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56화
56. 천외천(天外天)(1)
[오로치의 검]
등급: 전설
능력: ??
설명: 이지를 가진 존재로, 검신의 길이 변화가 자유롭다. (현재 주인을 잃은 상태)
상태를 확인한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살기 위해 검신을 살랑살랑 흔들면서도 나를 주인으로 허락하지는 않는 모습이 어이가 없던 탓이다.
주인이 되지 못해서인지, 능력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나는 아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 소매에 녀석을 쑤셔 넣은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시급한 일은 이것이 아니었다.
스승님이 있던 자리로 도착한 나는 곧장 스승님을 살폈다.
안색이 많이 좋아진 모습.
스승님조차 고작 한 병만 가지고 있던 명약이라 그런지, 확실한 효과를 자랑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직 위독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빠르게 조치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나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끝내야, 치료든 뭐든 할 수 있다.
* * *
특성을 봉인 당한 채 카토가의 인원들과 몰려드는 시미즈가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을 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고군분투하고 있을 아버지와 철용을 도와주기 위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은 걸음이었다.
쑥대밭이 된 카토가의 입구.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던 것은 오직 철용과 아버지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철용은 가문의 피를 이어받지 않아 저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능력의 절반 이상이 봉인 당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 정도라니…….
새삼 영혼을 찾아드린 게 뿌듯한 순간이었다.
나를 바라본 아버지가 말했다.
“미안하구나.”
결투 도중 시미즈 사토히로를 놓친 것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능력이 봉인된 채로 저 많은 인원을 상대했다. 만약 그곳에 사토히로까지 껴 있었다면 크게 다치는 것은 스승님이 아닌 아버지였을 테니까.
애초에 녀석을 잡아 두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스승님이 많이 다치셨습니다.”
내 말을 들은 아버지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스승님의 상태를 확인하신 아버지의 미간이 좁혀졌다.
“철용.”
“예, 가주님.”
“부셔라.”
천태산이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저주의 성배였다.
보랏빛으로 변한 101명분의 피가 펄펄 끓고 있는 성배를 철용은 망설임 없이 공격했다.
흑마법계의 성물이라 불리는 귀한 것을 망설임 없이 부수는 모습에 나는 작게 입을 벌렸다.
“안 가져가십니까?”
“우리가 저것을 쓸 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100명의 혈족 피를 요구하는 괴이한 물건. 모든 일 중 가문이 1순위인 아버지는 절대 저런 물건을 사용하실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게 먼저다.”
아버지의 말씀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천태백의 몸에 무언가를 불어넣는 모습이었다.
담담한 듯 행하는 모습이었지만, 내가 볼 때는 그 모습이 꽤 처절해 보였다.
저주의 성배가 깨지고 특성 천가의 피가 돌아오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엘릭서의 힘이 이제야 제대로 돌기 시작한 것인지 천태백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벌어졌던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고, 흐르던 피가 멈췄다.
모든 것이 좀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목숨은 괜찮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낮은 음성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도 아버지도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다.
아무리 목숨을 건졌다 한들, 다시는 이전의 기량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살아남은 카토가와 시미즈가의 사람들, 그중 누구도 접근할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려들지도, 그렇다고 가문을 내버려 둔 채,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
나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전쟁은 끝이다! 돌아가라!”
한국말로 외친 것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알아듣는 분위기였다.
공격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눈치챈 듯 그들은 다친 가문의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시야에서 거두고 다시 스승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많이 야윈 몸.
핼쑥해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콕 쑤셔왔다.
“이제 돌아가자꾸나.”
“예,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저주의 성배를 부수고 복귀하는 철용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천도윤!!”
아버지의 고함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확인해야 했다. 그가 배신자인지 아닌지.
“이곳에 오는 것은 저희 넷, 그리고 가문에서 총력전을 준비하는 척 연기하는 작은아버지가 답니다. 맞습니까?”
철용은 싸늘하게 내려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은 흑운과 내가 침투할 것은 물론, 동선까지 꿰고 있었습니다. 우연입니까?”
내 물음에 아버지의 눈이 커졌다.
“신호탄이 유독 빨리 터진 이유가…….”
“예, 적들은 저희를 속이기 위해 위장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아버지의 눈빛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말하라, 철용.”
“저는 아닙니다.”
담담한 철용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다면 천태수가 배신자인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아닙니다.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도 담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눈빛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거짓말을 하거나 당황을 한다면 응당 보여야 할 반응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가 막힌 연기인지, 진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때, 철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의 죽음으로 의심이 풀린다면 그리하시지요.”
철용은 목숨줄을 쥐고 있는 내가 아닌, 아버지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말했다.
“손을 내리거라, 도윤아.”
나는 고민했다. 지금 이 손을 내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조금 더 추궁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결국, 나는 천천히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 연기이든 진실이든, 당장 배신자를 찾아낼 방법은 없었으니까.
“사과는 하지 않겠습니다.”
“가문을 위한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빙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철용의 모습에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철용이 배신자일 수도, 작은아버지인 천태수가 배신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적의 능력으로 알아낸 것일 수도 있었다.
어느 가능성 하나 배제할 수 없었다.
철용에게서 손을 거둔 나는 조심스럽게 스승님을 들쳐멨다.
“그만 가시죠.”
찝찝한 감정을 몸에 가득 실은 채 귀국했다.
* * *
가문으로 돌아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결연한 의지로 전쟁을 준비하는 가문의 사람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정문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듯 지친 표정과, 남루한 복장.
어딜 보더라도 전쟁을 준비 중인 인간들의 몰골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주님!”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호들갑 떨며 달려오는 이는 다름 아닌 천지훈이었다.
살의가 피어올랐다.
분노에 넘실거리는 눈을 한 채 당장이라도 녀석을 향해 쏘아 나가려는 나를 말린 것은 옆에 서 있던 철용이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겨우 살기를 거두어들였다.
전투 중 천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미리 말해 둔 터라, 아버지 역시 이 사건에 천지훈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당장 벌을 물을 법도 하건만, 아버지는 조용히 천지훈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행색이…….”
시치미를 뚝 떼고는 걱정하듯 말하는 모습이 연기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발군이었다.
경멸이 담긴 시선을 보낸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녀석의 떠보기에 넘어가 줄 생각도 없었을뿐더러, 큰아버지의 치료가 우선이었다.
나는 미리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의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옮기는 중 등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은 끝났다. 다들 일상으로 복귀하도록!”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 * *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천지훈 말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가주전에 앉아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낸 천지훈에 대한 처분. 가문의 존폐에 있어 가장 중대한 사안이었다.
아버지도 천지훈의 정제되지 않은 야망이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는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놔둘 생각이다.”
“아버지!!”
높아지는 언성에도 아버지는 굴하지 않았다.
“지켜볼 생각이다. 녀석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또 어디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말이다.”
아버지의 대답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천가의 가주인 아버지는 썩은 살을 모두 도려낼 심산이었다.
그 의지가 짙게 배어 나오는 음성을 마주하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지요.”
내 대답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다.”
돌연 날아든 소리에 아버지를 바라봤다.
“감시자를 색출해 내는 일. 네가 했으면 하는구나.”
“네? 제가 뭐라고…….”
“앞으로는 네가 흑운이다.”
밑도 끝도 없는 선언. 그 황당한 소리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스승님이 병중에 있다고 한들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형님도 동의하신 일이다.”
“스승님이 깨어나셨습니까?”
화들짝 놀라 묻자,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다.”
“허…….”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사경을 헤매던 양반이 깨어나고 나서 가장 먼저 한다는 소리가…….
내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쳐다본 아버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런 말도 하더구나.”
“어떤……?”
“감히, 딸을 끌어들이다니, 일어나면 죽여 버리겠다고…….”
일순 온몸의 털이 솟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저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뼛속까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아버지에게 물었다.
“막아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아버지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저 지금 진지합니다.”
“나도 진지하다. 형님은 그 누가 와도 못 말린다.”
끌끌대는 아버지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색출 작업은 혼자 하시지요.”
“뭐라?”
“죽으면 끝인데, 그전까지는 마음껏 놀랍니다.”
내 안하무인의 태도에 아버지는 피식 웃고는 말했다.
“커흠, 말은 해 보마.”
그제야 나는 방긋 웃을 수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확실하게 막아 주리라. 그리 생각한 나는 배신자의 색출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아버지에게 물었다.
다시금 진지하게 돌아온 아버지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가문을 키워 보고자 한다.”
“그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문의 위세가 높아지고 명성이 극에 달하면, 녀석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낼 터. 그때가 되면 점점 녀석에게 붙어 있는 녀석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겠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인 말이기도 했다.
“가문의 위상이 높이고자 하면 높일 수 있는 간단한 것이었습니까?”
황당한 소리에 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바라봤다.
“그 역시 너에게 맡기고자 한다.”
“제가 무슨 자판기입니까?”
욱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묻자, 아버지의 미소가 짙어졌다.
“요즘 너의 행보를 보면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안달 난 것처럼 보이던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언제…….
“팀을 만들고 있지 않더냐?”
아버지의 질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버지의 정보력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던 탓이다.
조금 더 조심해야겠다 생각한 나는 물었다.
“팀을 만드는 것과 가문의 위상이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있지, 아주 많이.”
나는 조용히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야 간단하다. 강함을 보여 주면 되는 일이지.”
“그것은 저도 알고…… 아!”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했다. 앞으로 이어질 아버지의 말도…….
“강함을 보여 주는 일은 간단하다. 강한 적을 쓰러뜨리면 되는 일이지.”
“레이드…….”
“그래, 모든 강한 적은 게이트로부터 나온다.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느냐?”
천진오의 천지(天地), 천지훈의 천파(天破). 모두 세계를 돌며 레이드를 하는 하나의 팀이었다. 아버지의 말은 그들처럼 팀을 꾸려 세계로 나가 위상을 떨치라는 말이었다.
‘슬슬 때가 되었다고는 생각하긴 했는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팀 창설을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해진 이름이 있느냐?”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몇 번이고 생각했던 그 이름을 자신 있게 외쳤다.
“천외천(天外天)입니다.”
다소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 이름이 천가의 가주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