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89화
89. 도깨비들의 왕(4)
“너희들은 오니들을 이길 수 없다!”
마고의 외침에 도깨비들이 반발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저 정신 나간 놈이!”
“꺼져라! 네놈이 그러고도 왕이냐!”
원색적인 비난에도 마고는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히 뜻을 전할 뿐이었다.
“염비의 실력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때는 네가 이기지 않았나? 이번에도…….”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단호한 마고의 대답에 도깨비들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설마, 네놈도 이길 수 없는 거냐?”
“그래.”
담담히 말하는 마고의 태도에 도깨비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존심 강한 도깨비가, 그것도 도깨비들의 왕이, 적이 더 강하다 대답한다. 이는 결코 쉽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괜히 너희들을 막은 게 아니라고, 이 등신들아.”
도깨비들을 나무라는 마고를 본 가비가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냐?”
“그래. 녀석은 강해.”
“강한 것은 알고 있다. 내 말은 너보다 강하다는 게 사실이냐 묻고 있는 것이다.”
“……몇 번 말해. 그렇다고.”
“분명 100년 전 전투에서는 네가 이겼다. 그런데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는 가비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마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녀석들이 금기를 풀었다.”
일순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냉랭해졌다.
“……!”
“……미친 새끼들이!!”
“쳐 죽일 새끼가!!”
가비와 다로가 소리쳤다. 한 맺힌 분노가 삭풍처럼 몰아쳤다.
“금기?”
“금기를 풀어? 금기가 뭔데?”
다른 도깨비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가비와 다로는 분노한 눈을 이글거린 채, 도깨비방망이를 들고는 당장이라도 오니들에게 쳐들어갈 듯한 자세를 취했다.
“진정해라,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가장 가벼운 언행을 보이던 마고 마저 심각한 분위기를 지으니, 주변 공기가 철근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비와 다로를 말린 마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무슨 소리냐! 금기가 풀렸다면 우리 또한 금기를 풀지 않는 이상…… 너 설마!”
“도깨비가 멸망하게 둘 순 없잖나.”
“안 돼! 절대 안 돼!”
다로가 학을 떼며 기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막 적임자도 나타나지 않았나.”
“네놈이 분명 저 녀석은 적임자가 아니라고…….”
“취소하지 뭐. 저 녀석은 적임자가 맞아.”
다로의 말을 훅 끊고는 배시시 웃는 마고의 모습에 가비와 다로는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놈.”
“이제 알았어?”
6살 어린아이와 같은 미소를 되찾은 마고는 도깨비를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네놈들 소원대로 전쟁은 하게 해 주지!”
“와아아아!!”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도깨비들은 환호했다. 가비와 다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왕을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단, 조건이 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깨비가 물었다.
“뭐지?”
“기다려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발끈한 도깨비가 소리쳤다.
“기다리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지금 전쟁의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지금 기습하지 않으면…….”
“돌아오면 내가 같이 가겠다.”
마고의 전쟁 참가 선언에 도깨비들이 술렁였다.
“…….”
“젊은 도깨비들을 구출하는 데 목숨을 다하지.”
“정말인가?”
“진짜다.”
“그건 환영이다. 그런데 어디를 간다는 말이냐? 또 언제 돌아올 생각이고!”
“말해 줄 수 없다. 확실한 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도깨비들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강력한 도깨비 마고가 참전한다고 하니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참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전쟁에 강력한 원군이 붙는다는데 싫어할 존재가 있을 리 없었다.
가비와 다로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마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때, 무릎 꿇은 도깨비 디로스가 물었다.
“뭐지?”
마고는 디로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디로스는 결연하고 진중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물었다.
“확실한 난장(亂場)인가?”
디로스의 물음에, 주변 도깨비들의 입술이 씰룩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하나, 둘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기 시작했다.
“암, 그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마고! 대답해라!! 확실한 난장인가!”
피식 웃은 마고가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아주 쑥대밭을 만들 거다.”
그러자, 무릎을 꿇었던 도깨비는 족쇄가 풀렸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마고를 향해 소리쳤다.
“마고, 내기다!”
“물론! 바라는 바다!”
흔쾌히 받아들이는 마고를 바라본 도깨비들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삭막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고, 한없이 가벼운 공기가 주변을 메우기 시작했다.
방망이를 꺼내든 도깨비들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각각 자신의 무기를 휘둘렀다.
펑-!
작은 연기가 생겼다가 없어지고, 진한 숯 향을 입힌 고기와 술, 모닥불이 튀어나왔다. 도깨비들은 익숙한 일인 듯 자리를 잡고 앉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마셔!”
“전쟁을 위해!!”
“누가 더 전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지 우리도 내기다!”
“지로! 뭘 걸 거냐!”
“나? 내 전 재산을 걸지!”
“후회하지 마라! 나도 전 재산을 거마! 크하하하하!”
안개처럼 사라질 듯한 가벼움.
순식간에 벌어진 술판에 나는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종족의 존폐가 걸린 상황에 웃고 떠들며 술잔을 기울이다니…….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저런 종족이야.”
어느새 정신을 차린 김수민이 내 옆에 와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내기와 술잔을 놓지 않는 종족.”
“한마디로…… 정신 나간 종족이라는 말이네?”
“크큭. 그것도 그렇지. 그래도 재미있지 않아?”
“재밌기는…….”
김수민에게는 툴툴댔지만, 사실 처음으로 도깨비의 진정한 모습을 본 나는 그들이 흥미롭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오죽하면 박한별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저기 껴서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들은 그런 생각이 들 만큼 활기차고 생기 넘쳐 보이는 모습이었다.
“마셔!! 오늘 가장 먼저 뻗는 새끼. 3일 내내 보초 설 줄 알아라!”
어느새 술자리는 더욱 열기를 띠고 있었다.
“우리도 갈까? 가비에게 물어보니까 박한별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데…….”
“그래도 어떻게…….”
박한별을 버리고 놀 수 있냐고 말하려던 참에, 도깨비들의 재촉이 들려왔다.
“어이! 손님들!! 뭐 하고 있나? 안 들어오고!”
“야, 자리 터! 귀한 손님들 오셨는데 한 잔 드려야지.”
“이쪽으로 오라고!”
거대한 발로 성큼성큼 다가온 도깨비는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하긴, 박한별은 안전하다 하고, 도깨비 거적을 얻으러 왔던 소기의 목적마저 이룬 셈이니 끼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럼…… 조금만 마실까?”
“크큭, 그래. 이왕 벌어진 술판. 재밌게 즐기자고!”
김수민은 흔쾌히 대답하며 내 제안에 응했다.
빙 둘러싼 모닥불 앞에 우리를 안내한 도깨비는 방망이를 한 번 더 휘둘러 작은 술잔을 만들어 내더니, 우리에게 술을 따라 줬다.
“인간들은 술 좀 하나?”
술을 따라 주는 도깨비의 한쪽 입매가 비틀어져 올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와 김수민은 눈을 마주쳤다. 저 비릿한 미소의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할 것 없이 외쳤다.
“술잔이 너무 작은데?”
“어이, 몸집만 큰 도깨비. 내기할까?”
잠시 침묵이 찾아 들고.
도깨비들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우가가가가!”
“크하하하핫!! 마음에 든다. 마음에 들어!”
“자, 받으라고!”
거대한 잔으로 교체한 도깨비들은 그 안에 독주를 들이붓기 시작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찰랑이는 술잔을 모두 비워 냈다. 김수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번 도깨비들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핫! 인간들은 재밌다더니, 진짜였군.”
“옛날에는 교류가 빈번했다던데, 자주 좀 놀러 오라고!”
“우가가가가!!”
그들은 호탕하게 우리를 정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떠한 이해관계도, 상황도, 개의치 않는 순박한 웃음. 그 천진난만한 태도로 우리를 반겼다. 나는 오랜만에 느낀 친근한 분위기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것들이! 왕이 앞에 있는데, 먼저 술판을 벌여? 술 가져와!!”
어느새 마고도 껴들어 거대한 술잔을 내밀었다.
“옜다! 이 왕 놈아!”
“낄낄낄! 잔소리한다고 우리를 그렇게 피해 다니더니, 술은 먹고 싶었나 보지?”
다른 도깨비에 비해 두 배는 거대한 술잔을 들고는 가득 찬 술을 쭉 들이켠 마고가 말했다.
“히시시시시. 닥쳐라! 그리고 오늘 제일 먼저 뻗는 놈은 볼기짝이 아주 탱탱 부어 있을 줄 알아라!”
“그건 네놈이다. 이놈아! 한 잔 더 받아라!”
주거니, 받거니 진지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쾌한 술 파티가 이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직 재미와 내기 그리고 즐거움을 위해 사는 종족이라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싹하네…….’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 그들이 내뿜는 기운을 모두 목격한 나로서는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나는 온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뭐…… 다 끝난 일이니까.”
나는 애써 상념을 털어 냈다. 박한별은 아이템과 각성을 통해 엄청난 성장을 할 예정이었고, 김수민은 이곳에 옴으로써 가문의 언약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모두 이룬 상황.
그들을 더욱 심도 있게 이해하기보다는 지금 상황을 즐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힘든 건가?”
나는 처음 나를 도발했던 도깨비에게 한쪽 입술을 들어 올리며 똑같이 도발하기 시작했다. 내 표정을 본 도깨비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천만에! 받아라!”
“좋지!”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코가 삐뚤어질 각오로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만에 느껴 보는 해방감에, 긴장을 풀고는 잔뜩 술을 들이켰다.
강해져야 한다는 압박감,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무거운 중압감에서 잠시나마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붉은 달이 먼 산등성이 속으로 숨을 때까지도 우리들의 파티는 계속됐다.
“으…… 으.”
시야가 흐릿해질 정도로 취기가 올랐을 때, 도깨비들의 왕 마고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한번 감았다 추켜 뜨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받을래?”
“잠시 이야기 좀 하지.”
곳곳에 널브러져 뻗어 버린 도깨비들과는 다르게, 마고의 음성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옆을 바라봤다. 어느새 김수민은 술에 뻗어, 평평한 돌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나?”
“그래, 너.”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며 그를 따라 자리를 옮겼다.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마고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애써 바로 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후예와 깊은 관계인가?”
“깊지.”
“그렇다면 백의와는…….”
“암, 깊고말고.”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제 그들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였다. 그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적어도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
나는 다음 말이 들려오지 않아, 의아함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이 없어?”
마고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제야, 나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야, 이 미친놈아!”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가 도깨비들의 왕인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튀어나온 말이라,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나는 빠르게 사과한 뒤, 그에게 설명했다.
“동료로서 깊다는 거다! 오해하지 마라.”
나는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봐야, 박한별과 김수민을 나의 연인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마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 무거운 음성에,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취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잠시간 뜸을 들인 마고는 돌연 나에게 사과를 건넸다.
“먼저 사과하지, 미안하다.”
불길한 느낌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가빠지는 숨을 참고는 그에게 물었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냐!”
조금 싸늘해 보일지 모르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강하게 느껴지는 불안감은 떨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것이 최대한의 목소리였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마고의 입이 무겁게 움직였다.
“너는 소중한 동료를 모두 잃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