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37화
37. 지각 변동(4)
기회는 오직 한 번뿐이었다.
녀석이 방심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온몸에 활력을 두르고 흑운의 힘을 개방시켰다.
검은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흑운은 완전히 존재감을 지울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장점은 바로 이것.
“후회하지 마라.”
쾅-!
상대방이 움직였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 평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녀석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혔다.
짜릿한 손맛에 털이 곤두섰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녀석의 면상을 보는 순간부터 끓어오르던 분노는 겨우 이 정도로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닥을 향해 발을 굴렀다.
콰직-!
녀석의 얼굴이 석판을 깨고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다시 한번 발을 굴렀다.
콰직-!
감각이 없었다.
바닥에 깊게 파고든 것은 오직 내 발뿐이었다.
“아…… 시발, 쪽팔리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천지훈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동시에 분노에 휩싸인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게임 끝난 것 같은데?”
“끝나긴 시발!”
녀석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손을 번쩍 위로 쳐들었다.
회색빛의 먹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구르르르-!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큰아버지를 쳐다봤다.
승리의 조건은 딱 한 대.
녀석에게 유효타를 한번 날리는 것뿐이었다.
큰아버지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경기를 중단시키려던 찰나.
“내기에서 진 것은 인정하겠습니다.”
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녀석은 말과는 다르게 계속해서 힘을 모으는 중이었다.
“하나, 경기는 여기서 끝낼 수 없습니다!”
흥분으로 반쯤 정신이 나간 천지훈이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냐?”
천태백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위를 맡기고자 하는 자가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뜬구름 잡는 소문을 철석같이 믿을 바보들이 아닙니다.”
파지지지직-!
하늘 위에 생긴 회색빛의 구름은 당장이라도 번개를 내려칠 것 같은 기세로 널뛰고 있었다.
“꼭 나한테 하는 말 같구나.”
천태백의 눈이 사납게 변했다.
“그래 보이십니까?”
그럼에도 이미 기운을 끌어올린 천지훈은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건방진 놈…….”
“…….”
“그래, 좋다. 한번 붙어 보거라.”
“사부님!”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천태백을 바라봤다.
“재밌어 보이지 않느냐?”
어느새 흥미로운 표정으로 돌변한 흑운은 나와 천지훈을 바라봤다.
“내 제자가 되려면 이 정도 역경은 이겨 내야지.”
“…….”
“시작하거라!”
흑운 천태백은 망설임 없이 뒤돌아 거리를 벌렸다.
나는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봤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그런 요행은 바라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저열한 변명을 대며 대련을 유지시킨 천지훈은 짙은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망가진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생각처럼 보였다.
정신을 차린 나는 녀석을 똑바로 응시했다.
“요행은 무슨…….”
녀석의 발언을 무시하면서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더 이상 조금 전과 같은 상황을 바랄 수는 없었다.
녀석의 말대로 조금 전 일은 요행 혹은 행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녀석이 방심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들어갈 수 없었던 한방이었다.
“허세는…….”
피식 웃은 녀석은 내 왼손을 노골적으로 바라봤다.
“하나는 방어용 스킬이고 나머지 하나는…… 버프용인가?”
녀석의 시선은 내가 끼고 있는 두 개의 반지에 꽂혀 있었다.
“그 정도의 성능이면 하루에 한두 번이 고작이겠지.”
나는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녀석은 이 반지의 용도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보여?”
여유 넘치는 내 모습에 천지훈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자고.”
녀석이 비릿한 웃음을 짓고.
“죽지 마라.”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자.
콰과과광-!!
머리 위로 거대한 낙뢰가 내리쳤다.
하늘 위에 모였던 먹구름이 일제히 나를 향해 번개를 쏟아 냈다.
일대가 부서질 듯 진동하고, 고막이 터질 듯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서 있던 일대가 모두 까맣게 그을렸다.
그만큼 위력적인 전격이었다.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생각보다 성능 좋은 아이템을 얻었나 보군.”
멀쩡히 서 있는 나를 보고 천지훈이 말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녀석은 내가 값비싼 아이템을 이용해 자신의 공격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공격이 막힐 리 없다는 듯, 확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겨웠다.
“……그 입은 내가 기필코 찢어 주마.”
“그래 보든가.”
녀석은 표정을 구기며 손을 쭉 뻗어 올렸다.
나는 천지훈이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녀석이 뇌룡으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기술을 쓰려는 것이다.
나 역시 손을 하늘 위로 뻗었다.
쿠구구구구구-!
하늘 전체가 검은 구름으로 덮였다.
콰르릉-!
위협적인 번개가 내리치고, 검은 하늘에 밝게 빛나는 무언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쿠그그그-!
용의 형태를 한 전격.
뇌룡(雷龍)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죽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가능할지는 모르겠네.”
비릿한 눈으로 천지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그때가 떠올랐다.
녀석이 천우진을 죽이고 나를 죽였던 그 날!
분명, 그날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의 목숨을 벌레처럼 생각하는 저 눈빛.
가족이건 머건 간에 자신의 목적을 방해하는 이가 있다면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저 독살스러운 표정.
악의를 숨기지 않고 표출하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녀석은 미래에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천지훈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콰르릉-!
대기가 진동하고, 뇌룡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달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녀석과 똑같이 손을 뻗었다.
콰르릉-!
대기에서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란 눈을 하는 이는 가주, 흑운 그리고 경지에 이른 소수의 원로들뿐이었다.
대부분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 파악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다.
매섭게 돌진하던 뇌룡이 무언가에 막힌 듯 멈춰 섰다.
쿠구구구.
대기가 울고…….
천지가 진동했다.
천지훈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시 안 되나?’
녀석의 오리지널 기술.
그것을 이런 식으로 따라 하는 것은 역시 무리가 있어 보였다.
점점 힘이 빠져 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크윽!”
뇌룡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젠……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흑운의 힘을 서서히 걷어 냈다.
흑운의 힘이 걷히며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뇌룡.
“저게 뭐야!”
“뇌룡이…… 두, 둘?”
여기저기서 경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나는 시시껄렁한 반응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친 새끼가 감히!”
나의 뇌룡을 확인한 천지훈은 지금껏 보였던 가장 거대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천지훈의 의지에 따라 뇌룡의 크기가 더욱 증가했다.
콰르르르릉-!
여기저기 튀기기 시작한 전격이 대련장을 넘어 관중석의 안위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선을 넘었어.”
분노한 천지훈의 손짓에 수십 마리의 작은 뇌룡이 전진했다.
새끼 뇌룡들은 나와 격돌 중인 뇌룡의 몸에 흡수되어 점점 몸집을 불려 나갔다.
모든 능력이 해금되고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쓸 수 있게 된 나는 흑운의 힘을 뺀 대신 뇌 속성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나의 뇌룡 역시 몸집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지훈이 만들어 낸 뇌룡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크윽!”
확실히 녀석은 나보다 수준 높은 전격을 다루고 있었다.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29층까지 내려가는 엄청난 성과를 냈으니 녀석과 해 볼 만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녀석의 기술은 나보다 적어도 두수는 앞서 있었다.
아직 경험의 차이를 메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천지훈이 만들어 낸 새끼 용 중 몇 마리는 본체에 흡수되지 않은 채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뇌 속성을 두르고 있어 데미지는 거의 받지 않았지만, 신경이 거슬리는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작은 차이가 점점 거대한 힘의 차이를 불러일으켰다.
“이런, 미친!”
어느새 나의 뇌룡이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내가 만든 뇌룡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며 그 몸집을 더해 가고 있었다.
여태껏 보지 못한 재앙 같은 위력이었다.
콰르르릉-!
비대해 질대로 비대해진 뇌룡을 바라보던 천지훈은 나를 바라봤다.
“너는 넘보지 말아야 할 것을 넘봤다.”
“…….”
“따라 해서는 안 될 것도 따라 했지.”
“무슨 말을 하고…….”
“그러니…….”
천지훈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죽어.”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해진 뇌룡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저걸 맞으면…….’
위험했다.
나는 있는 힘껏 자리를 박찼다.
팽창된 허벅지가 찢어져라 뛰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을 피하는 것은 무리라고…….
짧은 순간 생각했다.
‘암살이나 우마를 사용하는 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렇게나 많은 눈이 존재하는 곳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는 싫었다.
판단이 든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전격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 내야 한다.
최대한 적은 피해로!
같은 뇌 속성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완충 효과를 기대해 볼 만했다.
나는 양손을 교차시키고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뇌룡이 나를 덮쳤다.
* * *
삐이이이이-!
지독한 이명이 나를 괴롭혔다.
흐릿해진 시야, 뜨거워진 살갗, 울컥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피.
이 모든 것을 확인한 나는 깨달았다.
‘아, 졌구나……!’
이젠 마지막 공격이 들어올 터였다.
흐릿한 시야가 겨우 녀석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었다.
피지지직-!
전격이 날뛰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이제 곧…….
“혈육을 죽일 셈이냐!”
아버지의 호통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시야가 자리 잡았을 때…… 다급히 소리쳤다.
“쿨럭! 머, 멈춰!”
* * *
“뭘 멈추라는 건지.”
천지훈은 조용히 읊조렸다.
혈육을 죽일 셈이냐고 소리치는 아버지의 말도 무시할 생각이었다.
전투에 심취해 듣지 못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믿지 않으시겠지만 상관없었다.
‘저 녀석은…….’
위험하다.
활력이라는 쓰레기 스킬을 버리고 새로운 스킬을 익힌 것이 틀림없었다.
처음엔 아이템의 효과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인정해야만 했다. 저것은 분명 녀석의 힘이었다.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힘을 되찾은 지 얼마나 됐다고, 천도윤은 자신의 뇌룡을 따라 하기까지 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능력. 게다가 천도윤은 자신과 같은 뇌 속성을 다루는 플레이어였다.
미리 싹을 잘라놔야만 했다.
‘지금이 기회야.’
천지훈은 천도윤의 내부를 엉망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천지훈은 손에 전격을 둘렀다.
그리고 천천히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멈추거라.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이면 죽을 테니.”
흑운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의 음성이 인식됨과 동시에 천지훈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움직이면 정말로 죽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많은 던전을 돌며 숱한 위기를 맞이해 봤지만, 이렇게 서늘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게 흑운인가?’
마치 저승사자가 목에 날카로운 낫을 들이밀고 있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