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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77화 (77/175)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77화

77. 정상회의(2)

“당신은?”

나는 흑운의 갈라진 틈새로 얼굴을 내밀며 들어온 자를 바라봤다.

늙었다고 하기에도, 젊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나이를 가진 그녀는 파티에 참석이라도 하는 듯 화려하게 차려입은 복장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서둘러 자세를 낮췄다.

“바가렐라의 주인을 뵙습니다.”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워낙 유명한 자였기에 모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바가렐라 역사상 최연소 가주이자 최초의 여성 가주, 로시 바가렐라가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흑운인가요? 정말 쓸모가 많아 보이는 스킬이네요.”

나는 입을 벙끗거리다 덧붙인 한마디에 입을 다물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왜 당신이 차기 흑운, 아니 흑운으로 뽑혔는지도 알겠네요.”

그녀는 단번에 내 정체와 스킬까지 모두 파악한 상태였다. 흑운을 단번에 찢어 버리는 무위, 예리한 통찰력.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기품.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일순 긴장감이 올라왔다.

“애들 싸움에는 끼어들지 말자는 주의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천가의 새로운 도련님?”

로시 바가렐라는 무섭게 날아드는 시선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자, 정말 다양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매번 있는 일이라는 듯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얼굴과 소란스럽게 뭐 하는 짓이냐 따지는 듯한 얼굴.

흥미로운 듯 바라보는 얼굴과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는 얼굴.

다양한 군상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맥이 탁 풀려 버린 나는 그대로 모든 힘을 풀었다.

“알겠습니다.”

나도 더 이상 눈길을 끌 생각은 없었다.

아니, 애초부터 끌고 싶지도 않았다. 이 말도 안 되는 시비만 없었다면…….

“마, 마스터!”

다니엘 바가렐라는 떨리는 동공으로 로시 바가렐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얼음장처럼 차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내가 소란 피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요.”

“그렇지만 분명…….”

“닥치세요!”

고개를 푹 숙이는 다니엘 바가렐라. 할 말이 있어 보임에도 입 한 번 벙끗하지 못하는 그가 불쌍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나는 오히려 정반대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본 다니엘은 다소 억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마치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듯한 표정. 그 위화감에 나는 다시 한번 로시 바가렐라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확신했다.

‘허, 이것 봐라?’

다니엘의 반응으로 보아, 조금 전의 상황은 로시 바가렐라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눈에 띄는 자가 있으면 실력을 알아보라는 그녀의 명령이었겠지.

미간이 꿈틀거렸다.

세계 헌터 정상 회의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그대로였다.

가끔 다른 가문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 시비를 걸거나, 대련을 요청하는 경우가 있다고.

그 방법이 이런 식일 줄이야…….

게다가 그 대상이 나라니.

은밀한 기운을 가진 동양의 어린놈이 호위도 없이 돌아다니는 꼴은 맛있어 보이는 먹잇감이었으리라.

저들의 의도를 모두 파악한 나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나는 전쟁광이라고 불리는 로시 바가렐라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바가렐라가가 이리도 무례한지는 몰랐습니다.”

로시 바가렐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놓고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가문을 욕할 줄은 몰랐던 거겠지. 그러나 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꿀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저쪽이었고, 남의 싸움에 끼어든 것도 저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착각인 듯했다.

가문과 가문과의 관계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호호, 저희 다니엘이 천가의 심기를 많이 상하게 했나요?”

유독 천가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눈썹이 꿈틀댔다.

‘천가의 심기라…….’

그 의미를 되새긴 나는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가주의 지위를 이용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천가의 입장이냐고. 바가렐라와 정말 척질 생각이냐고.

개인의 상황이 아닌 가문의 입장을 들먹이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빠르게 머리가 식어 갔다.

불경한 그녀의 의도가 눈에 보이듯 머릿속에 아로새겨졌기 때문이다.

그 가식적인 얼굴에 담긴 의미는 가주도 없는 자리에서 네놈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이제 막 가문 내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녀석이 무엇을 할 수 있냐고. 가문을 대표할 수 있겠냐고.

그리 묻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게 식은 머리와 삭풍이 불어치듯 시리도록 차가워진 눈빛이 얼굴에 자리했다.

내가 가문을 대표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 나를 찍어 누르려는 속셈이겠지.

자라나는 싹부터 기를 죽여 놔 앞으로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함이겠지.

차게 식은 머리와는 반대로 속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녀석들의 의도야 뻔했다.

이 기회를 이용해 사과하기는커녕, 천가의 유망주가 바가렐라라에게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쯧.’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 같잖은 협박이 가소롭게 느껴질 뿐이었다.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제 심기는 물론, 천가의 심기까지 제대로 건드리셨습니다.”

“당신, 그게 지금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는 건가요?”

“잘 알다마다.”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천가의 이인자에게 바가렐라가의 가주 ‘후보’ 따위가 시비를 걸었습니다. 천가가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가문이 그렇듯, ‘후보’는 원로 이상의 지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는 원로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그럴 수 없는 실정이었다.

천금과도 같은 소중한 가주 후보가 실수할 때를 대비해야 하니까.

성공할 때는 가문의 훌륭한 차기 가주로, 실수할 때는 후보생의 치기 어린 실수로. 그리 둔갑하는 것이 대다수의 가문이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바가렐라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를 들이밀자, 로시 바가렐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이대로 주도권을 넘겨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섭게 내려앉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따위? 지금 바가렐라의 가주 후보에게 따위라고…….”

공기가 진동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끊고는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조금 전 다니엘 바가렐라의 행동. 바가렐라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받은 만큼 되돌려 주었다. 가문의 입장을 들먹이며.

나의 역공에 로시 바가렐라의 얼굴이 누르락붉으락 올라왔다. 그러고는 이내 깊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 아닙니다. 저희가 실수한 것 같군요.”

로시는 깔끔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남들이 보기엔 시원해 보일지 모르는 행동이었으나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나는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그게 답니까?”

“…….”

일순 로시 바가렐라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실수는 인정하나, 자신은 바가렐라의 수장. 더 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은커녕 기본도 받아 내지 못한 실정이었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어디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나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했다.

“사과 안 하십니까?”

로시 바가렐라는 나를 빤히 바라봤다.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무겁고도 시린 공기가 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흐, 역시 안토니오의 말대로군요.”

“그게 무슨…….”

순식간에 바뀐 그녀의 태도에,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안토니오가 그러더군요. 절대 천가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

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나이에 비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무력과 똑똑한 머리. 바가렐라 가주에게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강인한 정신. 천가는 강력한 인재를 낳았군요.”

“갑자기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칭찬에 어안이 벙벙할 때.

“미안합니다.”

돌연 사과가 날아들었다.

“…….”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동양의 방식대로 고개까지 숙여 보이고 있었다.

“난데없는 시비와 가주의 지위를 이용해 당신을 찍어 누르려고 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한없이 진중한 사과. 그 황당한 모습에 나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갑자기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니 당황스럽군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경탄했다.

예의는 갖추고 있으나, 어디에도 비굴한 느낌은 없다. 작아 보여야 정상인 태도와 몸짓이지만, 작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우두머리에 어울리는 기풍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명문은 명문이라는 건가?’

“어쩌겠습니까. 저희의 또 다른 가주 후보 안토니오가 당신네와는 절대 척지지 말라고 하는데…… 들어야지요. 뒷방 늙은이 처지가 되지 않으려면.”

능글맞은 목소리와 엄살이 들려왔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있음에도, 전혀 낮아지지 않는 모습.

그 꼿꼿한 태도에 누군가 겹쳐 보인 탓이다.

‘여기도 천진오 못지않은 여우군.’

피식 웃음을 삼키고는 로시 바가렐라에게 말했다.

“가문과 가문의 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역시, 보면 볼수록 안토니오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군요.”

로시 바가렐라는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손주의 재롱잔치를 보는 듯이.

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어지는 로시의 말은 썩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보상은 심심치 않게 가문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심심치 않게’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명색의 바가렐라다. 게다가 나는 바가렐라의 가주 후보의 목숨을 구해 준 이력까지 있는 인물. 결코 그 선물이 적지 않을 터였다.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이 내린 채 말했다.

“아니요. 저한테 보내 주시죠.”

로시 바가렐라는 흔쾌히 웃으며 대답했다.

“욕심도 많으셔라.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럼 저도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것도 인연인데 악수나 할까요?”

“좋죠.”

우리는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정말로 서로의 앙금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다툼과 약간의 대화.

그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상대 가문의 무력과 태도는 물론이요. 상대방의 성향, 상대 가문에 관한 생각까지.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저들은 내가 가주로 올라설 가능성까지 점치고 있으리라.

최대한 힘을 숨기고 있었지만, 로시 바가렐라는 내가 힘을 숨기고 있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느낌이었다.

바닷속에 숨긴 빙산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드디어 로시 바가렐라와 손이 맞닿았다.

그 자그마한 손에 은은하게 풍겨 나오는 힘은 나로서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감탄하며 꼭 잡은 손을 떼려고 할 때였다.

꿈틀.

손으로 이상한 느낌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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