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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87화 (87/175)
  •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87화

    87. 도깨비들의 왕(2)

    가비의 말은 더 이상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와 박한별은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도울 일은 없습니까?”

    우리의 물음에 가비는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를 돕기에는 너희들은 약하다.”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지만, 도깨비들의 무위를 잠깐이나마 엿본 나는 가비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죽음의 군주와 드래곤을 꺼내고 나서야, 그들의 방망이를 잠시 멈춰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만약 저들이 조금만 더 진심으로 나왔다면, 김수민과 박한별은 크게 다쳤을 터.

    현실을 자각한 나와 박한별은 서서히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낙담하지 마라. 너희들은 내가 전해 들은 인간의 무위를 한참이나 뛰어넘었으니까. 특히 너는…… 조금 놀랍더군. 젊은 도깨비들과 겨뤄 봐도 밀리지 않겠어.”

    가비는 내가 착용한 목걸이와 반지, 그리고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내 옆에서 그 모습을 본 박한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나는 속삭이는 듯 박한별에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한별 씨.”

    “괜찮아요. 신경 안 써요.”

    박한별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지만, 내비친 감정은 결코 즐거움이 아니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모습.

    자신을 ‘후예’라 부르는 도깨비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맞다. 절대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자칫 개죽음이 될 수도 있는데, 손님을 사지로 내몰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가비가 거들었다.

    가비는 조심스레 품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 보였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의 후예는 절대 약하지 않다. 너의 실력은 결코 그 정도가 아니야.”

    가비의 품에서 나온 물건을 본 박한별은 동그랗게 커진 눈을 깜빡였다.

    “이건……?”

    “선물이다. 이걸 얻으러 온 거 아니었나?”

    가비의 손에는 곱게 개어진 호피 무늬의 천과 아무런 장식도 새겨지지 않은 깨끗한 가면이 올려져 있었다.

    “도깨비의 힘은 방망이와 감투, 그리고 거적이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이 나오는 법이지.”

    가비는 거대한 외눈을 껌뻑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치 박한별이 감투와 거적을 모두 사용했을 때의 모습을 보고 싶어 죽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우리가 찾아온 의도를 단번에 눈치챈 가비 녀석의 눈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 통찰력이다.’

    작게 감탄하고 있을 때, 박한별은 얼떨떨한 얼굴로 가비가 내민 거적과 가면을 받아 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얼른 써 보거라.”

    흐뭇한 표정을 지은 가비가 재촉했다.

    “네? 네…….”

    박한별은 기뻐하면서도 약간은 쑥스러운 모양인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면을 조심스럽게 얼굴 위로 가져갔다.

    순백이라 표현해도 좋을 정도의 하얀 가면이 박한별의 얼굴과 맞닿았다. 그러고는 무섭도록 빠르게 외형을 바꾸기 시작했다.

    광대, 이마, 눈가 주위로 주름이 지기 시작하더니, 입 모양이 적게 벌어졌다. 거기에 역치로 자란 어금니가 날카롭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에 나는 놀란 눈으로 박한별을 바라봤다.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옆에서 바라보던 가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가비가 변화한 가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훌륭한 감투군.”

    가비는 무서워 보이는 가면일수록 감투가 제 기능을 잘 발휘한다고 설명했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박한별의 감투는 꽤 훌륭한 성능을 넘어 최고의 성능을 자랑할 것이 분명했다.

    순식간에 변한 그녀의 감투는 보기만 해도 오싹한 감정을 떠올리게 할 만큼 흉물스러웠으니까.

    “가비 님, 이거…….”

    “어떤가? 죽이지 않나?”

    “네…….”

    감투를 뒤집어쓴, 박한별은 평소의 몇 배의 출력으로 타오르고 있는 자신의 도깨비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투는 도깨비불의 출력을 높이고 은밀하게 만들지. 또, 변신할 수도, 환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가비는 흐뭇한 표정으로 설명한 뒤, 서둘러 거적을 착용할 것을 재촉했다.

    박한별은 변한 자신의 모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나서, 감투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는 거적을 둘러메기 시작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호피 무늬의 거적을 둘러메는 박한별. 그 모습을 본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크큭.”

    거적을 이리저리 돌리며 매만지던 박한별이 얼마 뒤 소리쳤다.

    “다 입었어요!”

    자신 있게 말하는 박한별은 옷 위로 두른 거적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허리춤에 길게 두른 모습이 꼭 잘 어울리는 치마를 입은 듯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작게 감탄하는 나와는 달리, 박한별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응? 이거 왜 이러지?”

    도깨비감투처럼 큰 변화가 생길 줄 알았던 박한별은 자신의 변함없는 모습에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아, 내가 말을 안 했나 보군.”

    가비는 말해 주는 것을 깜빡했다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거적은 더러울수록 힘이 강해진다.”

    가비는 설명을 더 하며 자신의 거적을 뽐내기 시작했다. 멋지지 않냐며 자랑을 해 대는 가비의 모습에, 나와 박한별은 동시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가비의 거적을 살피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곳곳에 구멍이 나 있고, 얼룩이 진 모습. 누더기처럼 해진 가비의 거적에 우리는 무언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음을 느꼈다.

    “320년간 단 한 번도 빨지 않았다.”

    “…….”

    “우욱!”

    당당히도 말하는 가비의 발언을 들은 박한별은 당장이라도 속을 게워 낼 듯, 허리를 구부렸다. 나 역시 올라오는 구역감을 애써 참아 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도깨비 거적은 냄새가 안 나기로 유명하니까.”

    “그래도 한 번도 안 빤 건 좀…….”

    “무슨 소리냐? 이건 힘의 상징이다.”

    가비는 도깨비 거적은 빨지 않아야 제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더럽고 해묵을수록, 도깨비의 신체 능력이 향상된다고…….

    나는 사색이 된 채 서 있는 박한별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도윤 씨…….”

    박한별이 처음으로 나에게 도와달라는 듯한 간절한 시선을 보내 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리라고 할 수도 없고…….

    가비는 여전히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박한별에게 말했다.

    “자, 모든 장비를 얻었으니 동시에 착용해 봐라, 후예여.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지엄한 척 말하려는 가비의 그 해맑은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쉰 박한별은 거절할 수 없었는지,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 변화한 가면이 얼굴을 모두 덮고 나자, 박한별은 등 뒤에 멘 도깨비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화악-!

    푸른 불꽃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진동하고.

    가비의 눈이 변하기 시작했다. 가비는 놀란 눈으로 박한별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타오르는 듯 눈이 매섭게 이글거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는 대지에 저 멀리서 자웅을 겨루던 도깨비들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쿠웅-!

    쿠웅-!

    도깨비불을 이용해 연기처럼 다가온 도깨비들이 그녀의 앞에 섰다.

    “어떻게 된 일이냐!!”

    “가비!!”

    여러 고대 도깨비들이 가비를 다그쳤다. 그러나 가비는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초점 없는 눈으로 계속해서 고대의 언어를 뱉어 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치챈 도깨비들은 서서히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쿵’ 소리를 내며 무릎을 꿇었다.

    대지가 다시 한번 진동했다.

    거대한 도깨비들이 우리를 둘러싼 채, 무릎을 꿇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거대한 방망이를 지닌 다로가 작게 읊조렸다.

    “왕이 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원 안에 거대한 불꽃이 일었다.

    그간 봐 왔던 푸른 불꽃과는 격이 다른 영롱한 불꽃이었다.

    곧이어, 불꽃 안에서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부르지 말라니까!!”

    나는 경박스럽고 체통 없는 왕의 목소리에 한 번 놀랐고, 그와 대조되는 엄청난 기운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반 페르데이스와 같은 존재가 괜히 화난 도깨비를 피해 다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눈앞 도깨비는 엄청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압도된 나와는 달리, 무릎을 꿇은 도깨비들의 반응은 완전히 반대였다.

    “저놈은 왕이라는 새끼가 품위 없이!”

    “그럴 거면 왕 자리 내놔!”

    무릎을 꿇은 도깨비들은 하나같이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들의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히시시시시.”

    가볍고 경박스러운 웃음.

    한참을 웃어 젖힌 왕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꼬우면 너희들이 강하든가. 히시시시.”

    저 녀석은 분명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동족을 놀리는 것이 분명했다.

    울컥한 도깨비 하나가 소리쳤다. 배가 남산만 하게 나온 뚱뚱한 도깨비였다.

    “저 새끼 내가 오늘 목 딴다.”

    분노가 담긴 음성을 마주하면서도, 왕은 장난기를 잃지 않았다.

    “히시시시. 그래? 그렇다면 오늘은 디로스 당첨!”

    “오예!”

    “조아쓰!!”

    왕이 뚱뚱한 도깨비를 지목하자, 다른 도깨비들은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마치 족쇄가 풀려 기쁜 노예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내 눈빛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게…… 입은 제약이 풀린 다음에 놀려야지.”

    “크크큭. 오늘 종일 무릎 꿇고 있게 생겼네. 디로스.”

    “닥쳐라!! 크윽! 언약을 건 내기만 아니었어도…….”

    “진짜 왕이지만, 한 대만 때리고 싶다.”

    디로스를 향한 조롱과 왕을 향한 여러 가지 욕설이 오갔다. 상황을 보아하니, 그들의 행동은 어떤 약속을 통해 강제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 룰을 통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왕이라 불리는 저 녀석일 테고.

    경박한 왕과 존중 없는 신하들을 보고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깨비는 그들의 왕조차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방지축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런 개판인 관계 속에서도 그들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도깨비들은 강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그들이 자유분방할 수 있는 이유였다.

    멍하니, 눈앞에 나타난 영험한 존재를 바라보고 있는데, 왕이라 불린 자가 물었다.

    “넌 뭐냐?”

    자연스레 흘러나온 음성에 실린 힘마저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순간 나는 나약한 존재가 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힘을 얻기 전, 아버지와 독대하던 그 날처럼.

    “저는…….”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가비가 끼어들었다.

    “마고.”

    “왜!”

    왕은 갑작스레 끼어든 가비에게 짜증 섞인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나 가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적임자가 나타났다.”

    가비의 말에 마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 녀석이?”

    말도 안 된다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니.”

    가비는 고개를 저은 뒤, 거대한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폭주하는 도깨비불을 제어하지 못한 채, 정신을 잃은 박한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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