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각
아레나의 역사는 근 200년에 달했다. 그 유구한 세월 동안 아레나는 단 한 번도 타의적으로 문을 닫은 적이 없었다. 아레나의 문은 오직 아레나가 원할 때만 닫혔다.
그 200년의 역사가 무너졌다. 그것도 무려 석 달간이나.
“망했나?”
“설마. 사람들이 드나들던데?”
“그럼 대체 왜 문을 닫은 거야?”
“나야 모르지. ……진짜 망했나?”
도박을 하지 못해 금단증세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열 번씩 아레나를 찾아왔다. 그러곤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문 앞에서 수군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 아레나 안으로 들어왔다.
항상 소란스럽던 아레나가 마치 황량한 벌판처럼 조용했다.
대륙 최고의 투기장 아레나가 문을 닫은 이유.
그것은 바로 투기장에 반드시 있어야 할 자원, 다시 말해 투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두침침한 복도 위에 적막함이 내려앉았다.
뚜벅뚜벅.
함성이 멈추지 않았던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은 공허한 발소리뿐이었다.
관객석으로 올라가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텅 빈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살기와 광기로 얼룩진 장소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사방이 고요했다.
이곳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고, 몸이 떨렸다. 한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율이었다.
복수를 꿈꾼 이래 처음으로 가능성이 눈에 보였다. 여전히 희박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말도 못 하게 확률이 올라갔다.
휴멜은 천재였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의 나라면, 아니 무한의 마력을 이용한 다크 블레이드를 극한까지 갈고닦은 몇 년 후의 나라면, 어쩌면 휴멜을 꺾을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휴멜과 일대일로 싸웠을 경우에는 말이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놈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다. 지금은 백작이지만, 몇 년 후에는 일국의 왕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에는 황제가 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전쟁에서 패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든가.
그렇게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법석을 부리다 성공하면 절대로 건드릴 수 없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망나니의 도끼에 목이 잘릴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내가 낄 여지는 없었다.
“……아레나.”
나는 경기장을 찬찬히 내려다봤다.
절대로 불가능했을 복수의 길에 반딧불의 불빛이나마 빛을 비춰 준 곳.
문득 3개월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적무도 토벌대를 몰살시킨 후, 거짓 부상을 입은 채 아레나로 돌아온 그날, 기다렸다는 듯 대륙의 간부들이 아레나로 모여들었다.
치명적인 부상으로 병약해진 것을 틈타 나를 최대한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분노와 좌절, 고통과 패배감을 연기하며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을 속여 넘겼다.
그 결과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투기장 연합은 적무도 배신자와의 전쟁을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했다.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숨기기 위함이었다. 만장일치였다.
또한 배신자를 토벌하기 위한 전쟁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이 안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가결되었다.
“아레나는 더 이상 여력이 없습니다. 다음 전쟁 때 필요한 투사는 다른 분들이 준비해 주십시오.”
나의 한마디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00여 명의 투사와 S 등급 투사 하나 그리고 블러드 배틀의 우승자가 참전한 전쟁이었다. 투기장 연합의 주력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절한, 생존자가 단 한 명뿐인, 전멸에 가까운 패배였다.
다시 투사를 모아 적무도로 쳐들어간다 해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륙 최고의 투기장이 한순간에 대륙 최악의 투기장으로 변모하는 것을 목도한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은 모험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투기장 연합의 위신이…….”
“그렇습니다. 잘못하다간 건방진 투사들이 너도나도 들고일어날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아직 적무도의 배신자들이 버젓이 살아 있습니다. 전쟁의 결과를 숨기고 싶어도 그들이 있는 이상 언제 어느 때 들통 날지 모를 일입니다. 진짜 개망신은 그것입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배신자들을 적무도에 아예 가둬 놓는 것입니다. 적무도 주변에 배를 주둔시켜 그들이 적무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새로운 제안을 듣자마자 탐욕스럽게 생긴 대머리 간부가 톡 쏘아붙였다.
“배를 몇 척이나 그리고 얼마나 주둔시켜야 합니까? 1년, 2년? 아니면 10년? 배를 주둔시키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 아이디어를 제안하신 분께서 내시겠지요?”
대머리의 비꼼에 제안을 한 간부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섬 하나를 배로 감싸기 위해선 최소 수십여 척의 배가 필요했다. 게다가 배마다 타고 있어야 할 사람과 그들이 먹을 식량 등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제안은 슬그머니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네.”
대머리 간부가 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1,000명이 넘는 투사가 몰살당했다고 들었네. 그 와중에 어떻게 자네만 살아났는지 궁금하구먼.”
대머리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마치 제가 죽었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나는 분노를 연기하며 대머리를 쳐다봤다.
“그런 뜻이 아니라네. 다만…….”
“다만, 뭡니까?”
“물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아레나지만, 다른 투기장들의 피해 역시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네. 누군가는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누군가는 말일세.”
대머리가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다른 간부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우리를 쳐다봤다. 어색한 기류가 회의장에 내려앉았다.
나는 분노를 가장하기 위해 몸의 근육을 일시에 긴장시켰다. 근육이 오그라들면서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일부러 입고 온 하얀 옷이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들었다.
“자, 자네! 피, 피가…….”
투사 출신이 아닌, 그래서 피에 익숙하지 않은 간부들이 크게 당황했다. 투사 출신인 대머리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쾅!
나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손을 적시고 있던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옆에 앉아 있던 간부들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책임을 지지. 나 혼자 적무도로 가겠다. 그리고 배신자들을 노예로 만들어 네 앞에 대령해 주지. 그러면 되겠지?”
싸늘한 기운이 회의장을 훑고 지나갔다. 반말을 지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대머리가 기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다.
회의장의 문을 닫자마자 일그러진 인상을 펴고, 거칠어진 숨을 차분히 다스렸다. 그러곤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웰런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웰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일주일 후.
나는 최소한의 선원만을 데리고 적무도로 향했다.
그리고 두 달 후 이마에 노예 인장을 찍은 투사 100여 명을 이끌고 대머리를 찾아갔다.
대머리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노예들을 이끌고 휙 돌아서는 나를 향해 대머리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어, 어딜 가는 것이오? 배신자들을 처형해야 할 것 아니오?”
“처형?”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들은 이제 내 노예들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나의 재산에 손을 댄단 말입니까?”
그동안 꾹꾹 감춰 놓은 마력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휘오오오!
거친 바람이 주위를 휩쓸었다. 바람이 멈추자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는 주저앉아 있는 대머리를 향해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그대로 몸을 돌렸다.
넘어져 있던 100여 명의 노예들이 주섬주섬 몸을 추스르며 내 뒤를 쫓아왔다.
대륙 최고의 투기장 아레나가 오롯하게 내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아레나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사를 불렀다. 마법사를 이용해 부하들의 이마에 새겨진 노예 인장을 깨끗이 지워 없앴다.
그렇게 적무도의 투사들은 배신자의 낙인을 지우고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메이어가 흥분한 기색으로 물었다.
“아레나를 다시 대륙 최고의, 아니 역사상 최고의 전무후무한 투기장으로 만들어야지. 앞으로 많이 바빠질 것이다.”
아레나의 투사들은 대부분 적무도에서 목숨을 잃었다. 굴러 들어온 돌이 제대로 자리를 잡기 위해선 터줏대감들이 사라져야 했다.
그것이 바로 적무도를 토벌하러 갔던 1,000여 명의 투사 중 절반 이상을 아레나 출신으로 채운 이유였다.
아레나를 지탱하던 500여 명의 투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내 부하들이 채운다. 비록 숫자가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개개인의 능력은 예전 투사들의 그것을 크게 상회했다.
설령 그렇지 못한 투사가 있다손 치더라도 리치의 마법을 이용한다면 짧은 시간 안에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터였다.
100여 명의 투사를 주축으로 아레나를 재건할 것이다. 그렇게 재건한 아레나를 주축으로 투사들만의 조직을 만들 것이다. 투기장 연합과는 다른 투사들만의 조직을 말이다.
아마 용병 길드와 같은 형태가 되리라. 아마 세는 크지 않지만 결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소수 정예의 조직이 되리라.
아레나의 문은 닫힌 지 정확히 100일 후에 다시 열렸다.
새로 개장한 아레나에 새로운 규칙이 생겼다.
투기장에서 투사는 소모품에 불과한 존재였다. 경기의 승패에 따라 패자의 생사가 승자에게 달려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승자는 패자를 죽였다. 관객들이 피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투사는 투사를 죽여야만 했다.
아레나는 그러한 관례를 깨뜨렸다. 승자의 권리나 다름없는 패자의 생살여탈권을 빼앗은 것이다.
경기 중에 상대를 죽일 수도 없거니와 마법사와 신관을 경기장에 항시 대기시켜 부상을 당한 투사를 신속하게 치료해 주었다.
만약 경기 중에 고의로 상대를 죽였을 때는 투사의 자격을 빼앗고 아레나에서 쫓겨나야 했다.
당연하게도 사람들의 반발이 거셌다. 기존의 투기장들 역시 반발했다.
전자는 치열함이 떨어져 재미가 없어진다는 것이 이유였고, 후자는 목숨을 사리느라 투사들의 실력이 하향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아레나에서 새로운 규칙을 실행한 지 한 달 만에 모든 불만이 쏙 들어갔다.
적무도에서의 경험과 리치의 헬 오브 인피니티 마법을 통한 수련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한 100여 명의 투사들이 매일같이 생사투에 버금갈 만큼 격렬하게 경기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그것 역시 수련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사정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눈에는 수준 높은 투사들이 벌이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투기장 역시 평균을 훨씬 웃도는 투사들의 실력에 입을 다물었다.
100여 명의 도움으로 인해 아레나의 새로운 규칙은 빠르게 정착되었다. 사망자는 새롭게 받아들인 투사들의 경기에서만 간혹 발생했다.
새로운 규칙은 부하들의 실전 감각을 키워 주면서 동시에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호 장치였다.
보호 장치가 제대로 정착하자 예상대로 대륙의 실력 좋은 투사들이 모여들었다.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아도 되며, 다른 투기장에 비해 경기 수당을 몇 배나 높게 지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거의 이윤을 남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윤을 남길 필요가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몰려온 투사들 중 최대한 옥석을 가려 아레나의 투사로 정식 고용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더딘 작업이었으나 몇 개월이 흐르자 조금씩 가시적인 성과가 쌓이기 시작했다.
100여 명으로 시작한 아레나의 투사가 어느새 두 배로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나는 메이어를 불렀다.
“무슨 일입니까?”
마수의 알을 흡수한 이래 메이어는 수련에 중독됐다. 체력이 부족하여 시도조차 해 볼 수 없었던 호엔레른 백작가의 검술을 원하는 대로 펼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희열을 안겨 주었다.
“빨리 말해 보십시오, 대장.”
수련을 방해받아 언짢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수의 알 때문인지 메이어의 성정이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었다. 첫 번째 부하가 반항기 소녀처럼 툴툴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약속된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불렀다. 슬슬 물어봐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약속 말입니까?”
“적무도에서 나의 부하가 되겠다고 했던 약속 말이다. 그 기간인 1년이 어제 날짜로 끝났다. 마나의 약속이 끝났다는 것은 느꼈을 텐데.”
“어제 갑자기 기운이 빠진 게 그거 때문이었나.”
메이어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나를 쳐다봤다.
“대장,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설마 이런 쓸모 없는 정보를 주려고 수련 중인 저를 일부러 부른 것은 아니겠지요?”
맞다고 하면 덤벼들 기세였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마나의 약속이 끝났으니 이제 너는 자유다. 앞으로 어떻게…….”
“기가 막히는군요.”
메이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대장, 이제 와서 어쩔 거냐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를 포함해서 어느 누구도 마나의 약속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떠나갈 것 같았으면 적무도에 있을 때 진작 떠났을 것입니다. 대장은 충성심 때문에 마나의 약속을 걸었는지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투사의 충성심을 마나의 약속 따위로 얻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른 거지? 죽음조차 불사하고 말이야.”
“그거야 당연히…….”
메이어가 씨익 웃었다. 다섯 살 철부지 아이와 같은 장난스러운 미소였다.
“재미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대장과 함께 있는 것이.”
“어거지군.”
“어거지입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투사란 원래 그런 인종인 것을.”
메이어가 다시는 이런 시답잖은 것으로 부르지 말라며 건방지게 말하곤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가기 직전 내가 물었다.
“정말 재미있나, 지금의 삶이?”
메이어가 흘끔 돌아보며 대답했다. 여태껏 보지 못한 환한 미소를 입가에 한가득 머금은 채.
“재미있어 미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재미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결코 투사들이 대장을 배신할 일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지요.”
“앞으로 더욱 재미있어질 것이다. 나중에 겁먹고 도망치지나 마라.”
“기대하겠습니다.”
메이어가 방문을 닫고 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하 몇 명을 더 불러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었다. 나를 떠나고자 하는 투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은 투사의 의사를 확인하는 작업은 웰런에게 넘겼다. 웰런조차 그런 불필요한 짓을 왜 하냐며 나를 구박했다.
투덜거리며 사라지는 웰런의 뒷모습을 보자 쓴웃음이 나왔다. 수십 일 동안 고민하던 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부하들이었다. 모자라는 것은 오히려 대장인 나였다.
훌륭한 부하들에게 보답하는 길.
그것은 바로 그들을 헛되이 죽게 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더욱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나.”
나는 안주머니 근처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마치 밀린 숙제처럼 마음 한편에 계속 남아 있던 일을 해야 할 때인 듯했다.
어차피 당분간 아레나는 내가 있으나 없으나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어느새 밤이 끝나고 새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태양이 떠오르자 빠른 속도로 어둠이 소멸되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지도를 꺼냈다.
“바르디엘. 현자 바르디엘.”
지도에 적힌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설렘과 흥분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출발 준비는 간소했다. 목적지의 특성상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웰런에게만 말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곧바로 마렉이 찾아왔다.
“제발 나 좀 데려가!”
마렉이 방문을 열어젖히며 외쳤다.
“어딜?”
내가 모르는 척 되묻자 마렉이 안달이 난 표정으로 애걸했다.
“이곳에 더 있다간 아마 난 말라 죽을 거야.”
두툼한 뱃가죽을 가리키려다 너무 유치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무슨 일인데? 다른 부하들은 다 재미있어 죽겠다는데 왜 네놈만 난리를 떠는 거냐?”
“그놈들은 나를 괴롭히며 좋아하는 변태들이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쌓인 게 많은 듯 마렉이 울분을 토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웰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메이어가 흡수한 마수의 알은 바람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반면 마렉이 흡수한 알은 바위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메이어는 바람처럼 빨라졌고, 마렉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리치는 헬 오브 인피니티와 더불어 한 가지 수련을 더 실행했다.
처음 계획과 달리 투사들은 헬 오브 인피니티의 강도를 일정한 기준 이상으로 높일 수가 없었다. 가상의 세계에서 경험한 죽음의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투사들에게 심한 후유증을 남겼다.
하긴 수백 번씩이나 심장이 뽑히고, 목이 잘려도 미치지 않고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나 같은 인간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었다.
어그러진 계획을 보완하기 위한 방법이 필요했다. 리치는 투사들이 헬 오브 인피티니에서 얻은 깨달음을 실전에서 사용하게끔 만듦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메이어와 마렉이 투사들의 대련 상대로 낙점되었다. 투사들 중 가장 강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얻은 새로운 힘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바람의 힘을 얻은 메이어는 투사들의 공격을 전부 회피할 수 있었다. 바위의 힘을 얻은 마렉은 투사들의 공격을 전부 받아 낼 수 있었다.
투사들은 전력을 다해도 괜찮을 최상의 연습 상대를 얻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다.
“젠장! 매일매일 공격 한번 못 해 보고 방어만 죽어라 해야 되는 내 마음을 알아!”
마렉의 울분은 당연했다. 작전을 무시할 정도로 싸움을 좋아하는 놈이 샌님처럼 방어만 하고 있으려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으리라.
뭐, 그거야 이놈 사정이고.
“아무도 네놈보고 이곳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는데? 마음에 안 들면 이곳에서 나가든가.”
마렉은 상처 받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우리 사이니까 이러는 거다. 던져 버리고 싶은 악연이잖아.”
무덤덤한 내 반응에 마렉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어쨌든 난 따라갈 거니까 알아서 해!”
쾅!
문을 세차게 닫으며 마렉이 방을 나갔다.
평소 같았으면 무시해 버렸겠지만, 이번만은 솔직히 고민이 되었다.
역사상 최고의 발굴로 기록될 현자 바르디엘의 마굴이었다. 무슨 보물이 숨겨져 있을지 몰랐다. 그 보물을 마렉이 탐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이고 있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로 마굴의 주인이 현자 바르디엘이란 것이었다.
마굴은 마법사가 자신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만든 은신처였다. 다시 말해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마굴의 마법사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해 마굴이 들키지 않게끔, 혹 들켰다 하더라도 안으로 진입할 수 없게끔, 함정을 만들어 놓기 일쑤였다.
현자 바르디엘이 만든 함정은 역대 그 어떤 마법사의 마굴보다 위험할 것이다. 마렉이 함께 간다면 마굴의 함정을 돌파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터였다.
“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벌컥!
문이 열리면서 리치가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선언했다.
“이번에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웃기는 소리.”
대체 어디서 정보를 듣고 오는 거지. 웰런이 퍼뜨렸나.
“어쨌든 따라가겠습니다. 그럼 이만.”
말수가 적은 놈답게 마렉처럼 궁상스러운 별명을 늘어놓진 않았다.
거절의 이유를 미처 말하기도 전에 리치가 휙 방을 나갔다.
“젠장.”
리치는 언젠가부터 나를 겁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리치의 판단이 옳았다.
헬 오브 인피니티 하나만으로도 리치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리치가 없다는 것은 곧 실패를 뜻하게 될 만큼, 현재 리치의 위상은 한없이 높았다.
실수라면 실수였다. 하지만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실수였다.
“젠장!”
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방문을 향해 집어 던졌다.
4일 후.
달이 하늘의 중앙을 슬그머니 넘어갈 무렵 아레나를 떠났다. 일행은 모두 셋이었다.
나와 리치 그리고 마렉.
“저 음침한 마법사는 왜 데려가는 거야?”
마렉이 은근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네놈과 마찬가지다. 무작정 쫓아가겠다고 하더군.”
“난 마법사는 진짜 싫은데.”
구시렁거리는 마렉의 얼굴을 흘끔 살폈다.
마법사가 리치인 것을 알면 아마 기절할 테지.
“나도 마법사가 싫어.”
나는 리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리치는 마치 귀머거리가 된 것처럼 내 말을 무시했다.
나와 리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눈치챈 마렉이 불편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아레나를 떠나자마자 향한 곳은 인적이 드문 산이었다. 그렇게 산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목표는 대륙의 남서쪽을 지배하고 있는 왕국 에르마였다.
에르마 왕국은 자타르 왕국, 리칸 왕국과 함께 남부 연합 아스가르드의 세력을 삼분하고 있는 거대 왕국이었다.
현자 바르디엘의 마굴은 에르마의 중심부에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지?”
마렉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창백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일주일 내내 산속을 달렸다. 인간이라면 피로가 한계까지 쌓일 때가 된 것이다. 물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나와 인간이 아닌 리치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지만.
“메가 힐!”
부드러운 빛이 마렉의 몸을 감쌌다.
회복 마법을 통해 간신히 한숨을 돌린 마렉이 본격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왜 마법사 길드의 텔레포트진을 이용하지 않는 거지? 그러면 에르마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잖아. 왜 이렇게 힘들게 뛰어가는 거냐고!”
“말했을 텐데. 최대한 은밀하게 가야 한다고.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 동네방네 떠들고 싶어?”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산으로만 갈 건 없잖아! 평범한 여행자처럼 마차를 타고 가도…….”
“마굴이다. 그것도 최악의 암살 집단인 나이트워커가 혈안이 돼서 노리는 마굴이다. 그 인간 백정 놈들을 네가 다 상대한다고 약속하면 네 말대로 해 주지.”
“……쳇!”
마렉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토라졌다.
바람의 힘을 얻은 메이어는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고, 바위의 힘을 얻은 마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연령이 낮아졌다. 아니, 원래 낮았든가.
어쨌든 마렉의 불만을 잠재운 뒤 계속 발을 놀렸다.
10일 후 에르마 왕국의 국경선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겼다.
“여! 형씨! 오랜만이군.”
이름이 아마…… 칼렙이었던가.
“이런 우연이! 이곳엔 어쩐 일이야?”
루미가 흥분한 목소리로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일부러 사람을 피해 도망치듯 이동했건만 어느새 나타난 두 사람.
그때도 그랬다. 나이트워커의 암살자를 피해 몰래 도망치던 중 우, 연, 히, 조우했었다.
루미의 말처럼 이번 역시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연은 희소하기 때문에 우연이다. 우연이 겹친다면 그것은 곧 필연이란 뜻이었다.
무엇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든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나와 이 두 사람, 정확히 말하면 나와 루미를 연결하는 하나의 고리를.
오른손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꺼내 리치에게 건넸다. 반지에 새겨진 마법진을 유심히 살피던 리치가 툭 내뱉었다.
“탐지 마법이 걸려 있군요.”
예상대로 반지에 장난을 한 것이었다.
“부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반지가 가루가 되었다.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 창고에서 발견한, 나의 목숨을 수차례나 구해 준 아티팩트는 그렇게 먼지로 변했다.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지 마. 헤헤헤!”
루미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애교 있게 웃었다.
“이유는?”
나는 다크섀도우를 꺼내며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마렉이 신을 내며 도끼를 꺼내 들었다. 반면 리치는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거 보십쇼, 제가 들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칼렙이 루미의 앞을 가로막으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으으…….”
마땅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는지 루미가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숙였다.
“형씨, 살기 좀 멈추지 그래? 루미 님이 놀라시잖아.”
칼렙이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싸울 거야? 말 거야?”
싸움에 환장한 멍청이가 도끼를 휘두르며 나를 보챘다.
어쩌지…….
망설임. 갈등.
그때였다.
휘이잉!
돌풍이 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었다. 풀숲에 숨어 있던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기사가 우리를 에워쌌다.
“뭐, 뭐야? 이놈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야?”
투지를 불태우던 마렉이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휘저었다. 숨죽이고 있던 리치의 몸에서 은은하게 마나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걱정하지 마. 싸우려고 하는 게 아니니까. 물론 형씨가 달려들면 그렇게 되겠지만 말이야.”
칼렙의 능글맞은 미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기사들에게 포위되는 순간, 오히려 망설임이 사라졌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힘으로 나를 굴복시키려고 하는, 재수 없는 놈에 대한 반발심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마력이 끓어올랐다. 뿜어져 나온 투기가 바람을 일으켰다. 살기가 더욱더 핏빛으로 물들었다.
칼렙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박제된 것처럼 딱딱한 표정이었다. 그의 몸에서도 살기가 피어올랐다. 덩달아 우리를 둘러싼 기사들의 몸에서도 살기가 일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팽팽한 기세 싸움이 이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만. 모두 물러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살얼음판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칼렙의 뒤에 숨어 있던 루미가 앞으로 나왔다. 칼렙이 만류했지만 루미가 가볍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사뿐사뿐 걸어온 루미가 내 앞에 섰다.
칼렙과 기사들의 살기가 최고조에 다다랐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찌릿찌릿했다.
“나를 보호하려는 것뿐이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줘. 과보호라고 누누이 말해도 듣지를 않아.”
나는 귀엽게 웃고 있는 소녀를 보며, 인질로 잡으면 얼마나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지를 가늠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루미가 계속 다가왔다.
“반지에 수작을 부린 이유는?”
“너를 쫓기 위해서지.”
정말로 당연하다는 듯 해맑은 목소리였다.
“이유는?”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어? 못 본 사이에 말주변이 많이 줄었네.”
“이유는?”
루미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부순 내 롱 소드 때문에.”
“값은 이미 치렀을 텐데. 그것도 바가지를 잔뜩 써서.”
“잘못 말했네. 내가 뜻한 것은 롱 소드가 아니라 롱 소드를 파괴한 네 힘이야.”
“…….”
롱 소드를 파괴한 것은 마력이었고, 마력은 마족의 힘이었다.
“내가 전에 얘기했지? 그렇게 불길한 힘을 계속 사용하다간 신관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마족인 리치를 제외하고, 최초로 나의 힘을 알아본 인간이 심란한 얼굴로 선언했다.
“네 힘…… 마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