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49화
49. 전조(3)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았다.
그녀의 이름은 천지현.
흑운 천태백의 숨겨진 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차 듣기로 하고, 나는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왜 들어오겠다고 한 거지? 내 소문은 이미 들어 봤을 텐데…….”
물론 얼마 전의 사건으로 날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달라졌겠지만, 여전히 못마땅해하는 시선은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가문 내의 상황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게 아닌 이상 그녀도 이미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그럼에도 왜 그녀가 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가 궁금했다.
복면의 사내는 다른 곳으로 보내 놓은 터라, 그녀는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자리, 저에게 주신다고.”
그녀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 말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눈빛.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입안이 썼다.
‘저를 알아봐 준 도련님에게 감명했습니다’ 혹은 ‘아버지가 선택한 자는 다를 거라 생각했습니다’와 같은 식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솔직하게 대답해 버리니 내심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크흠. 그래, 뭐.”
갑작스러운 제안해 응해 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나는 조급해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
여전히 복면을 쓰고 있어 나는 그녀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그녀에게 얼굴을 보여 줄 수 있냐 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복면을 검은 복면을 풀어헤쳤다.
“어?”
나는 그녀의 외모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어딜 가나 눈에 띌 정도의 화려한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이가 나보다 대여섯은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 어려 보인 탓이었다.
큰아버지의 자식이니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런데 척 보기에도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혹시 나이가……?”
“올해로 스물하나입니다.”
“동갑이구나.”
차기 가주 임명식 이후로 해가 바뀌었으니, 지금 내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를 반가움이 생겨 그녀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말 놓을래?”
그녀는 이번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 모습에 나는 또다시 당황했다.
그녀는 모든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생각이 없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전 느꼈던 그녀의 떨리던 눈빛은 누가 봐도 진짜였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원로와 대등한 위치인 차기 흑운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서로 존댓말을 했었어야 하는 사이였다. 그것보다는 격 없이 지내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했다.
“가문에 요청해 너를 우리 팀으로 빼 올 거야. 그때까지만 기동팀에 있어.”
천지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녀는 물을 것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입을 벙끗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손을 들며 말했다.
“나중에, 지금 좀 바빠서.”
지금은 박윤식 영감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나는 서둘러 윤식 조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만…….”
그때 천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는.
쉬익-!
매서운 공격이 날아왔다.
나는 날아든 투척용 단검을 피한 후 그녀의 목에 손을 가져갔다.
“뭐 하는 짓이지?”
싸늘한 물음에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됐어.”
“뭐?”
“강하잖아. 됐다고, 그럼!”
그 해맑은 미소를 목격한 나는 한숨이 푹 새어 나왔다. 그녀의 미소에서 천태백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고 사악하게 웃던 그 모습이…….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 냈다.
* * *
“또 어디 갔다 온 게냐?”
그사이 손님을 보냈는지 박윤식 영감은 마당에 땔감을 이용해 불을 붙이고 있었다.
“이제 영업방해 안 할 거야. 미안해, 영감.”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박윤식 영감은 그대로 손에 쥔 작대기를 흔들었다.
“아, 미안하다고 했잖아!”
“단골손님 이미 다 떠나갔다. 인마!”
“내가 다시 모아 올게.”
“또 협박하려고?”
“안 그래!”
이대로 가다가는 종일 잔소리를 들을 기세였지만, 왠지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맘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자, 한평생 그리워했던 곳. 이런 곳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일이었다.
영감은 나를 쫓아다니다 지쳤는지, 지핀 불에 호일을 감싼 감자를 집어넣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나도 다가가 영감의 옆에 앉았다.
우리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약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야 영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또 가야 하는 게지?”
“……응.”
짧은 대답. 굳이 사과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가문이 안정되는 대로 나는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으니까.
여기가 내 집이고 터이자, 가장 사랑하는 곳이었으니까…….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을 멍하니 바라봤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산골의 초입에 세워진 윤식 조형. 그 해묵은 풍경에 걸맞은 작은 소음이었다.
“몸조심해라. 다치지 말고.”
무심한 듯 속 깊은 걱정에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그러나 못나게도 나는 평소와 같은 대답을 뱉어 냈다.
“이 몸을 뭘로 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대답하자, 영감은 피식 웃어넘겼다. 그러고는 뜨거운 감자를 들고 있던 막대기로 푹 찔러 내 앞에 내려놨다.
“뜨거우니, 조심히 먹어.”
영감은 다시 새로운 감자를 찔러 자기 앞에 내려놓았다.
“……영감.”
“왜.”
어쩐지 힘이 빠져 있는 적적한 대답에,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말을 내질렀다.
“나 부탁 하나만 합시다.”
“뭐?”
“나 동상 하나만 만들어 주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보다가 영감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은 이미 내 능력을 본 적이 있었다.
[버려진 우마 길드의 동상]
내가 가장 처음 활력을 이용해 만든 녀석이었다. 내 능력을 봤던 영감은 내가 왜 그런 부탁을 했는지 단번에 알아들은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고민하던 영감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뭘 만들어 줄까?”
* * *
어둑해진 카토가의 회의실 안.
검은 안개가 흩날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흑운 천태백이었다.
“애송이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천태백은 테이블 위로 침을 탁 뱉었다. 역시 동생의 말대로 일본은 천가를 노리고 있었다.
천태산은 절대 단독행동을 하지 말라 일렀지만, 동태를 파악하려고 온다는 것이 여기까지 와 버렸다.
동생의 잔소리를 들을 생각에 머리가 아파진 천태백은 다시 한번 엄한 탁상에 다시 화풀이했다.
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싼 탁상인데.”
유창한 한국어가 날아든 곳은 다름 아닌 천태백의 뒤였다. 침실로 돌아가던 척을 하던 노부유키가 몰래 돌아와 천태백의 뒤를 잡은 것이다.
흑운을 거둔 천태백은 놀랍지도 않다는 듯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 정도도 못 알아채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영 실력이 없는 놈은 아니었구나.”
그에 카토가의 가주 카토 노부유키는 눈살을 찌푸렸다.
“겁도 없이 카토가에 침입하다니…… 누구지?”
“네놈들이 찾던 사람.”
심드렁한 그의 태도에 노부유키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끌끌.”
천태백의 웃음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인 노부유키는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노부유키는 웃고 있었다. 그토록 찾던 미지의 인물이 제 발로 찾아올 줄이야……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 돌았군. 여기가 어디라고. 너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끌끌.”
“이제 곧 내 기운을 느끼고 부하들이…….”
이상했다. 자신의 기운에 진즉에 반응했어도 해야 할 수호 단원들과 경비들이 깜깜무소식이었다.
당했나?
아니다, 만약 경비나 단원들이 당했다면 먼저 회의실을 나갔던 미츠히로가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왔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부유키는 주변을 둘러봤다.
바다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먹먹한 느낌.
마치 완전히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었다.
“이제야 느꼈나?”
“이건……?”
“이제 독 안에 든 쥐는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천태백의 사악한 미소에 노부유키는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 이해 못 할 감정에 노부유키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적진에 홀로 들어왔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저 태도. 명백히 카토가를 무시하는 행위라 볼 수밖에 없었다.
“감히 천가 따위가!!”
한껏 분노를 표출하는 노부유키는 온 힘을 끌어올렸다. 살이 에일듯한 무서운 살기. 그를 본 천태백이 중얼거렸다.
“역시 네놈들이 아니었나.”
“뭐라는 거냐!”
“혈통에도 급이 있다는 소리다.”
“그게 무슨…….”
뜻 모를 말을 한 천태백의 독살스러운 기운이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호리호리한 천태백의 육신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긴장한 노부유키는 서둘러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온 힘을 사방으로 펼쳐 천태백의 위치를 찾아냈다.
노부유키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미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노부유키의 감각에 흑운의 신형이 잡히지 않았다. 아니, 잡히긴 했으나, 그 감각이 워낙 미미했다. 조금만 정신력을 놨다가는 순식간에 놓칠만한 정도.
노부유키는 모든 털이 곤두서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두려운가?”
불 꺼진 회의실 안에 울려 퍼지는 스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부유키의 등에 식은땀이 죽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공포였다.
그럴수록 노부유키는 자신의 검을 꽉 그러쥐었다.
검이 노부유키의 힘에 맞춰 공명하기 시작했다.
카토가가 일본의 2대 명가라고 불리는 이유.
카토가의 신들린 검술이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온 정신을 집중한 노부유키는 자신의 검 길이에 모든 초점을 맞췄다.
거기에 맞춰 모든 감각을 축소 시켰다.
그제야 노부유키는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자신의 영역 안에 들어온 모든 것을 베어 버릴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아무리 긴밀한 움직임을 가진 자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아무리 강인한 육체를 가졌다 한들 상관없었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순간 육신이 양단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노부유키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 보거라! 대 일본의 카토가는 스스로를 하늘이라 칭하는 오만한 천가 따위에게는 지지 않으니까!”
그 순간.
슈우욱.
짙은 검은 안개 속에 모습을 숨겼던 천태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태백은 굳은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노부유키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안개가 다시 천태백의 몸을 감쌌다.
“천가의 앞에는…….”
몸을 감추던 이전의 안개와는 달랐다. 천태백의 몸을 감싼 검은 안개는 천태백의 몸 주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오만이란 단어는 붙지 않는다.”
그 속도가 점점 위력을 더해 가고 있었다.
몸을 모두 감싼 흑운의 기운은 마치 태풍을 연상시키듯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천태백은 여전히 걸어가고 있었다.
노부유키의 영역 안으로.
뚜벅뚜벅.
조용하지만 맹렬한 태풍을 뚫고 천태백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천가의 뒤에는…….”
마침내 천태백이 노부유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노부유키는 망설임 없이 온 힘을 다해 칼을 내질렀다.
카가가각-!!
태풍과 검격이 맞부딪치며 소름 돋는 소리를 자아냈다.
천태백을 양단할 기세로 내지른 자신의 검이 막히자 노부유키는 당황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검을 내질렀다.
카강-!
가가가각-!
그러나 모든 검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검은 기운에 막히고 있었다.
노부유키의 얼굴에 당혹이 물들었다.
그때 천태백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위라는 말은 더더욱 붙지 않지.”
그 순간, 노부유키는 느꼈다.
‘죽는다……!’
심해에 빠진 듯한 아득한 공포가 노부유키를 집어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