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63화
63. 설원 속 미치광이(2)
처음에는 후발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숨겼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레이드에서 한 번 정한 규칙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인정받고 역할 분담을 나누는 것이 레이드에 있어 훨씬 이득이지.’
그런 점에서 조금 전 일은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본의 아닌 박한별의 활약으로 천외천의 이미지가 조금 바뀌었다.
일전에는 방해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면 이제는 같이 싸우는 동료로서 조금씩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다.
나는 분노를 조금 가라앉힌 박한별을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갑자기 왜……?”
“잘해서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박한별에게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공간 마법이 걸린 배낭에서 꺼낸 물건을 건넸다.
방한 마법이 걸려 있는 외투였다.
천지현은 이미 가문에서 준 규격 외 던전용 키트를 뜯어 방한 외투를 두른 채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보다…….”
박한별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여자랑 아는 사이에요?”
나는 놀란 눈으로 계속해서 박한별을 바라보는 롱기누스 팀의 제니, 그러니까 한국 이름으로 김진희를 가리켰다.
“아니요?”
박한별은 전혀 아니라는 듯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했다. 저 눈빛, 무기를 쥔 박한별의 달라진 기운을 보고 놀랐다기엔 과한 감이 있는 반응이었다. 마치 믿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진희에게 다가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설원 오크의 공격이 날아들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빠르게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설원 오크는 우리를 사냥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녀석들이 다가오게 만들어야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한 안토니오가 턱에 손을 가져댔다.
“어떻게? 적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은 적이 던진 도끼에 우리의 사지가 뜯겨 나가거나, 공포에 떨어 반쯤 미쳐 있을 때뿐일 텐데.”
“아니, 한 가지가 더 있다.”
나는 안토니오를 빤히 바라봤다.
“뭐지?”
“우리가 적의 공격을 완벽히 봉쇄했을 때다.”
“그건…….”
“설원 오크를 상대했던 적이 있다. 녀석들은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어.”
썩 믿기 힘든 말이었다.
조금 전 목격한 설원 오크들은 여느 몬스터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녀석들이었다. 참을성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사냥감을 조이며 천천히 공포에 질린 얼굴을 음미하는 스타일처럼 보였다.
안토니오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는지, 설명을 더했다.
“공격이 막히자, 소리 지르는 것 보지 않았나? 녀석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으면 금세 짜증 낸다.”
“네 말이 맞다고 치자. 수도 없이 기습이 날아올 텐데 모두 막아 낼 자신 있어?”
내 물음에 안토니오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우린 바가렐라다. 문제는 너희…….”
“우리는 천가다.”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다.
한참을 노려보던 안토니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썩 믿음이 가진 않지만, 명색의 천가인데 믿어 보도록 하지.”
나를 바라보며 의문을 지우지 않는 안토니오 바가렐라였지만, 애써 분란을 조장하지 않으려는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너희가 레이드 했던 100m 던전은 어느 수준이었지?”
일순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녀석이 얄미웠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던전의 난이도를 파악하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조금 전 상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목숨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안토니오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중반쯤 갔을 때, 나오는 수준이 설원 오크 10마리 정도였다.”
천차만별이긴 했으나, 대부분 던전의 난이도는 뒤로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 상식이었다. 나는 녀석의 대답으로 현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힘들었나?”
“동료 하나가 죽고 둘이 은퇴했지.”
안토니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그런데 지금은 초반에 20마리라…….”
독백처럼 읊조린 나의 대답에 안토니오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솔직히 말하지.”
고개를 끄덕이자, 안토니오의 무거운 입술이 움직였다.
“많이 죽을 거다. 어쩌면 전멸할지도 몰라.”
심해처럼 깊게 내리깔린 목소리가 나를 압박했다.
비관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옳은 판단이기도 했다.
유난히 힘들었을 지난 100m 규격 외 던전과 비교해 봐도 지금의 상황이 훨씬 좋지 않았을 테니까.
“너희는 운이 좋군.”
“그게 무슨……!?”
그게 무슨 개소리냐며 미간을 와락 구기는 안토니오에게 나는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단, 피해!”
콰앙-!
엄청난 굉음이 귓가를 울렸다.
나보다 한발 늦게 적의 공격을 감지한 안토니오 바가렐라의 손엔 어느새 신물이라 불리는 롱기누스의 창이 들려 있었다.
“빌어먹을!”
가까스로 날아오는 도끼를 튕겨 낸 안토니오가 소리쳤다.
“돌아간 지 얼마나 됐다고!”
크롸라라락!!
언덕 위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야영을 준비하던 롱기누스 모두 무기를 빼든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멀리서 도끼를 든 설원 오크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런 이를 보이며 춤까지 춰 보이고 있었다.
명백한 도발.
팀원 중 한 명이 기분이 상했는지, 안토니오를 향해 소리쳤다.
“마스터! 그냥 쓸어버리면 안됩니까?”
“대기하라고 했지!”
단호한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유독 강압적으로 보이는 그의 태도에 나는 물었다.
“그의 말대로 그냥 가서 사냥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조금 전 보이던 설원 오크는 정확히 스물세 마리였다. 하지만 그게 다라고 볼 순 없어.”
“저 녀석들이 일부를 숨겼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래, 저 녀석들은 의외로 영악해.”
안토니오 바가렐라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견해였다.
동료를 잃는 것 보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착실히 적을 소탕해 나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방법이었으니까. 말하자면 정공법이었다.
“함정을 팔 생각이다.”
“함정?”
또다시 날아오는 거대한 도끼를 쳐 낸 안토니오는 자신의 생각을 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 * *
하루가 흘렀다.
돌연 날아오는 기습을 별 무리 없이 쳐 낸 날이었다.
이틀이 흘렀다.
역시나 별 무리 없이 공격을 막아 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롱기누스 팀의 무력은 더욱 수준 높은 경지였다.
사흘이 흘렀다.
적의 공격이 없었다. 기뻐할 일이었지만, 야영지 내에 기뻐하는 이는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나흘째가 되던 날이었다.
안토니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조급해하며 거리를 조금 더 좁힐 거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언덕 위로 설원 오크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무려 마흔일곱이었다.
우두두두.
녀석들은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설원 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온다!! 전투 준비!”
누군가 소리쳤다.
호승심 가득한 품성을 그대로 드러내며 누런 이빨을 보이는 설원 오크들이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달려들었다. 반면, 롱기누스 팀과 박한별은 압도적인 적의 숫자에 모두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유일하게 평온을 유지하는 것은 나와 천지현뿐이었다. 적의 살의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천지현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일순 소름이 돋았지만,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이상, 싫으나 좋으나 그녀의 힘은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 상황을 주시했다.
롱기누스는 이미 진형을 만든 채였다.
중무장한 안토니오 바가렐라를 선두로 창 모양의 진영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그 모양만으로 나는 그들이 무엇을 할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꿰뚫는다!’
중구난방으로 설원을 가로지르는 녀석들의 중앙을 뚫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나는 흥미로운 얼굴로 그들을 지켜봤다.
눈빛을 느꼈는지, 안토니오가 소리쳤다.
“천외천! 무운을 빌지.”
“고맙군. 너희도 죽지 마라.”
“……꿰뚫는 창이여! 가자!”
“우! 우!”
마지막 기합을 신호로 롱기누스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양쪽으로 거리를 좁히자, 순식간에 롱기누스와 설원 오크들이 맞닥뜨렸다.
속도를 줄여 롱기누스를 포위하려는 설원 오크들과 달리, 롱기누스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력을 올렸다.
신물(神物) 롱기누스의 창끝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롱기누스의 진영을 모두 감싸기 시작했다.
팀원 모두의 몸에 은은한 금빛의 기운이 감돌았다. 동시에 엄청난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깜짝 놀라 주춤거리는 설원 오크와는 달리 롱기누스는 여전히 달려드는 중이었다.
콰아아아앙-!
듣기 힘든 충돌음이 솟아나고, 눈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하나의 창이 된 롱기누스가 지나간 곳에 검붉은 선혈이 낭자했다.
4마리가 즉사했고, 7마리가 회복하지 못할 만한 중상을 입었다.
이 모든 것이 단 일격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크롸라락!!
분노를 내비치는 설원 오크를 향해 다시 한번 롱기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으로 갈라놓은 진영의 오른쪽이었다.
이번에는 다섯이 죽고 둘이 다쳤다.
그다음 번에는 겨우 둘뿐이었다.
공격 패턴을 읽은 설원 오크가 넓게 산개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이 막힌 롱기누스는 순식간에 진영을 변경했다.
개개인이 무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형태.
더없이 자유로운 형태였지만, 빈틈없는 진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견해일 뿐, 설원 오크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적의 무시무시한 공격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설원 오크들은 흉흉한 기세를 뽐내며 롱기누스 팀에게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눈을 거둔 뒤, 그들이 남기고 간 왼쪽 진영을 바라봤다.
열여섯 마리의 설원 오크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롱기누스 팀을 향해 달려갈 기세였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래도 밥값은 해야지.”
활력을 활성화시킨 나는 그들의 길목을 막았다. 갑자기 생겨난 얼음 기둥에 당황한 설원 오크들은 시선을 돌려 우리를 찾아냈다.
“그래 여기다!”
내가 소리치자 녀석들이 달려들었다. 고약하기만 할 것 같은 입을 쩍 벌린 채였다.
“적이 너무 많은데 괜찮을까요?”
박한별은 걱정스러워하는 눈치였고.
“다 죽여 버려도 돼?”
천지현은 기대를 잔뜩 품은 얼굴이었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나는 상반된 두 여자를 바라보며 입매를 들어 올렸다.
“괜찮을 겁니다.”
“응, 쓸어버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지현은 붉은 안광을 뽐내며 설원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박한별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벌써 눈이 돌아간 동료를 말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물음을 던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검지를 펴, 한 곳을 가리켰다.
“박한별 씨, 저 녀석들 허리춤에…….”
박한별의 시선이 돌아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들의 허리춤을 살핀 그녀의 시선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도깨비방망이를 그러쥐었다.
“개새끼들이!”
설원 오크의 허리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들의 물건이었다.
작게는 스카프부터, 크게는 인간의 머리뼈까지.
그들은 마치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인간에게 빼앗은 전리품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분노한 박한별은 천지현과 마찬가지로 적진을 향해 뛰어들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향해 손을 뻗은 뒤,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넘쳐 나는 힘을 느꼈는지 도깨비방망이를 드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저 멀리 ‘광기의 도살자’의 특성과 스킬 ‘피의 연회’를 동시에 사용한 미치광이가 날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어 합류한 한국의 도깨비가 눈에 들어왔다.
피아 식별 없이 칼을 휘두르는 천지현의 공격을 피해 가면서도, 도깨비불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며 적의 두개골을 착실히 부숴나가는 귀신(鬼神)!
야차(夜叉) 박한별이 광기의 도살자와 합을 맞춰 설원 오크들을 썰어 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