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78화
78. 정상회의(3)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로시 바가렐라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꿀렁이며 들어오는 기운을 차단하며 재빨리 손을 빼냈다.
몸에 기생이라도 하려는 듯 은밀하고도 무섭게 파고들던 기운이 순식간에 기운을 감추며 사라졌다.
동시에 귓가로 알림음이 날아들었다.
[로시 바가렐라의 스킬 ‘은밀한 감시’가 차단되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목적은 처음부터 이것이었다.
나를 감시하는 스킬을 체내에 심어 두는 것. 워낙 은밀한 기운인지라 감지하기조차 쉽지 않은 스킬이었다.
처음부터 목적을 갖고 접근한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내 격이 조금만 낮았더라면…….’
아찔한 상상이 머릿속을 덮쳤다.
아마 매일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으리라…….
“어…… 떻게?”
로시 바가렐라는 놀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라도 일어났다는 듯이.
넋이 나간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한가득 머금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드는 의심은 단 두 가지였다.
단순한 견제용으로 나에게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아니면 천지훈과 같은 편이라 그런 것인지…….
일단 그 부분부터 알아내야 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더 이상의 존중은 없었다. 어쨌건 로시 바가렐라는 나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존재. 예의를 갖춰 대하기엔 그녀는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은 상태였다.
“…….”
그녀는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나 보군.”
나는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력이 아니더라도 바가렐라가의 위상을 떨어뜨릴 일은 차고 넘쳤다. 게다가…….
“자, 잠깐!”
급한 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로시 바가렐라와 다니엘 바가렐라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차가운 음성으로 대답하면서도 나는 의아함을 지우지 못했다. 이상했다. 그들은 나를 향한 미안함보다는 전혀 다른 감정을 내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두 눈에 깃든 감정은……
의심이었다.
“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저들이 대체 왜……?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불신이 놀라운 속도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만약 저들이 천지훈과 같은 상황이라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악마에게 넘어갔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명가라 불리는 가문들 모두 의심해 봐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끔찍한 상상에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을 때였다.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헛다리 짚고 계시네요. 양쪽 다.”
고개를 돌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봤다. 붉은 머리칼에 매혹적인 눈매를 가진 30대 여성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은밀한 유혹자가 여긴 웬일이지?”
싸늘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적의를 잔뜩 실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다니엘 바가렐라였다.
“은밀한 유혹자라니, 오랜만에 들어 보는 별명이군요.”
그녀는 추억에 젖은 표정으로 다니엘을 바라봤다. 고혹적인 태도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나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딘지 모르게 흐뭇해 보이는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붉게 칠한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쪽의 의심. 안타깝지만 모두 다 아니랍니다.”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 알고.”
그녀는 재밌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나를 향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고는 얼굴을 쭉 내밀며 말했다.
“악마.”
짧은 대답. 그러나 그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떨리는 동공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곧장 옆을 바라봤다.
우리의 대화를 엿들은 로시 바가렐라와 다니엘 바가렐라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설마……?”
넋 나간 얼굴로 툭 내뱉은 혼잣말을 주워든 것은 은밀한 유혹자라 불리는 붉은 머리칼의 여자였다.
“네. 양쪽 다 서로를 악마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계시지만 틀렸답니다.”
확정 짓듯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은 어떻게 읽었으며, 저들의 생각은 또 어떻게 읽었는가.
그녀를 향한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머, 저까지 의심하시는 건가요?”
다소 과장하며 놀라는 몸짓을 해 보인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됐습니다. 그보다…….”
그녀에 대한 의심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저들의 의중이었으니까.
나는 빤히 바가렐라의 가주와 차기 가주를 바라봤다. 혼란스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바가렐라 녀석들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당신도 우리를 의심했던 건가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되물었다.
“조금 전에 했던 짓. 내가 악마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해서 한 것입니까?”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서로 헛다리를 짚은 것 같군요.”
“그러게요. 이거 미안해지네요. 그나저나…….”
그녀는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술을 짓씹었다.
“편하게 말하세요.”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나는 당황했다.
“뭐가 말입니까?”
“제 스킬을 어떻게 감지하고 차단한 거죠? 또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룬 겁니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고개를 세차게 젓고는 묻기 시작했다.
“아, 그렇죠. 그럼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신 겁니까?”
그녀는 다시 진중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한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지훈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갔습니다.”
“뇌룡 말입니까?”
다니엘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착잡한 표정으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시와 다니엘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모습이 보기 힘들어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네. 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이번에는 바가렐라 쪽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잠시 뜸을 들인 다니엘 바가렐라가 입을 열었다.
“저에게 직접 접촉했습니다. 같은 편에 서라고.”
우리는 서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한층 더 심각해진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심각하군요.”
“한둘이 아닐 겁니다.”
악마들은 예상보다도 훨씬 활동 반경을 넓힌 모양이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주변을 살폈다. 저들 중에 분명 악마와 손을 잡은 녀석들이 있을 터. 우리는 그들을 색출하고, 막아야 했다.
“저는 이미 의심 가는 몇 명에게 ‘은밀한 감시’를 심어 놨습니다.”
로시 바가렐라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긴 몰라도 그녀의 능력은 이번 작전에 유용하게 사용될 터. 어느새 연합처럼 꾸며진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적이 군중 사이에 있다고 하더라도 알리는 것이 우선일 겁니다. 우리가 그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적의 움직임은 위축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로시 바가렐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제가 이번 회의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아무리 가문의 위상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다.
또, 현재까지 아무도 넘어가지 않은 바가렐라가 말하는 것보다는 악마에게 넘어간 천지훈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며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터였다.
“아닙니다. 저와 제 아버지가 할 겁니다.”
“정말입니까? ……많은 질타와 조롱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감수해야죠.”
덤덤한 대답에 로시 바가렐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어느새 바가렐라의 가주가 나에게 의견을 묻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가주의 허락보다는 빠른 판단이 우선이라 생각한 나는 빠르게 내 생각을 전했다.
“일단 바가렐라는 뒤에서 연관된 자를 색출하는 데 힘써 주시죠.”
나는 로시의 손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가 가진 스킬은 범인들을 색출해 내기에 안성맞춤인 능력이었다. 게다가 격 높은 무력과 유명세까지 지니고 있으니 상대방에게 접촉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나는 로시 바가렐라에게 일전에 느꼈던 악마의 기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추상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녀는 빠르게 습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많은 도움이 되겠군요. 만약 그런 기운을 느낀다면 바로 말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흔들었다.
“그러면…….”
나는 우리의 모습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대화가 끝났냐고 물어보며 우리를 향해 또각또각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는 이미 찾았어요.”
그녀의 간드러진 목소리에 우리는 그녀를 주시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나와 바가렐라 녀석들의 사이로 고개를 쑥 내밀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드리안 길드는 모두 악마화가 진행됐답니다.”
* * *
“세계 헌터 정상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거대한 원형 테이블에 각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이 앉아 있었다.
회의는 지루하리만큼 따분하고 형식적인 절차였다. 몇 가지 안건들이 오가고, 그에 맞춰 투표하는 형식.
누구도 소란을 피우는 자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라이벌 가문이나 유명 가문의 세력을 확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 꽂힌 시선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모두가 차기 가주로 지목된 천진오가 오지 않은 것이 의외라는 눈빛이었다.
매섭게 날아드는 눈빛이었지만, 내 시선은 전혀 다른 곳으로 가 있었다.
미국의 대표가 참여한 자리.
아드리안 길드라고 쓰여 있는 명패 뒤에 흑인과 백인이 각각 앉아 있었다.
‘저들이란 말이지?’
차가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은밀한 유혹자가 말한 악마들. 그들이 눈앞에 있었다. 그들은 내 노골적인 시선을 의식했는지,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에 맞춰 시선을 옮겼다.
사회자를 바라보자, 어느새 사회자는 마무리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 그럼 마지막 안건까지 모두 통과되었습니다. 추가적으로 건의할 사안이나, 이의를 제기할 분 계십니까?”
사회자의 질문에 거짓말처럼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빨리 회의를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물씬 풍겨 나오는 태도였다.
사회자 역시 이를 눈치챘는지, 더는 기다리지 않고 회의를 마치려는 모습이었다.
“자, 그럼 더 이상 건의 사항은 없으신 줄 알고 회의를 마치도록…….”
“잠깐.”
그때 누군가 손을 들었다.
천가의 가주 천태산이었다.
나라는 새로운 인물에 모두가 주목하던 상황이라 그런지 모두의 시선이 단번에 쏠리기 시작했다.
사회자가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 천가의 천태산님. 건의할 사항이 남아 있으십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 안에 인류를 위협하는 적이 있다.”
난데없는 선언에 회의장이 술렁거렸다.
느닷없이 적이라니…….
조소와 의아함이 회의장을 메우기 시작할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회의장을 울리기 시작했다.
“백 번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편하겠지.”
아버지의 매서운 기운이 미국의 아드리안 길드 쪽으로 쏘아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