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64화
64. 설원 속 미치광이(3)
팀의 유일한 힐러인 미켈은 여전히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쪽부터!!”
“시발! 사지 절단된 거 아니면 부르지 말라고 했지!! 포션 없어?”
다소 원색적인 욕설이 날아들었다.
미간을 찡그린 미켈은 동료의 상처를 확인하고는 품에서 꺼낸 포션을 상처 위로 퍼부었다.
“끄아아악!!”
어깨를 깊게 베인 동료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선 미켈은 1m가 넘는 바늘을 부상당한 설원 오크의 목에 찔러 넣었다.
“질긴 새끼들. 몸의 반이 날아갔으면 뒤져야 할 거 아니야!”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은 미켈은 바늘을 빼내고는 눈에 빛을 잃은 설원 오크를 발로 찼다.
그러고는 혈투를 벌이는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직 초반부야 이 새끼들아! 웬만한 건 가지고 있는 포션으로 해결해!!”
거친 표현이었지만,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이번 레이드는 장기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고, 난이도 또한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미켈의 마나였다.
그녀의 힐과 바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전쟁을 지속할 수 있냐 없냐의 차이와 같았다.
“누가 또 미켈 누나 심기를 건드린 거야!”
왼손에 부목을 댄 조반니 바가렐라가 상처 입은 설원 오크를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전 아닙니다.”
“저도요.”
“보나 마나 루카의 엄살이겠지.”
목숨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도 침착한 대답이 들려왔다. 개중에는 실없는 농담도 섞여 있었다.
안토니오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불리한 전세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녀석들의 노력이 썩 기특한 탓이었다.
안토니오는 또 한 마리의 설원 오크를 꿰뚫으며 소리쳤다.
“아직 시작도 안 했어! 긴장해!!”
마스터의 외침에 롱기누스는 기세를 끌어 올렸다.
지금껏 베어 넘긴 것은 온전치 않은 9마리의 상처 입은 설원 오크들뿐이었다.
아직 11마리의 멀쩡한 설원 오크들이 이빨을 들이밀며 서 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크롸라락!!
어느새 롱기누스 팀을 둘러싼 설원 오크들의 포효가 설원을 가득 메웠다.
오금이 저릴 듯한 포식자의 울부짖음에 롱기누스의 기세가 위축됐다.
그 미묘한 변화를 느낀 안토니오 바가렐라는 롱기누스의 창을 부서질 듯 움켜쥐기 시작했다.
그에 반응에 진동하는 신물 롱기누스의 창.
일렁이는 금빛 오러가 안토니오의 전신을 감쌌다.
“설마 롱기누스가 저런 머저리들한테 쫄기라도 한 건가?”
동료를 향한 도발에 즉각 반응이 나왔다.
“아닙니다!!”
안토니오는 일제히 터져 나오는 대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온 힘을 창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끄윽!”
터질 듯 부푼 근육이 얼마나 힘을 몰아넣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몰아!”
무엇을 할지 예상한 부대장 피에로가 소리쳤다. 팀원 셋이 한곳으로 공격을 날렸다.
누군가는 투척용 단검을, 누군가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화염 마법을, 누군가는 동그란 쇠구슬을.
설원 오크들은 하찮은 공격을 코웃음을 치며 피해 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롱기누스 팀이 원하는 것이었다.
“지금!”
“나도 알아!”
피에로의 외침에 안토니오가 소리쳤다.
쿠구구구구-!
파앙-!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리고, 롱기누스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단순한 내지르기.
그러나 결과만큼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일직선상으로 겹친 설원 오크들은 모두 찢어발겨지며 사라졌다. 위력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공격. 롱기누스 창이 가리킨 곳에는 오직 절망이 드리울 뿐이었다.
일격에 세 마리의 설원 오크가 목숨을 잃었다.
갑작스러운 동료의 죽음에 놀란 설원 오크들은 거리를 벌렸다.
“역시 대장!”
“이제 남은 건 아홉 마리다! 할 수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가장 먼저 튀어 나간 것은 부대장 피에로였다.
피에로의 움직임에 롱기누스 전체가 뒤따랐다.
압도적인 공격에 당황한 지금이 최고의 공격 기회였다.
롱기누스의 창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팀장 안토니오의 속은 곤죽이 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팀원은 없었다. 그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 주는 것 또한 팀이 할 일이었다.
“죽지 마라!”
“넵!”
안토니오는 동료들을 향해 소리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 *
자신감 있는 대답과는 달리,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미켈과 안토니오를 제외한 전원이 설원 오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13대 9의 싸움. 수적으로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적은 규격 외 던전에 보스로 나타나는 녀석들이었다.
아무리 그 유명한 롱기누스 팀의 일원이라도, 일대일로 설원 오크를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크윽! 대장은 이런 녀석들을 일격에 날려 버리다니. 얼마나 괴물인 거야?’
설원 오크의 거대한 도끼를 막아 낸 조반니는 인상을 찡그렸다.
설원 오크를 같이 상대하던 동료는 가슴이 깊게 베여 이미 실신 상태.
조반니는 왼쪽 손을 다친 상태에서 혼자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 새끼들이 감히!!”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쾅-!
도끼와 검이 맞부딪치자 손끝이 저릿했다. 튕겨 나간 손을 따라 몸이 비틀어졌다.
어느새 세워진 얼음 방벽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는 이미 틀렸겠군.’
얼음 방벽의 너머의 그림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처참히 찢기고, 도륙당했겠지.
어쩌면 산 채로 잡아먹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쾅-!
짧은 상념을 떨쳐 낼 수밖에 없는 무자비한 공격이 다시 들어왔다.
조반니는 가까스로 막으며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손바닥이 찢겼다.
다시 공격이 들어왔다.
무기를 놓쳤다.
그 순간 조반니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는지, 설원 오크는 누런 이를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녀석.
거대한 몸집에 의해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죽는다……!’
짧은 생각. 길게 늘어지는 주마등.
조반니 바가렐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푹-!
살을 파고드는 파육음이 귓가를 찌르듯 들려왔다.
어디지?
목을 베였나? 아니면 팔이 잘렸나?
과도한 아드레날린 분출로 통증이 늦게 찾아온다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느껴지는 감촉이 없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검은 머릿결이 눈에 들어왔다.
칠흑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손을 내미는 사내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얼떨결에 일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이자가 왜?
턱.
“우리 팀이 아니라 이런 말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나타난 사내가 손에 무기를 쥐여 줬다. 상처 난 손바닥에 아릿하게 통증이 전해져왔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동양인의 말에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빨리 싸워, 이 새끼야! 동료들 죽일 셈이야?”
* * *
“후.”
깊게 숨을 내쉰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설원 오크들의 잔해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이래서 도와주기 싫었는데…….”
넋 나간 얼굴로 빤히 바라보는 시선들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다들 나에게 한 번 이상은 도움을 받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커흠.”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한데…… 당신…… 정체가 뭐예요?”
롱기누스의 힐러 미켈의 물음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천외천의 수장 천도윤인데요.”
“아니, 그런 걸 물어보는 게…….”
“됐어.”
미켈의 말을 끊은 것은 다름 아닌 롱기누스의 수장 안토니오 바가렐라였다.
녀석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다. 네 덕분에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전투를 마칠 수 있었다.”
“고마워해야지. 나는 누구랑은 다르게 레이드 하는 동안에는 너희를 같은 팀이라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안토니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더 이상 우리를 지켜 줄 수 없다며 거드름을 피운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됐어.”
“그보다, 너희는…….”
안토니오 바가렐라는 내가 만들어 낸 얼음 방벽을 바라봤다. 일순 롱기누스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만 넘어왔으니, 나머지 둘은 전사했다 생각하는 건가?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옆쪽으로 느껴지는 희미한 인기척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마침 오네.”
내가 손을 뻗은 곳에는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여인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다.
거대한 방망이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롱기누스의 일원들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저렇게 보니까 진짜 악귀 같네.”
짧은 감상평을 마친 후,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부축해 주며, 롱기누스 팀이 모여 있는 곳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러자, 미켈이 다가가 그녀에게 힐을 시전했다.
“와, 우리한테는 포션으로 해결하라더니…….”
“닥쳐라. 천외천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었어.”
날 선 미켈의 일침에 불만을 토로하던 롱기누스의 루카가 입을 헙 다물었다.
더해 동료를 잃은 사람에게 그게 할 말이냐며, 다른 팀원의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료를 잃어?’
* * *
“아, 살 것 같네요.”
힐을 받고, 눈을 이용해 피를 닦아낸 박한별이 개운하다는 듯 늘어지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잘 도망쳤습니까?”
“네, 어찌나 빠르던지, 지현 씨가 더 날뛰기 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어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크큭댔다.
“개새끼들.”
해맑게 미소를 주고받는 우리에게 대뜸 욕설이 날아들었다.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날아든 욕설.
나와 박한별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김진희가 혐오스러운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동료를 버리고 온 게 자랑거리라고 떠들어?”
분노가 일렁이는 김진희의 눈빛을 발견한 롱기누스 팀은 깜짝 놀라 김진희에게 물었다.
“제니! 무슨 일이야?”
한참을 씩씩거리던 김진희가 말했다.
“저들이 동료를 버리고 온 게 자랑이라는 듯 떠들어 대잖아!”
영어로 소식을 들은 롱기누스는 믿기 힘들다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래서 아까…….’
“웃어?”
돌연 날아든 오욕을 씻기조차 귀찮았다. 나는 김진희를 무시한 채 박한별에게 말했다.
“한번 확인하러 갈까요?”
“좋죠.”
박한별은 빙긋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방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롱기누스 팀 중 몇몇은 무기를 꼬나쥔 채 우리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그중에는 김진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방벽의 가장 끝자락으로 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뒤따라온 롱기누스 팀 역시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와락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안 됩니다.”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뜬금없는 저지에 롱기누스 녀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일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 이는 역시 김진희였다. 그녀는 더욱 찡그린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다.
“도윤 씨, 이제 끝났어요.”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있던 박한별이 말했다. 그제야 나는 들었던 손을 내려놓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얼음 장막을 돌아나가자 정신이 돌아온 천지현이 눈에 들어왔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멍청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는 모습.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박한별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크흑.”
“크크.”
“너희들!! 동료가 죽었는데…… 어?”
뒤따라 얼음장벽을 돌아 나온 김진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와 천지현을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며.
* * *
그날 밤.
우리는 사과를 받았고,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술잔을 나눴다.
비록 추위를 잊기 위한 독한 술 한 잔이 전부였지만, 부딪치는 잔에 많은 감정이 오갔다.
미안함, 의아함, 부끄러움.
자신의 섣부른 예단에 대한 속죄가 잔에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꼈고, 또 괜찮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짧은 자축 뒤엔 더 큰 시련이 남아 있는 법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불침번의 눈을 피해 흑운을 몸에 두른 나는 설원 오크가 넘어왔던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언덕의 정상에 도착한 나는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부락이었다.
설원 오크가 득실득실하게 모여 있는 오크들의 마을.
그곳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녀석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앞으로 지옥이겠군.”
나는 설원 오크 부락의 구조를 눈에 담은 후, 야영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는 두 기의 시신이 있었다.
불침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