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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54화 (54/175)
  •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54화

    54. 침투(3)

    노부유키는 그대로 들고 있던 칼을 던졌다.

    몇 번이고 흑운을 베어 가며 붉게 물들인 자신의 검이었다.

    포물선보다는 일직선에 가깝게 날아가던 검은 사방에 선혈을 흩뿌리고 있었다.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내비친 흑운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어딜!!”

    노부유키는 쓰러진 검사의 검을 빼 들더니, 흑운을 향해 강검을 휘둘렀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한 흑운은 더 이상의 공격을 허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는지, 몸을 틀어 공격을 흘렸다.

    “크윽!”

    그러고는 다시 몸을 놀리려는데.

    “이미 늦었어.”

    노부유키의 맹공이 쏟아졌다. 그 공간을 찢을 듯한 맹렬한 공격에 흑운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노부유키 역시 이어진 흑운의 공격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지만, 미소만큼은 지워지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

    결국 날아간 검은 새빨간 피를 가득 머금은 채 거대한 성배 옆, 땅을 뚫고 파고들었다.

    성배 옆을 지키던 카토가의 수호대원이 땅에 박힌 검을 빼 들었다.

    “작동시키겠습니다!”

    쩌렁쩌렁한 외침에 노부유키는 소리쳤다.

    “빨리!!”

    수호대원은 망설임 없이 노부유키의 칼에 묻은 흑운의 피를 성배 안에 털어 넣고는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금빛 성배가 진동했다.

    동족 100명의 피.

    그 속에 떨어진 단 하나의 이질적인 혈.

    성배에 모인 피들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를 이루는 것 같더니, 또 몸을 틀어 빈 공간을 만들었다.

    그 작은 공간 안에 떨어진 것은 다름 아닌 흑운의 피 몇 방울이었다. 오물을 배척하기라도 하듯 거리를 두는 카토가의 피.

    카토가의 피는 하이에나처럼 흑운의 피를 툭툭 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맹렬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뒤섞인 피는 사투를 벌이듯 뒤엉키더니, 이내 보랏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크으윽!!”

    흑운이 심장을 쥐며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노부유키는 광소를 터트렸다.

    “크하하하!!”

    천태백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노부유키를 노려봤다. 그러나 노부유키는 즐겁다는 듯 칼을 쓰다듬을 뿐이었다.

    “네놈들의 그 오만한 피를 봉인했다.”

    “…….”

    흑운은 말없이 노부유키를 노려봤다.

    “받을 만하다 하였느냐?”

    노부유키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다시 한번 받아 보려무나.”

    촤아악-!

    새빨간 피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혈액이 땅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온몸을 크게 베인 흑운의 육신이 휘청거렸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노부유키는 천천히 흑운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가는 어차피 우리 카토가에게 무너질 운명이었다. 겸허히 받아들이거라.”

    결과를 모두 예측한 듯 우월감에 젖은 표정을 짓는 노부유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반응과는 정반대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다 죽어 가는 노인네. 춤추듯 휘청거리는 비루한 몸뚱이에서 흘러나온 것은 다름 아닌 비웃음이었다.

    “……끌끌.”

    “웃어?”

    이마로부터 흘러내린 피가 그의 눈을 적시고 있었다.

    지옥에서 올라오기라도 한 듯 붉게 물든 눈.

    그 섬뜩한 광경에 노부유키는 한 발 물러나고 말았다. 무의식중에 움직이면서도 그는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죽어 가는 노인이다.

    무엇이 그리 겁나서…….

    인지하고 나자, 참을 수 없는 치욕감이 온몸을 덮쳤다. 거북한 느낌을 애써 떨쳐 내고 검을 들어 올렸다.

    “죽기 전에 할 말은 없느냐?”

    상념을 떨쳐 낸 노부유키의 검은 강직했고, 또 무심했다.

    당장이라도 자신의 숨통을 끊을 것처럼 찌르르 울리는 검을 바라보며 흑운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혈통에도 격이 있다고.”

    노부유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네깟 놈이 이제 와 무얼 할 수 있다고!”

    노부유키가 악을 쓰듯 소리쳤다.

    천가가 자랑하는 사기적인 특성 [천가의 피]는 저주의 성배를 통해 모두 봉인된 상태였다. 철인 같은 힘도, 곰과 같은 맷집도, 귀신 같은 스킬의 운용도 모두 날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왜…….

    노부유키는 흑운의 태도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끌끌, 혈통에도 격이 있다면 기술에도 격이 있지 않겠느냐?”

    다 죽어 가는 몸뚱이와는 다르게 또렷하고도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 무슨 소릴……!”

    “직접 맛보거라, 격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 순간 천태백의 몸이 검은 안개로 휩싸였다. 노부유키는 한 발 물러섰다.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챘기 때문이다.

    자신의 팔을 갈아 버렸던 그 힘. 상상하기도 싫던 그 끔찍한 힘이 눈앞에서 다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 * *

    “미친!”

    재빨리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카가가각.

    검과 흑운이 맞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자아냈다.

    “크윽!”

    “공명을 쓰지 못하니 나약하기 그지없구나.”

    비웃음 섞인 조롱이 들려왔다.

    노부유키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따랐던 40명의 가주원은 이미 절명한 지 오래. 이쪽으로 다가오던 인원들 역시 검은 흑운의 힘에 가로막혀 접근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도와줄 이도, 상황을 뒤바꿀 이도.

    상황을 인지한 노부유키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간 느꼈던 죽음의 공포보다 아득히 짙은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을 애써 물리쳤다.

    그때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염동력이 없으면 스킬을 사용하지 못할 줄 알았느냐?”

    노부유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을 흑운으로 두른 천태백을 노려보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이었다.

    “강인한 육체가 사라지면, 네깟 놈에게 베일 줄 알았더냐?”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음성에 노부유키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해저 깊은 곳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노부유키는 검을 들었다.

    ‘더 이상 기세에서 밀린다면 안 된다!’

    주도권을 더는 뺏길 수 없다는 조급함에 노부유키는 일검을 내질렀다.

    카가가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검이 튕겨 나왔다.

    “벨 수 있다면 베어 봐라.”

    “닥쳐라!!”

    포효하듯 내뱉은 노부유키는 다시 검을 내질렀다.

    카가가각-!

    다시!

    카가가가각!

    또다시!

    노부유키는 검을 내지르고 또 내질렀다.

    “허, 허억.”

    그러나 빠르게 회전하는 검은 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천가(天家)다.”

    묵직한 무게가 실린 음성.

    작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목소리였다.

    노부유키는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동시에 생각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저 칠흑의 어둠을 피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고.

    “빠가야로!!”

    원통한 마음으로 소리친 노부유키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 * *

    노부유키의 머리가 하늘을 날았다.

    왼쪽 팔을 잃은 사내의 육신이 그대로 허물어졌다.

    명백한 천태백의 승리.

    그러나 흑운의 힘은 조금도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기세가 늘어났다. 미친 듯이 올라간 흑운의 힘이 한 곳으로 향했다.

    터엉-!

    일본의 2대 명가 카토가의 수장 노부유키의 목을 절단했던 그 어마어마한 힘이 누군가에 의해 너무나도 쉽게 막혀 버렸다.

    천태백의 눈이 커졌다.

    “이래서 쓰레기들이란…….”

    모욕적인 언사가 날아들었지만, 그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앳돼 보이는 외형. 가느다란 팔. 작은 키의 찢어진 눈. 천태백이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시미즈 사토히로…… 네 녀석이 여길 어떻게?”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 녀석은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녀석이었다. 저 녀석은 지금 천태산과…….

    “아, 처음엔 우리 애들이 버거워하길래 도와주고 있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뱀과 같은 눈을 가진 사토히로는 검지를 펴 입구 쪽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엄청난 굉음이 쏟아져 나오고 있던 곳. 바로 가주 천태산과 철용이 싸우고 있는 곳이었다.

    성배가 발동하면서 입구를 틀어막고 있던 천태산이 밀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천태백은 생각했다.

    ‘최악이군.’

    짐짓 심각해진 흑운의 모습을 바라본 사토히로는 킬킬 웃기 시작했다.

    “당신, 얼마 전에 데뷔했다고 들었는데 은퇴가 너무 빠른 거 아냐?”

    “누가 은퇴한다더냐?”

    미간을 찡그린 천태백이 소리쳤다.

    어린아이같이 웃기 시작한 시미즈가의 젊은 가주 사토히로가 말했다.

    “죽으면 은퇴 아닌가?”

    그 장난스러운 물음에 천태백은 소름이 돋았다. 세로로 쭉 찢어진 뱀과 같은 사토히로의 눈동자에 온몸이 경직되는 느낌이었다.

    장난스러운 물음이었지만, 그 안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진짜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천태백은 자신을 집어삼킬 듯한 무거운 살기를 느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몇 달은 굶은 허기진 아나콘다의 똬리 안에 붙잡힌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죽 흘렀다.

    “헛소리!”

    몰려드는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해 소리쳤다.

    “크큭!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어.”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뿐이었다.

    비릿한 웃음을 지은 사토히로의 검이 날아들었다. 피를 너무 흘린 탓인지 시야가 희미했지만, 검을 향해 흑운의 힘을 날렸다.

    “……!”

    흑운은 미간을 찡그렸다.

    마땅히 들려야 할 충돌음이 들리지 않았다.

    애써 시야를 잡으며 전방을 주시하자, 놀라운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내지른 사토히로의 검이 뱀처럼 휘어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피한 채 유려하게 꺾여 들어오는 공격. 검의 기이한 행태는 전투 경험이 풍부한 흑운조차 난생처음 목격하는 것이었다.

    늘어난 검신이 흑운을 향해 쇄도했다.

    천태백은 출혈로 인해 떨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타이밍에 맞춰 옆으로 몸을 틀며 공격을 흘렸다.

    그러자, 심장을 노리고 곧게 뻗어 나가던 칼은 다시금 방향을 꺾었다.

    그러고는 다시 쇄도하기 시작했다.

    유도 미사일. 그래, 마치 유도 미사일 같은 느낌이었다.

    미간을 찡그린 흑운은 넓은 장막을 펼쳤다. 피하지 못하면 가두면 그만이다.

    흑운을 펼친 천태백은 넓게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천가의 피가 봉인된 탓에 컨트롤은 쉽지 않았지만, 어찌 완성은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쓴다.”

    그때 사토히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울컥 피가 쏟아졌다.

    “검에만 한눈팔더라고, 다들.”

    천태백은 정면을 바라봤다. 흑운에 감싸져 있던 사토히로의 검은 둥둥 떠올라 있었다. 주인조차 필요 없다는 듯 혼자 움직이는 검은 흑운을 뚫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래를 바라봤다. 꿰뚫린 자신의 복부가 보였다. 배를 관통한 것은 다름 아닌 사토히로의 손이었다.

    “쿨럭!”

    “천가의 흑운도 별거 아니네.”

    심드렁한 목소리로 모욕적인 표현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흑운은 반박할 힘도 잃은 채 의식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휘어지는 검에 한눈을 판 게 가장 커다란 패착이었다.

    채 다 자라지도 않은 것 같은 희고 여린 손. 고생 한번 안 해 봤을 것만 같은 백옥같이 고운 그 작은 손이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울컥 쏟아지는 피를 다시 한번 토해 내자,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더해, 숨을 쉬기조차 힘든 느낌이었다.

    흑운은 난생처음으로 생각했다.

    죽는구나…….

    냉혈하고도 잔인한 손이 몸을 빠져나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차가운 바닥이 뜨겁게 달궈졌다.

    말라 있던 땅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회색빛의 땅이 붉게 물들었다.

    점멸하며 사라지는 의식 속에서 천태백은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

    분노에 차 있었고, 익숙했고, 울분에 젖은 목소리였다.

    “……네놈 짓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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