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의 마굴
숲의 밤은 언제나 그렇듯 적막했다. 고즈넉이 떠 있는 달이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났다. 바람이 흐느끼자 나무가 몸을 떨었다.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세 명으로 출발한 일행이 어느덧 다섯으로 불어났다.
나, 마렉, 리치 일행에 루미와 칼렙이 합세했다.
달그닥!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루미가 볼을 부풀리며 쫑알대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칼렙이 어르고 달래며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정말 같이 가는 거냐?”
마렉이 육포를 씹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하는 수 없지. 지금 싸웠다간 대륙의 공적이 된다.”
“그럼 나중에는 싸우겠다는 거지?”
마렉은 칼렙과 싸우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듯했다.
나는 내 힘의 근원을 모른다고 루미에게 거짓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믿어 주었다.
그렇게 루미의 중재로 충돌 직전까지 갔던 갈등은 극적으로 무마되었다.
“우리는 네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내야 해. 그러니 너와 동행하겠어.”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이름은 루미 프레이.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 님을 모시는 신관. 네 힘이 정말 마력이라면…… 어째서 네게 마력이 있는지 알아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나는 칼렙 브론트.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 님을 모시고 있는 이단 심문관이다. 형씨가 마족이라면, 때려잡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지.”
루미를 보호하기 위해 다가온 칼렙이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나는 예전에 품었던 의문 하나를 해결했다.
칼렙은 강했다. 하지만 나는 그 강함에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단 심문관.
그랬다. 칼렙이 강한 이유는 바로 신앙이었다.
“음…….”
나는 신음을 삼켰다.
진퇴양난이었다.
작정하고 찾아온 신관과 이단 심문관 그리고 수십 명의 성기사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는 없었다.
파이레스트 신전은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곳 중 하나였다. 그 영향력은 일개 왕국을 넘어 제국에 비견될 정도였다.
다시 말해 충돌은 곧 파멸을 의미했다. 암살 집단인 나이트워커의 표적이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상대는 인류의 3분의 2가 믿고 있는 거대 종교 집단이었다.
나는 루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양고기 스튜는 이제 질렸다니까!”
루미가 밥그릇으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섯 살짜리 꼬마도 하지 않을 음식 투정이었다.
정말로 신관인가.
“그럼 굶으십시오. 그러기에 신전에서 얌전히 계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고생을 사서 해요, 사서.”
장난하듯 신관을 핍박하고 있는 남자는 정말로 이단 심문관인가.
속은 것이 아닌지 기분이 찝찝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길이야?”
결국 저녁으로 6일째 양고기 스튜를 먹게 된 루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비밀이야, 비밀.”
마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차피 따라다닐 건데 알려 줘도 되잖아. 그래야 이 지겨운 양고기 스튜를 얼마나 더 먹어야 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지. 좀 알려 주면 안 돼?”
루미가 애교 있게 웃었다. 마렉이 난처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주변의 성기사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알려 주지.”
칼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스튜 먹기에 열중했다.
“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미각을 잃어버린 어느 바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후르릅! 쩝쩝! 아, 맛있다!”
칼렙이 과장되게 스튜를 먹으며 자신의 미각이 정상임을 당당히 주장했다.
협상이 결렬된 것이 못마땅한지 루미가 추잡한 소리를 내고 있는 칼렙을 구박했다.
두 사람의 만담을 구경하다 물었다.
“언제까지 쫓아올 셈이지?”
“네 정체를 밝혀낼 때까지.”
“그런데 형씨, 설마 아직도 쫓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칼렙이 갑자기 그릇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사사삭!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가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아니었다. 나보다 빨리 인기척을 느낀 칼렙이었다.
강하다는 것은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마음속으로 칼렙의 실력을 한 단계 상승시켰다.
사사삭!
인기척은 주변을 맴돌았다. 성기사들 때문에 쉽게 달려들긴 힘들 것이다.
“나이트워커 놈들인가?”
마렉이 묘하게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
“아마도.”
“결국 들킨 거네.”
“그렇지.”
“그럼 더 이상 산으로 갈 필요가 없는 거네?”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나.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마렉을 보고 있으려니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렉의 말이 옳았다.
수십 명의 성기사들도 모자라, 수백 명일 게 분명한 암살자들에게도 위치가 발각되었다. 더 이상 숨어 다니는 의미가 없었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산을 내려왔다. 마을에서 제일 좋은 식당으로 들어가 가장 비싸고 맛있는 요리를 배 터지게 먹었다. 그 후 마차를 구입하여 느긋하게 여행을 즐겼다.
마부는 리치가 맡았다. 좁은 마차 안에 신관과 같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야 할 것 그리고 숨겨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다.
마차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에르마 왕국으로 가는 길은 오른쪽이었다. 멀리 돌아가게 됐지만 머리를 식히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마차 안에는 루미와 칼렙이 있었고, 마차 밖에서는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말을 타고 쫓아왔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수백 명의 암살자들이 기척을 숨긴 채 우리를 포위하고 있었다.
앞이 깜깜했고,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 후.
예상한 시간을 한참 지나 왕국 에르마에 도착했다.
해결책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한 달 내내 궁리하면서 얻은 결과는 지긋지긋한 두통과 될 대로 되라는 심보였다.
‘나중에 다시 오는 것이 나았을까.’
수천 번도 더 해 본 생각이 에르마에 도착하자 새삼스레 갈등을 일으켰다.
하지만…….
나는 시시덕거리고 있는 신관과 이단 심문관을 쳐다봤다. 저들은 나의 정체를 밝혀낼 때까지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정체.
내 몸에 있는 힘은 마왕의 힘.
설령 마족으로 판명되지 않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회개를 명분으로 고문한다든지, 연구를 목적으로 해부를 한다든지, 어느 쪽이건 말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위험한 것은 바로 리치의 존재였다.
지금이야 각종 위장 마법으로 어둠의 기운을 숨기고 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신관과 이단 심문관을 상대로.
그렇다고 리치를 없애 버릴 수도 없었다. 리치의 소멸은 곧 복수의 실패와 동음이의어였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모두를 이끌고 에르마로 오게 되었다.
마차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넌지시 마굴이 위치한 곳을 쳐다봤다.
마굴의 함정이 귀찮은 파리 떼 전부를 깨끗이 불태워 주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다그닥!
다그닥!
마차가 왕국 에르마의 수도에 도착했다.
마굴은 수도를 감싸고 있는 산맥에 있었다.
* * *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 수 없습니다. 길이 너무 좁습니다.”
리치가 마차를 멈추며 말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펴며 밖으로 나갔다.
싱그러운 공기가 폐에 가득 찼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인사하듯 살랑거렸다. 제국에서 눈과 얼음만 봐 오다 모처럼 신록의 물결을 보니 눈이 부셨다.
좁은 오솔길이 산등성을 타고 구불구불 이어졌다. 산꼭대기 위에 뭉게뭉게 흰 구름이 왕관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 뒤따라오던 수십 필의 말도 걸음을 멈췄다. 성기사들이 말에서 내려 오열 종대로 줄을 맞춰 섰다.
빠르게 인원수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 일곱, 여덟, 아홉.
모두 45명.
파이레스트 신전의 성기사가 대략 200명 정도였으니, 나 하나 잡겠다고 온 것치고는 너무 과한 숫자였다.
그만큼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거나, 아니면 지켜야 될 소중한 것이 있거나, 둘 중 하나가 분명했다.
루미 프레이.
나는 어쩌면 상당히 고위 신관일지도 모를 소녀를 흘끔 쳐다봤다.
사사삭!
숨을 곳이 마땅찮은 좁은 산길이라 그런지 나이트워커 놈들의 인기척이 보다 선명하게 느껴졌다.
“형씨, 저들도 데려갈 건가? 산으로 올라가면 좀 골치 아파질 텐데.”
칼렙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비록 숨을 곳이 별로 없지만 오솔길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면 사방이 은신할 곳 천지였다. 나무 한 그루, 덤불 하나하나가 일일이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럼 달리 방법이라도?”
나는 하는 수 없지 않느냐는 투로 말했다. 본래 노림수가 그것이었으니 이제 와 망쳐 버릴 수도 없었다.
“싸우고 싶어도 저들이 싸워 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나이트워커가 원하는 것은 마굴의 위치였다. 내가 알아서 그곳으로 가고 있는데 괜히 공격하여 산통을 깨 버릴 이유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얌전히 내 뒤를 쫓아오다 마굴의 위치를 확인하고 난 후 그냥 몰살시켜 버리는 것이 훨씬 간편한 방법이었다.
그래서인지 성기사들이 아무리 도발해도 암살자들은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따라오기만 할 뿐이었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방법이 있지 않은가?”
칼렙이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정 찝찝하면 네가 포기하지 그래. 네 말처럼 나중에 다시 감시해도 되잖아. 나는 도망가지도 숨지도 않을 테니 언제라도 아레나로 찾아오라고.”
“……강제로 끌고 가는 방법도 있네. 너무 날 자극하지 말라고, 형씨.”
“해 보든가, 그렇게.”
시선과 시선이 부딪쳤다. 긴장감이 고조됐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불만과 불안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격렬한 감정이 폭발하기 직전 경쾌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안 갈 거야?”
어느새 오솔길 초입까지 걸어간 루미가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이대로는 너무 위험합니다. 다음에 다시…….”
“시간이 없어. 칼렙도 알고 있잖아?”
칼렙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다물었다.
시간이 없다라.
뭔가 결정적인 힌트를 들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정보의 양이 너무 부족해 그다음을 추리할 수 없었다.
결국 칼렙은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대신 루미의 주변을 성기사들로 이중, 삼중 둘러싸 완벽하게 보호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당연히 루미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이번만큼은 칼렙 역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오솔길을 오르는 순서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가장 앞이 나와 마렉과 리치, 중간이 성기사들로 둘러싸인 루미, 후미가 칼렙. 그리고……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나이트워커의 암살자들.
일렬로 늘어선 탓에 오솔길을 오르는 내내 대화가 단절되었다. 사람들의 발소리가 산새의 지저귐과 함께 울려 퍼졌다.
오솔길이 끝나고 인적이 끊긴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도에 나와 있는 마굴의 위치는 산 깊숙한 곳이었다.
현자의 마굴이 에르마 왕국의 수도 쿠이린의 뒷산에 있다는 것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과 함께 정말 등잔 밑이 어두울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 할지라도 이곳은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 않은 수도의 뒷산이었다. 얼마든지 우, 연, 이 발생할 수 있는 장소였다.
과연 현자라고까지 불리었던 마법사가 자신의 무덤을 이런 곳에 만들었을까.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자 갑자기 의심이 깊어졌다.
의심은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절정에 도달했다.
몇 날 며칠 숲을 헤맨 끝에 지도에 표시된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손가락보다 작은 풀들이 몸을 뉘었다. 풀벌레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노란 달빛이 목적지 주변을 환히 비췄다.
텅 빈 공터가 나를 반겼다.
* * *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셈이야?”
마렉이 하품을 하며 물었다. 공터에 자리를 잡고 야영을 한 지도 벌써 3일째였다. 슬슬 심심해할 때가 된 것이다.
마렉에게는 이번 여행이 아마 보물찾기와 같았을 것이다. 때문에 실망에서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마굴의 지도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이 있었고, 마굴의 위치를 알기 위해 쫓아오는 암살자들이 있었고, 마굴에서 얻어 복수에 사용해야 할 현자의 보물이 있었다.
이 감정은 아마…… 미련일 것이다.
“언제까지 죽치고 있을 거야? 슬슬 식량이 떨어져 가는데?”
루미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렉과 루미뿐만이 아니었다. 공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텅텅 빈 것처럼 백지 상태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슬슬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암살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는 인기척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노골적으로 살기를 뿌려 댔다.
마치 게으름뱅이 당나귀를 채찍질하듯, 그렇게 나를 채근했다. 어서 빨리 현자의 마굴을 찾아내라고.
다시 2일이 지났다.
암살자들의 인내심이 마침내 바닥을 드러냈다.
밤이었다. 산짐승은 물론 풀벌레, 바람까지 숨을 죽인 밤이었다. 고요함 속에 작디작은 핏빛 살기가 새싹처럼 잉태되고 있는 밤이었다.
폭풍 전야와 같은 밤.
죽음과 같은 적막을 뚫고 낯선 바람 소리가 울렸다.
휘융!
잠을 자고 있던 성기사가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올렸다. 성기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작은 방패에 화살이 부딪쳤다.
탱!
화살이 튕겨져 나가며 경쾌한 쇳소리를 냈다.
벌떡!
챙!
45명의 성기사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키며 검을 뽑았다. 그러곤 루미의 주변을 에워쌌다.
“이제 와 습격인가?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거지? 뭐, 상관없겠지. 심심했는데 잘됐군.”
마렉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화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는 나무 옆에 세워 놓은 도끼를 들고 숲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쇳소리와 비명이 숲 속의 밤을 어지럽혔다.
“1조, 2조는 루미 님을 지킨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
스릉!
칼렙이 검을 뽑았다.
그때였다.
“아이스 포그Ice Fog!”
나이트워커의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했다.
차가운 안개가 공터를 덮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귀찮게 하는군. 작전을 바꾼다. 1조, 2조는 루미 님을 지키고, 나머지들은…… 알아서 잘해라. 홀리 라이트Holy Light!”
칼렙의 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이 안개를 밀어냈다. 다른 성기사들도 일제히 신성 마법인 홀리 라이트를 시전했다.
화아악!
성스러운 빛에 닿은 안개가 모래성처럼 스러졌다.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성기사들이 본격적으로 암살자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뿌연 안개 너머로 붉은 핏줄기가 솟구쳤다.
나는 나무 기둥에 등을 붙인 채 상황을 주시했다. 당장이라도 안개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개로 가려져 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루미가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싸움은 점차 격렬해졌다. 다행스러운 것은 성기사들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암살자들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차피 이길 수 있다면 굳이 내가 싸워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손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니 나로선 감사할 일이었다.
“크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일시에 안개가 걷혔다. 아이스 포그를 시전한 마법사가 죽은 것이다.
안개가 걷히자, 안개가 숨기고 있던 참상과 역한 비린내가 눈과 코를 찔렀다. 숲 곳곳에 시체가 드러누워 있었다.
승리의 저울추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을 관대하게 용서해 줄 성기사들이 아니었다.
“감히 파이레스트 신전을 적대하다니!”
성기사 중 하나가 분노를 담아 소리쳤다. 그의 검에 심장이 꿰뚫린 암살자가 입을 벌린 채 옆으로 쓰러졌다.
그 순간.
성기사의 몸을 덮고 있던 나무 그늘에서 시커먼 형체가 불쑥 솟아났다.
“당연히 적대할 수밖에. 우리는 달의 여신 파트라체 님을 모시는 자들이니까.”
시커먼 형체가 담담하게 말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암살자의 심장을 터뜨린 성기사가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이 잘렸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암살자들을 학살하던 성기사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기사는 새카맣게 어린 시절부터 힘겨운 수련과 함께 온갖 축복을 받으며 길러진다. 그렇게 완성된 성기사는 기사 중의 기사라고 불리는 제국의 상징, 제국 제1기사단 로열 나이츠에 버금가는 무력을 가지게 된다.
한낱 암살자에게 죽을 리가 없는, 아니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바로 성기사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당연하다는 듯 해치운 사내. 암살자 주제에 성기사들 사이를 당당하게 지나가는 사내. 살기가 깃든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걷고 있는 사내.
나는 그를 쳐다봤다.
그는 마지막으로 만났던 때에 비해 많이 망가져 있었다. 건장했던 체격은 앙상하게 뼈만 남았으며, 그나마 한쪽 팔이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죽을병에 걸린 환자처럼 누리끼리했다.
“왜 그런 꼴을 하고 있느냐는 얼굴이군요. 역시 기억이 안 나나 보지요?”
나이트워커 최고 최강의 암살자 섀도우 헌터 페이든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세 번째 만남이군요. 할 말이 많습니다만, 그 전에 잠시 주변을 청소하기로 하죠. 당신과는 방해 없이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페이든의 몸이 천천히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큭!”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붉은 경고등이 머릿속에서 깜박였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게다가 숲이었다. 사방이 모두 그림자였다. 한마디로 말해 이곳은 페이든을 위한 최적의 전장이었다.
예상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헉! 이, 이건! 큭!”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에 등을 찔린 성기사가 황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의 그림자뿐이었다.
“누구냐! 모습을 드러내…… 크아악!”
서걱!
성기사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다시 자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에 발목이 잘린 것이다. 검이 쓰러지는 그의 목을 꿰뚫었다.
수백 명의 암살자와 싸워 흠집조차 입지 않았던 성기사 두 명이 그렇게 쉽게 황천길로 떠났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페이든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시작하자 성기사들은 우왕좌왕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학살의 대상자가 암살자에서 성기사들로 바뀌었다.
그동안 당한 것을 분풀이하듯 암살자들이 거칠게 달려들었다. 그래 봤자 성기사들을 죽일 수 있을 리야 없었지만 성기사로 하여금 정신을 분산시키는 역할 정도는 충분히 수행했다.
페이든의 검이 그렇게 분산된 집중력을 비집고 들어왔다.
“크악!”
“다, 다리가! 내 다리가!”
“커헉! 여신이시여!”
성기사들의 숫자가 순식간에 절반으로 줄었다.
“모두 물러서라! 루미 님이 있는 곳으로 후퇴해!”
칼렙이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숲 속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성기사들이 루미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루미를 중심으로 다시 재집결했을 때 성기사의 숫자는 18명에 불과했다.
“섀도우 헌터…….”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페이든을 향해 칼렙이 으르렁거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존귀하신 분이여.”
페이든은 칼렙을 무시하고 루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이트워커도 이제 멸망할 때가 됐나 보네. 감히 신전을 적대하다니.”
루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그냥 죽어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쥐도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지요.”
“그래도 결국 쥐는 고양이를 이길 수 없어.”
“과연 그럴까요?”
페이든의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현자 바르디엘의 유산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쥐가 호랑이로 변하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겠지요.”
“현자 바르디엘의 유산? 무슨 헛소리를…….”
루미가 말을 멈추고 입을 쩍 벌렸다.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본다.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이 루미의 부릅뜬 눈동자에 아련히 비쳤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나이트워커가 왜 신전을 적대하면서까지 형씨를 뒤쫓았는지. 왜 형씨가 그토록 이곳에 오고 싶어 했는지. 형씨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루미에 이어 칼렙이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찼다.
나이트워커가 알고 있는 것은 그나마 괜찮았다. 대륙 최고의 암살 길드라고는 하나 어차피 음성적인 조직이었다. 대놓고 활동하지 못하는 만큼 위험이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신전은 아니었다.
만약 신전에서 바르디엘의 유물을 원할 경우 나로선 그것을 지켜 낼 방도가 마땅히 없었다. 대륙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악의 암살자가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세 번째 만남을 기념하여 당신의 걱정을 덜어 드리지요.”
“무슨 뜻이지?”
“이곳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곧 뒤를 따르겠지만 말입니다.”
“건방진 소리!”
칼렙이 발끈했다.
페이든이 피식 웃었다.
“건방진 소리라……. 진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누구인지 알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칼렙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대륙을 통틀어 단 일곱 개만 존재한다고 알려진 최강의 무기 로열 암스.
그중에서도 기묘하기로 이름 높은 암흑의 로브 월광.
페이든은 바로 그 월광의 주인, 로열 암스의 주인이었다. 충분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말쟁이인 것만은 분명해.”
“무슨 뜻입니까, 존귀하신 분이여?”
성기사들 사이에 묻혀 있던 루미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네가 한 말을 지킬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너라면 아마 부정할 수 없을걸?”
“…….”
루미의 말처럼 페이든은 부정하지 못했다.
짤랑!
루미가 옷 속에 감춰져 있던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에 박혀 있는 보석이 피처럼 붉었다.
드래곤의 브레스조차 막을 수 있다고 알려진 절대 방어의 방패.
홀리쉴드Holy Shield.
또 하나의 로열 암스가 루미의 손에서 환히 빛났다.
“여신의 방패!”
화아악!
루미의 외침과 함께 펜던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하늘로 솟구친 빛이 수만 갈래로 찢어진 채 반원을 그리며 떨어졌다. 비처럼 쏟아진 빛의 장막이 루미와 칼렙 그리고 성기사들을 덮었다.
“한번 뚫어 보시지? 거짓말쟁이씨.”
빛의 장막 안에서 루미가 득의만만하게 웃었다.
“……홀리쉴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루미가 고위 신관인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홀리쉴드라니.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로열 암스 홀리쉴드의 소유자는 바로…….
제국에 버금가는 힘을 지닌 파이레스트 신전에서도 정점에 올라서 있는 자, 대륙의 모든 인간을 통틀어 여신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자, 여신의 광휘를 받고 태어나 여신의 권능을 허락받은 유일한 자.
그리고 최강의 암살자조차 예를 차리는 존귀하고 존귀한 자.
나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성녀聖女.”
페이든이 검을 역수로 잡고 땅으로 내리찍었다. 검이 박힌 곳은 나무의 그림자였다. 검날이 그림자 속으로 쑥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진 검날이 다시 튀어나온 곳은 홀리쉴드 안에 있던 성기사의 그림자였다.
“헉!”
예기를 느낀 성기사가 외마디 비명을 삼켰다.
그때였다.
투명한 막이 성기사의 등을 감쌌다.
깡!
검날이 투명한 막에 막혀 허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과연…….”
페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자를 관통한 검을 뽑았다. 그러곤 뒤로 물러섰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성녀 루미 프레이가 싱글싱글 웃으며 페이든을 놀렸다.
페이든은 대꾸하는 대신 허공에 수신호를 보냈다. 숲 속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홀리쉴드를 에워쌌다.
“영원히 그 안에 숨어 있을 수는 없겠지요.”
페이든의 말에 루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홀리쉴드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가졌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적을 물리칠 수 없었다.
시간은 페이든의 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듯 성기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 여흥을 즐기십시오, 존귀하신 분이여.”
페이든이 씨익 웃었다.
“여흥?”
루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주억거렸다. 그러곤 홀리쉴드 밖에 위치해 있는 나를 쳐다봤다.
걱정의 빛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내며 내게 속삭였다.
자아, 이제 그만 너의 정체를 보여 줘.
페이든이 나를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왔다. 어깨에 넘실거리고 있는 살기가 상당히 흉흉했다. 얼굴에는 분노와 흥분이 반씩 섞여 있었다.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것에 대한 감정과 앞으로 있을 전투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게 뒤섞인 것처럼.
나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위험과 머지않은 미래에 나를 옭아맬 위험을 번갈아 쳐다봤다.
고민을 해 봤지만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현재를 넘기기 못한다면 미래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들키지 않기 위해 감추고 감추었던 암흑의 힘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동안 숨죽이고 있었다는 것에 분노라도 한 듯 평소보다 더 거칠고, 더 광포했다.
그렇게 솟구친 마력이 폭발하기 직전.
휘리리릭!
쾅!
숲 속에서 날아온 거대한 도끼가 페이든이 서 있던 곳을 때렸다. 작은 돌멩이와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슬쩍 뒷걸음질 쳐 도끼를 피한 페이든이 어둠으로 물든 숲을 지긋이 노려봤다.
저벅저벅.
어둠을 찢으며 곰 같은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젠장! 다 어디 갔나 했더니 이곳에 모여 있었군. 엄한 곳에서 헤맸잖아!”
마렉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페이든 앞에 우뚝 섰다. 땅에 깊숙이 박혀 있는 도끼를 뽑아 떡하니 어깨에 걸쳤다.
“네놈이 백정 놈들의 대장이냐? 로열 암스의 주인이라며? 한판 붙어 보자.”
나는 피식 웃으며 마력을 가라앉혔다. 잔뜩 성이 난 마력이 주인을 향해 발톱을 세웠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욕망을 억지로 무시했다.
아직은…… 내가 나설 차례가 아니었다.
물론 마렉이 이길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다만 쉽게 패하지는 않으리라.
마렉이 버티고 버텨 페이든의 저력을 조금이라도 들춰 내 준다면, 어쩌면 생각보다 손쉽게 페이든을 무찌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기회를 노려 기습을 하는 수도 있었다. 마렉이 미친 듯이 화를 내겠지만 페이든만 죽일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마력을 들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못 본 사이에 겁쟁이가 되었군요. 겁쟁이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제 자신이 초라해지는군요.”
내 생각을 읽은 페이든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무시했고, 마렉은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네놈 상대는 나다! 한눈팔지 말라고!”
부웅!
도끼가 공기를 갈랐다. 도끼에 서려 있는 푸르스름한 빛이 아름답게 호선을 그렸다.
순간 페이든의 신형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는 멀찌감치 떨어진 나무 그림자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제법이군요.”
“죽어랏!”
마렉이 진각을 밟으며 점프했다. 돌진하는 모습이 마치 미친 소 같았다.
페이든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마렉의 어깨가 나무를 들이받았다.
쾅!
부러진 나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힘은 칭찬해 줄 만합니다만, 그뿐이군요. 실망입니다. 겨우 이 정도로 시간을 끌려 하다니. 진짜 겁쟁이가 된 겁니까?”
예리한 살기가 미간을 찔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실망하긴 아직 이를걸.”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나운 기세가 공터를 휩쓸었다. 두 번이나 허탕을 친 마렉이 악귀와 같은 얼굴로 페이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
페이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망토를 벗어 허공에 던졌다. 달빛을 잔뜩 머금은 망토가 산산이 부서졌다. 과거 동굴에서 보았던 반딧불의 춤사위처럼 은빛 나비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었다.
“댄싱 블레이드!”
나비 떼처럼 마렉의 주위를 맴돌던 천 조각에서 수십 개의 검이 튀어나왔다.
“뭐, 뭐야!”
당황한 마렉이 급히 머리를 감싸 쥐며 몸을 움츠렸다. 수십 개의 검이 마렉의 등에 꽂혔다.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 저와 싸우려 하다니. 어리석은 놈이군요. 이제 당신 차례…….”
“썅! 깜짝 놀랐잖아!”
거친 목소리가 페이든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몇 번씩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넌 내 거다!”
마렉이 움츠렸던 등을 똑바로 폈다.
우드득!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마렉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그의 등에 꽂혀 있던 검이 근육의 반발력에 밀려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동시에 피부를 덥고 있던 회색 바위가 몸 전체로 확산되었다.
“크허헝!”
순식간에 바위 괴물로 변한 마렉이 고개를 젖히며 울부짖었다.
“마족?”
홀리쉴드 안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칼렙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마족 아니거든! 인간이거든!”
쿵!
마렉이 소리를 지르며 힘차게 땅을 굴렀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몸놀림이 변신하기 전보다 몇 배나 빨랐다. 마렉은 도끼를 들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페이든을 향해 내리쳤다.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마렉은 땅에 박힌 도끼를 뽑은 후 뒤로 돌아섰다.
서너 발자국 뒤에 페이든이 서 있었다. 내상을 입은 듯 그의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나왔다. 조금 전 일격을 완전하게 회피하지 못한 듯했다.
“뭐야? 겨우 이 정도 일격에 상처를 입은 거냐? 생각보다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큭! 내 몸 상태가 정상이었어도…….”
“패배자의 변명은 늘 궁색한 법이지.”
페이든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흠…… 그렇단 말이지.’
역시 마렉에게 먼저 싸우게 하길 잘했다. 페이든은 아직 부상에서 회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것인지도 몰랐다. 다크 블레이드로 인한 상처는 결코 쉽게 회복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은밀하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지금의 페이든이라면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마렉의 공격을 피해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다시 튀어나오는 그 찰나의 순간. 바로 그 순간을 노려 달려든다면 페이든이 다시 그림자 속으로 숨기 전 그의 심장에 구멍을 뚫어 놓을 수 있으리라.
부웅!
쾅!
부웅!
쾅!
마렉이 도끼를 들어 세로로 내리찍을 때마다 페이든이 그림자 안으로 쏙쏙 사라졌다. 괜히 땅바닥만 학대하는 꼴이었다.
간혹 페이든이 반격을 개시했지만 바위 괴물로 변한 마렉에게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다.
홀리쉴드 안의 성기사들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흥분한 마렉이 힘을 끌어 올렸다. 마수의 알을 흡수한 이후 회색빛으로 변한 마나가 전신을 감쌌다.
마나에서 느껴지는 어둠의 기운이 성기사들을 자극했다.
“역시 마족인가.”
더 이상은 곤란했다. 빨리 페이든을 해치우고 상황을 진정시켜야 했다.
슈슉!
몰래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언제라도 달려 나갈 수 있도록 몸의 무게중심을 아래로 낮췄다.
페이든의 신형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헉! 헉! 제발 좀 맞아라!”
마렉이 숨을 헐떡이며 페이든을 쫓아다녔다.
페이든의 이동 경로에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나는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아니, 그것은 패턴이 아니었다. 최강의 암살자가 수많은 암살 끝에 터득한 버릇과도 같은 것이었다.
페이든이 나타나는 곳은 마렉을 공격하기 가장 좋은 위치였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쿵!
땅바닥에 발자국이 파일 정도로 진각을 밟은 후 페이든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자 속에서 솟아오른 페이든의 머리가 마렉이 아닌 내 쪽을 향해 있었다. 정면으로 마주 본 채로 그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마치 내 생각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
페이든의 눈동자가 사갈처럼 빛났다.
고오오오!
심상치 않은 기운이 페이든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하늘에서 춤추고 있던 나비 떼가 페이든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다시 합체한 나비 떼가 칠흑의 빛을 발했다.
그리고…….
칠흑의 빛이 그림자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숲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가 주인에게서 떨어져 나와 로열 암스 월광에 흡수되었다.
하늘 위에서 달이 찬란히 빛났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림자를 가질 수 없었다. 주인을 배신한 그림자가 페이든의 머리 위에서 원형으로 뭉쳤다.
거대한 흑구黑球가 어둠을 뿌렸다.
“저, 저것은!”
“설마!”
성기사들이 숨을 삼키며 경악했다. 나는 그들의 놀람을 충분히 이해했다. 가히 다크 블레이드에 뒤지지 않는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어느새 흑구의 모양이 철퇴로 바뀌어져 있었다. 집채보다 커다란 흑구에 뾰족한 가시가 수백 개나 돋아났다.
“끝이다! 블랙 메이스Black Mace!”
시커먼 철퇴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강행 돌파!
철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기운이 몸을 옭아맸다. 성녀와 이단 심문관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에서 증발했다. 마력을 최대로 끌어 올려 오른 주먹에 집중시켰다. 마력 특유의 사악한 기운이 주먹에 어렸다.
주먹을 뒤로 잡아당긴 후 철퇴를 향해 뻗기 직전.
“안 돼! 그것은!”
루미의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누구에게 하는 경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늦었다. 출발한 주먹을 멈출 수는 없었다.
“홀리쉴드!”
눈부신 빛이 철퇴와 주먹 사이를 가로막았다. 빛의 장막을 사이에 둔 채 철퇴와 주먹이 맞부딪쳤다.
콰앙!
철퇴와 주먹과 빛의 장막이 충돌하는 순간.
화아아악!
찬란한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정지했다. 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쨍그랑!
하늘과 땅이 바닥에 떨어뜨린 유리처럼 깨어졌다.
“크아아아!”
누군가의 절규를 시작으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남은 것은 어둠뿐이었다.
* * *
“으음…….”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거운 납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필사적으로 몸을 뒤척여 봤지만 납덩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을 때.
“꺄악!”
새된 비명이 울렸다.
힘겹게 눈을 뜨자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바닥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여자를 집어 던지다니. 야만인.”
나를 노려보고 있는 루미를 무시하고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마치 빛으로 도배된 방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툭!
빠져나갈 곳을 찾기 위해 방 안을 거닐려 할 때 뭔가가 발에 차였다.
페이든이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서 자세를 잡았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루미가 말했다.
“죽었어.”
그러고 보니 가슴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페이든의 시체를 살폈다.
특별한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한 탓에 죽은 것이리라. 그만큼 페이든의 필살기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페이든 옆에 로열 암스 월광이 구겨진 채 놓여 있었다. 슬쩍 손을 뻗어 월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잘 접어 품속 깊숙한 곳에 넣었다.
“헤에…….”
루미의 시선이 뒤통수를 찔렀다. 마치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멋쩍었다.
“여기가 어디지?”
루미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물었다.
“나도 모른다.”
“알고 있을걸.”
묘한 확신이었다. 반박을 하기 위해 입을 열기 직전 작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나는 좀 더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폈다.
어쩌면 이곳은, 그토록 찾아다녔던 그곳일지도 몰랐다. 바로 현자 바르디엘의 마굴 말이다.
“네가 마지막에 썼던 그 힘, 마나라고 하기엔 너무 사악하고, 또 광포한 그 힘…… 마력이지?”
행동을 멈췄다.
결국 들키고 말았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력의 정체를 알아본 이가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미를 쳐다봤다.
“갈등하고 있네. 나를 죽일지, 말지. 그 갈등이 너를 살린 줄 알아.”
루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오히려 나를 협박했다. 그 치기 어린 협박에 피식 웃고 말았다.
나는 살기를 지웠다. 생각해 보면 그녀를 죽일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방어 능력이 있었으니까.
물론 다크 블레이드라면 어떻게 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우선은 현자의 마굴을 조사하는 것이 먼저였다.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벽을 찾기 위해서였다. 걸어도 걸어도 벽이 만져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큰데.”
“뭐 하고 있어? 제자리걸음?”
고개를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루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페이든의 시체가 누워 있었다.
“마법인가.”
궁금해하는 루미에게 겪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녀는 양손을 앞으로 뻗은 채 열 발자국 정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리고 획 뒤를 돌아봤다.
“진짜네.”
루미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곳이 어딘지 정말 말 안 해 줄 거야?”
말을 해 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무시하고 방 안을 조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내 집이다.”
섬뜩!
차가운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페이든의 시체가 있는 쪽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것은 루미였다. 그녀는 내 뒤쪽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나는 앞구르기로 자리를 이탈했다. 다시 자세를 잡고 루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쳐다봤다.
시선이 닿은 곳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건방진 표정으로 서 있었다.
“따로 소개는 안 해도 되겠지? 여기까지 왔으면 내가 누구인지 정도는 알 테니까.”
소년이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바르디엘…….”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소년이 못마땅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존칭이 없는 것이 마음에 안 들지만 어쨌든 멍청이는 아니군. 그래, 내가 바로 바르디엘. 9레벨 마법을 익힌 최초의 마법사다.”
“현자 바르디엘? 설마 이곳은…….”
루미가 경악했다.
그녀의 놀람이 가라앉기도 전에 바르디엘이 손을 흔들었다.
“방해꾼이 있군.”
바르디엘의 손짓에 맞춰 빛이 움직였다.
“어? 어?”
빛이 루미와 페이든을 감쌌고, 빛이 사라졌을 때 그들 역시 사라졌다.
“어디로 간 거지? 죽였나?”
몸을 긴장시키며 물었다.
“밖으로 쫓아낸 것이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격을 갖춘 사람뿐이니까. 그리고 너는 그 자격을 갖추었으니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다.”
바르디엘이 나를 향해 걸어왔다.
나는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멈춰. 더 이상 다가오면 공격하겠다.”
“흐음. 그게 마왕의 힘인가. 과연 굉장하군.”
내 경고를 무시하고 바르디엘이 계속 다가왔다. 소년의 말이 진실이라면 소년은 9레벨의 대마법사였다.
마굴은 마법사의 무덤. 자신의 무덤에 침입한 도굴꾼을 마법사가 어떻게 생각할지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바르디엘을 자극하지 않는 범위에서 슬쩍 어깨를 밀었다.
쑥!
손이 어깨를 뚫고 지나갔다. 어깨에서 시작된 파동이 소년의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치 물가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한차례 일렁거린 바르디엘이 다시 정상의 모습을 되찾았다.
“환영?”
나의 손은 여전히 바르디엘의 어깨를 관통해 있었다.
“그렇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바르디엘의 사념이지.”
바르디엘이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무거운 침묵을 깨고 그가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