까만 독이 검 위로 떨어질 때마다, 검의 모양이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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