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67화
67. 혹한의 군주(3)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어 차디찬 대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경악에 찬 혹한의 군주가 뒤를 돌아봤다.
-이게 무슨……!?
만년설에 갇힌 드래곤의 눈이 번쩍 뜨여 있었다. 생기를 잃었던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섬뜩한 눈빛.
영험한 존재를 마주한 혹한의 군주의 눈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쿠구구구구!
부서질 듯 떨리는 만년설을 본 혹한의 군주는 나와 드래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건의 인과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 넋 나간 얼굴을 마주 보면서도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아니, 웃긴커녕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살아 있는 대상을 소환수로 지정할 수 없습니다.]
[레드 드래곤 ‘반 페르데이스’가 플레이어 천도윤에게 대화를 시도합니다.]
갑자기 들려온 아득한 음성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하찮은 인간이여, 순리를 어그러뜨릴 셈이구나.
고작 음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뇌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격한 어지럼증에 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을 놔 버릴 수는 없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또 어떻게 사건이 흘러갈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네놈의 불순한 의도는 잘 알았으나, 그로 인한 결과는 썩 만족스럽구나.
그 순간 나는 눈앞, 위대한 존재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젠장!”
나의 스킬 활력은 죽은 자에게는 새 생명을…… 산 자에게는 버프를 주는 능력이다!
[대상이 강력한 구속에 묶여 있습니다. 버프 효과가 20퍼센트로 줄어듭니다.]
쿠구구구.
겨우 20퍼센트에 불과한 버프 효과였지만, 그로 인한 결과는 엄청났다.
쩌적-!
만년설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들끓는 기운은 고작 인간이 가진 육체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기운에 몸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크윽!”
-온몸에 힘이 넘치는구나! 고맙다 인간이여! 드디어 풀지 못한 한을 풀 수 있겠구나.
쩌저저적-!
금이 더욱 짙게 퍼져 나갔다.
나는 다급히 외쳤다.
“해제!”
[위대한 존재가 버프 효과를 체내에 잡아 두었습니다.]
[해제할 수 없습니다.]
“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갈라지고 있는 만년설을 빤히 바라봤다.
-당황하지 말거라 인간이여! 염원을 이루게 도와준 미물을 죽일 생각은 없으니.
썩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저 완전히 갈라진 만년설과 그 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드래곤의 육신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떻게 만년설을…… 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만년설은…… 커헉!”
혹한의 군주의 몸이 붕 떠올랐다.
-생은 원래 기구한 인연과 인연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이거늘.
드래곤의 음성이 뇌리로 쏟아지고, 사색이 된 혹한의 군주는 마치 밧줄에 묶인 듯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서리 부족, 네놈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짓은 세간에 알려질 것이다.
“크흐흐. 그 사실이 알려지면 얼굴이나 제대로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위대한 존재여!”
혹한의 군주의 비틀린 웃음이 얼음성을 울렸다.
-나는 얼굴을 들고 다닐 일이 없다. 반면 너희 엘프들은 핍박받고 죽임을 당하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고고한 하이 엘프조차 한낱 미물 취급하는 존재께서 그자들에게 어떻게 당하셨는지 잊으신 겁니까?”
혹한의 군주는 과거의 일을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이 지껄여댔다. 그것도 당사자 앞에서!
-하찮은 도발이구나!
“끄아아악!!”
피를 울컥 토해 내던 혹한의 군주는 그 와중에도 날 선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정말 드래곤들이 당신의 소문을 듣고도 같은 동족으로 대해 줄 거라 믿으십니까?”
-그런 불명예는 상관없다. 내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으니.
“그게 무슨?!”
-내 목적은 애초에 네놈 하나뿐이었다.
“끄아아악!!”
콰악-!
여전히 공중에 떠올라 있던 혹한의 군주는 온몸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몸부림치고, 이내 눈을 가렸던 하얀 천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누, 눈이!”
-눈만 가져갈 줄 아느냐?
“끄아아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얼음성을 울리고, 레드 드래곤 반 페르데이스가 혹한의 군주의 사지를 찢었다.
-만년설의 냉기 때문에 이 몸은 내장 안이 모두 썩어 문드러진 상태지. 내 목적은 처음부터 너였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 가거라.
“가, 감히 도마뱀 새끼가!!”
바닥을 기는 하이 엘프는 악에 받친 목소리를 겨우 내뱉었다.
-딱하구나.
“끄아아악!! 죽여 버리겠어!”
-시끄럽기도 하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장내가 조용해졌다.
혀가 잘린 혹한의 군주가 발버둥 쳤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에게로 위대한 존재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고맙구나, 인간이여. 덕분에 평생의 염원을 이루게 되었다.
드래곤이 곁눈질로 혹한의 군주를 바라봤다. 정말 쌓인 게 많았는지, 속이 다 시원하다는 눈빛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대한 존재를 마주한 것만으로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그래, 네놈의 의도는 불순하기 그지없었지. 나를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했으니…….
뜨끔한 나는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전설에 따르면 드래곤은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만약, 드래곤의 심기를 건드려 혹한의 군주 꼴이 나지 않을까 염려됐던 탓이다.
-걱정 말거라 인간이여, 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오히려 마지막 염원을 풀고 갈 수 있게 도와준 네 녀석에게 상을 주려 한다.
나는 뜻밖의 소식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상이라면……?”
푹-!
그리고 이어진 드래곤의 행동에 나는 한 번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굵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자신의 몸을 찌른 것이다.
-이 몸은 이미 만년설의 냉기를 너무 오랜 기간 섭취해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받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나는 빤히 반 페르데이스를 바라봤다. 그가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되었다. 아마…….
“감사히 받겠습니다.”
-좋구나!
뚝. 뚝.
나는 나에게 내민 드래곤의 손을 바라봤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드래곤의 손에 올려진 하나의 물건을.
그것은 역동적으로 뛰고 있었으며, 동시에 차갑게 얼어 있었다.
“처음 본 저에게 너무 과한 것을 주시는군요.”
-어차피 무로 돌아가면 사라질 몸. 무엇이 아깝겠느냐.
몸속에서 심장을 꺼낸 생물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눈빛에 담긴 생기는 빠르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모든 생은 기구한 연이 엮이고 엮여 만들어진다는 말. 명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마나 하트를 집어 들었다. 차가울 줄 알았던 얼어붙은 심장은 의외로 미온이었다.
아마 안에 담긴 용암 같은 기운이 만년설의 온도조차 내리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격동하는 심장을 바라보고는 크게 경탄했다.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나는 이제 가 보마. 내 모든 것이 담긴 정수이니 소중하게 다루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쏴아아악-!
삭풍과도 같은 바람이 몰아치고, 나는 위대한 존재였던 드래곤이 죽어 가는 과정을 눈에 담았다.
그 해묵은 원한을 푼 드래곤의 마지막 모습은 오묘하고도 신비스러웠다.
웅장했고, 가진 원한에 비해 너무나도 심드렁했으며…… 미완의 상태였다.
“끄으으윽!”
혀를 잃은 혹한의 군주의 신음이 들려왔다. 얼핏 보아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하나 그는 아득바득 땅을 기고 있었다.
마치 살아날 방법이 있다는 듯이.
그 추한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구역감이 올라왔다. 나는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데스나이트. 아니, 죽음의 군주를 바라봤다.
내 눈빛이 담은 의미를 단번에 파악한 죽음의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얼음장처럼 얼어 있던 엘프들의 목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저벅저벅.
나 또한 움직였다.
겁도 없이 위대한 존재에게 도전하고, 능멸했던 자를 향해.
양쪽 눈과 사지를 모두 잃은 혹한의 군주를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귀한 걸 얻었는데 밥값은 해야겠지.”
나는 혹한의 군주를 향해 흑운으로 만든 작은 탄환을 날려 보냈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다섯 번의 탄환이 녀석의 몸을 꿰뚫었을 때, 비로소 원하는 알림음이 터져 나왔다.
[보스 몬스터 ‘혹한의 군주’를 처치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혹한의 군주의 목걸이’를 획득하셨습니다.]
…….
미친 듯이 올라오는 알림음이 헛헛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알림음을 뒤로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암살이에 의해 상황은 모두 마무리가 되어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생은 원래 기구한 인연과 인연이 엮여 만들어지는 것. 뜻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하여, 저를 너무 원망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레드 드래곤 ‘반 페르데이스’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 웅장하고도 곧은 자태를 향해 손을 뻗다 멈칫했다.
지금 하려는 행동이 맞는 것인지, 또 혹한의 군주와 내가 하려는 짓이 무엇이 다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던 탓이다. 드래곤의 말처럼 내가 순리를 어그러뜨리는 것이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짧은 순간 참 많은 생각이 오갔다.
하지만 결국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강해져야만 한다!’
영혼 수리공 김수민에게 들은 마족의 침공. 예정된 천지훈의 배신. 그 외에도 강해져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쳤다.
스승님이 다쳐 돌아왔을 때,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마음속 약속이 불현듯 떠올랐다.
‘강해질 기회가 왔을 때는 물불 가리지 않고 갖겠다!’
그 마음속 다짐을 상기시킨 나는 결심을 굳혔다.
손을 마저 뻗으며, 나직이 외쳤다.
“활력.”
[활력을 사용하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였다.
[‘레드 드래곤’을 등록하시겠습니까?]
나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을 설정하여 주십시오.]
“반 페르데이스.”
위대한 존재의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레드 드래곤 ‘반 페르데이스’를 등록 중입니다.]
…….
[대상의 상태가 온전치 않습니다.]
[신체 능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
[대상과의 ‘격’의 차이가 극심합니다.]
[신체 능력이 대폭 감소합니다.]
[대상의 영혼이 당신의 수족이 되길 거부합니다.]
[충성도가 대폭 하락합니다.]
듣기 싫은 알림음이 미친 듯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등록을 진행했다.
[속성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부여 가능 속성 – 뇌(雷), 빙(氷), 흑운(黑雲)]
이 과정에서 나는 멈칫했다.
상대는 레드 드래곤. 용암과 같은 불을 사용하는 드래곤이었다. 그런데 나는 불에 관련된 속성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쉬움이 극에 달했다. 첫째 형에게 염화를 뺏어 오지 않은 것이 이토록 후회스러울 수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어쩌면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선택은 해야 했다.
기회는 이번뿐이다.
[속성을 부여하셨습니다.]
[속성 – 빙(氷)]
[한번 부여한 속성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속성 ‘빙(氷).’을 부여하시겠습니까?]
“……그래.”
최악의 선택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온전한 드래곤을 소환수로 부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속성 부여를 완료하셨습니다.]
[대상과 속성 ‘빙’의 궁합은 최하(最下)입니다.]
[대상의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감소합니다!]
[대상이 새로운 힘을 부여해 준 주인에게 큰 분노를 느낍니다.]
[대상의 격이 한 단계 하락합니다.]
듣기에도 어질어질한 알림음이 귓가를 스쳤다. 그와 동시에 눈앞 레드 드래곤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은 온통 분노였다. 그럴 만했다. 자신을 능욕한 것도 모자라, 레드 드래곤에게 빙 속성을 부여했으니…….
[소환수 ‘반 페르데이스’가 주인과의 대화를 요청합니다.]
거부했다.
그러고는 녀석이 더욱 분노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먹어 봐.”
내 손에는 하얗게 얼어붙은 레드 드래곤의 심장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