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쏴아아.
바람이 돛을 밀자 배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시큼한 소금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갑판은 낮잠을 자는 투사들로 만원이었다. 그들은 시원한 바람과 따뜻한 햇볕을 이불 삼아 정신없이 코를 골았다.
시커먼 사내놈들의 탁한 숨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물 위에 앉아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쏴아아.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파도 소리였다.
아레나를 떠나 적무도를 향해 항해를 시작한 지도 벌써 한 달.
근 1,000여 명에 달하는 투사와 그에 따른 무기, 식량 등을 싣고 오느라 항해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그래서인지 투사들의 짜증이 한계까지 치솟은 상황이었다. 생사를 걸고 주먹을 휘두르던 거친 사내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달간의 항해는 고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평화로운 낮잠의 시간에서 깨어나면 이들은 평소처럼,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주먹을 날리는, 사소하지만 다소 격한 싸움을 계속할 터였다.
“여기 있었군.”
굵은 저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삐쩍 마른 사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내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슬슬 대답을 들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대답?”
나의 반문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얼굴이 더욱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전에 물었을 텐데, 이 전쟁의 목적을.”
“전에 대답했을 텐데, 배신자의 처단을 위해서라고.”
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믿지 않을 이유라도 있나?”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어째서 아레나의 투사들을 죄다 끌고 온 거지? 이렇게까지 대규모 병력이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야. 압도적인 승리다.”
“무엇 때문에?”
“떨어진 아레나의 명성을 올리기 위해서다.”
“투사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말인가?”
“원래 투기장이란 그런 곳 아닌가?”
그는 말없이 나를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그 기세가 제법 사나워 슬쩍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건 그렇고, 명색이 아레나의 주인에게 말본새가 그게 뭐지? 건방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지랄. 나에게 있어 아레나의 주인은 한 분뿐이시다. 그분만이 S 등급의 투사 에르난데스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으시지.”
“네가 말하는 바로 그, 분, 이, 나를 아레나의 주인으로 인정했잖아. 게다가 S 등급 투사라는 데 자부심이 있는 듯한데…… 붙어 보니 별것 없던데.”
“네놈! 나를 모욕할 셈이냐!”
폭풍 같은 살기가 바닷바람을 흐트러뜨렸다. 돛이 크게 출렁거렸다. 낮잠을 자고 있던 투사들이 황급히 몸을 굴리며 일어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먼저 모욕한 것은 네놈일 텐데.”
나는 정면으로 쏘아지는 에르난데스의 살기를 담담히 받아넘겼다.
에르난데스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힌 에르난데스가 휙 몸을 돌렸다.
“나는 네놈이 한 말을 믿지 않아. 반드시 알아내고 말 테다, 네놈의 진정한 목적을.”
“수고해라.”
나는 선실로 돌아가는 에르난데스의 뒤통수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낮잠을 망친 투사들이 에르난데스를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S 등급 투사를 향해 불만을 토해 내지 못했다. 대신 각자 만만한 사람을 붙잡고 분풀이 삼아 드잡이질을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갑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레나의 미래를 걱정하는 에르난데스와 같은 투사들은 나의 행동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터였다. 아레나의 주인이 아레나에 해가 되는 짓을 하리라곤 쉽게 생각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다섯 개의 거함에 1,000여 명의 투사를 싣고 적무도로 쳐들어가는 목적.
그것은 바로 적무도 투사들의 자유를 위해서였다.
사실 텔레포트를 통해 적무도에서 투사들을 빼내 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탈출한다면 그들은 영원히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적무도의 투사들, 아니 나의 부하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는 것이었다.
앞으로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선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희생해야 할 것은…….
“뭘 꼬나보는 거냐! 죽고 싶어!”
“지금 나한테 한 말이냐?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한판 해 볼까? 너 같은 건 한 손만 써도 묵사발이야!”
투사들이 내뿜는 살기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판자가 삐거덕거렸다. 금방이라도 전복될 것처럼 배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모두 닥치지 못해! 수장당하고 싶어!”
에르난데스의 오른팔로 알려진 마리우스가 소리를 질렀다.
갑판 위의 모든 투사들이 마리우스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분노와 혐오감이 공존했다.
얼마 후.
“젠장!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나.”
“에르난데스 옆에서 알랑방귀나 뀌는 놈이 큰소리는.”
금방이라도 맞붙을 것 같던 투사들이 살기를 지우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투사들의 비아냥거림에도 마리우스는 끄떡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말에 꼼짝 못하는 투사들을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이물에 앉아 투사들의 역학 관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적무도의 투사들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것.
“……이래선 휴멜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나의 마음을 더욱더 씁쓸하게 만들었다.
일주일 후.
다섯 개의 거함이 적무도 앞에 도착했다.
* * *
“어째서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이곳에 있는 것은 절벽뿐일 텐데? 적무도에 있는 유일한 항구는 저쪽이다.”
에르난데스가 적무도의 요새 쪽을 가리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이 자못 형형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반드시 나의 목적을 알아내려는 심보였다.
그 노력이 가상해 피식 웃어 주었다.
“처음에 왔던 투기장 연합의 배가 어떻게 수장됐는지 모르나? 알 수 없는 소용돌이로 배가 난파됨. 아마도 마법으로 사료됨. 보고서도 읽지 않았나 보지?”
“큭!”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아 내 말이 맞았나 보다. 나는 한결 여유로운 표정으로 S 등급의 투사를 바라봤다.
“하, 하지만 이쪽엔 정박하는 곳이 없다! 사방이 절벽뿐이야! 대체 어떻게 섬으로 들어갈 작정이지?”
“그것도 작전 보고서에 나와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설명을 해 주지.”
내가 선심 쓰듯 말하자 에르난데스가 인상을 구겼다.
“간단하게 말해서 도하다.”
“도하?”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다음 절벽까지 헤엄쳐 간다. 그러곤 그 여세를 몰아 절벽을 기어오르는 것이지. 설마 그쪽으로 올 것이라고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적무도의 바보들은 뒤통수를 맞고 궤멸. 이상 설명 끝.”
나의 호쾌하고 상세한 설명에 감명을 받은 에르난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 돼!”
“어디가 말이 안 된다는 거냐?”
“이렇게 큰 배가 다섯 척이 왔는데 저들이 모를 것 같으냐! 적무도의 배신자들이 바보일 수는 있지만 장님은 아니다. 지금쯤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걸.”
“괜찮아. 우리가 빨라. 배로 오면 바로 옆처럼 보이지만, 요새에서 이곳까지 육지로 오려고 하면 제법 먼 거리지.”
“우리가 절벽에 올라가기 전에 저들이 도착한다는 데 내 모가지를 걸지.”
“섬의 지도는 봤나 보네?”
내가 비꼬자 에르난데스가 발끈했다.
“어쩔 속셈이냐고 묻고 있잖아! 이번에도 대답을 회피할 셈이냐!”
평소처럼 그냥 무시할까 하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인정해야 하나. 모두 사라진 줄 알았던 감정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에르난데스와의 불필요한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가려는 이유. 입으로는 설명을 해 주는 척하며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행위를 변명하고 있는 이유. 그 이중성.
죄책감이 심장 소리에 맞춰 두근거렸다.
“전쟁에 희생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에르난데스에게 한 말이 아니었다. 바로 나에게 하는 변명. 나 스스로를 세뇌시키기 위한 거짓말.
“당연한 희생이라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는 에르난데스의 말을 잘랐다.
“걱정 마라. 투사들에게 희생을 전부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최강의 투사인 나와 제 잘난 줄 아는 S 등급 투사가 맨 앞에서 활로를 뚫을 테니까.”
“너와 내가 먼저 올라가 시간을 끈다는 말이냐?”
에르난데스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자진해서 선봉에 설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다.
나에 대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호의로 돌아섰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그 호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너는 그런 호의적인 생각을 한 자신을 증오하게 될 테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친분이라도 쌓으려는 것이냐, 칼리온! 정신 차려!
“알았으면 가서 준비나 해라.”
필요 이상으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종잡을 수 없는 놈이군.”
에르난데스가 고개를 흔들며 멀어졌다. 그의 어깨너머로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울 만큼 가파르게 깎인 절벽이었다.
한가로움을 저주하며 빨리 전투가 시작되길 기원하던 투사들이 절벽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에르난데스의 대화를 그들도 들었던 것이다.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반드시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패한다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아레나에서 상위에 속하는 투사 대다수와 다른 투기장에서 보내온, 그 투기장을 대표하는 투사들로 이뤄진 연합 부대였다. 게다가 블러드 배틀을 제패한 자와 대륙에 네 명, 아니 이제는 세 명뿐인 S 등급의 투사도 있었다.
투기장 연합이 내세울 수 있는 최강의 부대나 다름없었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전쟁에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작은 왕국 하나 정도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적무도의 투사들이 실력이 좋다 한들 숫자의 차이와 두 명의 절대 무력 앞에선 촛불처럼 힘없이 사그라질 게 분명했다.
투사들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풍덩!
투사들이 배 밖으로 닻을 던졌다.
마침내 기나긴 항해 끝에 투사들의 믿음이 산산이 부서질 순간이 찾아왔다.
“가자!”
나는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풍덩!
나를 쫓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 속으로 투사들이 뛰어들었다.
절벽까지 잠형으로 헤엄친 후 절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돌출된 돌부리에 손을 뻗었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불쑥 튀어나와 먼저 돌부리를 잡았다.
“네놈보다 뒤처질 수야 없지.”
에르난데스가 돌부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몸이 화살처럼 위로 솟구쳤다.
“젠장!”
나는 황급히 그의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절벽 위에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나여야 했다.
“기다려!”
당연하게도 에르난데스는 내 말을 무시했다. 그는 마치 평지를 달리는 것처럼 거침없이 쭉쭉 위로 올라갔다.
절벽 위로 그의 몸이 사라졌다.
곧이어 들려온 짧은 욕설.
“빌어먹을!”
챙!
쇠붙이 부딪치는 소리가 절벽 위에서 울려 퍼졌다.
“빌어먹을!”
나도 욕설을 내뱉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작전이 실패할 가능성은 적었지만, 이대로 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몇 개월에 걸쳐 복잡하게 계획을 짠 이유가 모두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마력을 일으켜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손날을 절벽에 박아 넣어 디딤돌을 만든 후 팔에 힘을 주어 단숨에 절벽 위까지 솟구쳤다.
거센 바람이 눈을 찔렀다.
절벽 위에 올라서니 수십 명의 사내가 에르난데스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미 한 번 맞붙은 탓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부상자가 몇몇 눈에 띄었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자는 없는 듯 보였다.
에르난데스는 자신 앞에 쓰러져 있는 적무도의 배신자를 향해 검을 들어 올렸다.
“네놈의 잘난 작전이 들킨 것 같다. 벌써 마중을 나와 있을 줄이야. 애들이 올라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
나는 말없이 에르난데스를 쳐다봤다. 그는 나의 무언을 자신만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버티기 힘들단 말이군. 하지만 하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명색이 블러드 배틀의 승자와 S 등급의 투사잖아. 한번 신 나게 놀아 보자고!”
에르난데스가 자신의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강맹한 기운이 검에 서리는 순간, 그는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덥석!
나는 잽싸게 몸을 움직여 에르난데스의 검을 손으로 붙잡았다.
“……무슨 짓이냐?”
에르난데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작전은 실패하지 않았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에르난데스가 되묻는 사이 적무도의 투사들이 하나 둘 내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에르난데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마치 악귀와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네놈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은 에르난데스가 험악한 얼굴로 내뱉었다.
“박살 낼 기회를 주지.”
나는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에르난데스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대장, 그냥 같이 끝냅시다. 안전한 게 제일이지 않습니까?”
뒤쪽에 서 있던 투사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대장? 대장이라고? 처음부터 우리를, 아레나를 배신할 셈이었구나! 배신자와 작당하다니! 네놈은 결코 편히 죽지 못할 것이다!”
에르난데스가 분노를 담아 외쳤다. 나는 그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었다.
“배신자와 작당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적무도 출신이었을 뿐이다.”
“닥쳐라! 그 어떤 이유로도 아레나와 아르테타 님을 배신한 것은 용납하지 못해!”
이성을 잃은 에르난데스가 사납게 외쳤다.
“대장, 저놈은 S 등급 투사입니다. 역시 함께 처리하는 것이…….”
나는 손을 들어 부하의 말을 잘랐다.
이것은 의식이었다. 마지막 죄책감을 죽이기 위한, 그래서 나의 마음을 기만하기 위한 이기적인 의식이었다.
나는 에르난데스에게 기회를 줌으로써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에르난데스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주는 기회였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네놈이 한 짓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군. 네놈을 없애고 다른 배신자 놈들도 전부 죽여 주마. 크크크!”
나는 말없이 주먹에 힘을 모았다. 변명을 길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르난데스에겐 안된 일이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파지직!
손바닥에서 작은 번개검이 솟아올랐다. 번개검은 탐욕적으로 마력을 빨아들였다.
파지지직!
번개검의 길이가 쭉쭉 늘어났다.
“무슨 개수작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다려 줄 것 같으냐!”
에르난데스는 10여 개의 단검을 던져 나의 행동반경을 축소시킨 후 그대로 검을 내찔렀다. 나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맛보기 같은 공격이었다.
한쪽은 최고의 필살기를, 다른 한쪽은 견제용 공격을.
그 한 번의 교차로 승부가 갈렸다.
여력을 남긴 투사가 침음성을 흘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펑!
다크 블레이드에 맞은 에르난데스의 몸이 폭발했다.
나는 기적적으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에르난데스의 머리를 내려다봤다. 그의 머리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람을 타고 피 냄새가 퍼져 나갔다.
다크 블레이드가 만든 참상을 처음 본 투사들이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흡사 악마라도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자꾸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후 질려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남은 놈들을 쓸어버려라.”
“걱정 마십쇼, 대장! 얘들아, 가자!”
투사들이 절벽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거대한 마나의 파동과 함께 하늘에서 불덩이가 쏟아졌다. 불덩이는 바다 위에 떠 있던 다섯 척의 배를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으아악! 살려 줘!”
“불이다! 바다로 뛰어들어!”
배 위에 남아 있던 투사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자아, 이제 우리 차례다.”
“오랜만인데.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
절벽 위로 기어올라 오는 투사들을 베며 부하들이 씨익 웃었다.
그때.
요새에서 몬스터와 싸우던 그때.
성벽을 넘어오던 몬스터의 목을 지금처럼 베어 버리던 바로 그때.
승리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나는 몸을 돌려 절벽을 떠났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비명을 더 이상 듣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들릴 리가 없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요새에 도착할 때까지 단말마의 비명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 * *
적무도의 투사와 리치가 요새로 돌아온 것은 정확히 2일 후였다.
리치가 방으로 들어왔을 때, 나는 창가에 서서 요새의 전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오래 걸렸군.”
“절벽 위로 기어올라 오지 않고 물속에서 버티는 놈들이 있었습니다.”
“놓치진 않았겠지?”
“바닷물에 전격 마법을 쏟아부은 후 기절해 떠오르는 몸뚱이마다 하나씩 파이어 볼을 선물해 줬습니다.”
“잠수해서 빠져나갔을 가능성은?”
“숨을 참고 반나절을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오히려 제가 앞장서서 살려 주고 싶군요.”
리치가 집요하게 캐묻는 나를 향해 비웃듯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리치와 나의 관계는 악연 중의 악연이었다.
“그렇군. 수고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어쨌든 수고했다. 그 대가로 네게 상을 주지.”
나는 리치를 향해 씨익 웃었다.
“상…… 말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속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그래서 당신을 죽이고 당신의 몸을 빼앗는 것.”
리치의 입술이 잔인하게 비틀어졌다. 그 바람에 광대뼈 부근의 피부가 조금 찢어졌다. 방부제 처리를 했음에도 불과 두 달 만에 리치의 육신이 썩기 시작한 것이다. 리치의 로브가 사람들 앞에서 벗겨질 것을 대비해 새로운 육체를 조만간 구해야 할 듯 보였다.
어쨌든 리치의 요구는 가당찮은 것이었다.
고로 기각.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리치의 말은 확고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리치의 마음이 바뀌리란 것을.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온 지도 어느덧 일주일. 배를 멈춘 곳은 작은 해안 마을의 앞바다였다.
갑판 위에는 수십 개의 무기가 널려 있었다. 갑판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배가 유령선이 된 것처럼 으스스했다.
휘리릭!
끝이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진 채찍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철썩!
옆구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피를 많이 흘려서인지 미친 듯이 목이 말랐다.
“아직 멀었습니다.”
리치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눈동자에 희열이 흘러넘쳤다. 이러다 진짜 죽는 게 아닐까 조금 염려스러웠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리치가 되고자 할 정도로 생존을 갈망하던 놈이었다.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터였다.
그래도 기분이 더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더 해야…… 하지?”
“당신의 무지막지한 체력을 탓하십시오. 이래 봬도 나름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만, 당신의 강인한 육체는 정말이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요.”
“한 방으로…… 끝낼 수도…… 있을 텐데. 나를…… 오래 괴롭히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건가?”
“그런 부분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하지만 대부분은 반드시 필요한 상처들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한 방을 위해 꼭 필요한 상처들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
사라지려고 하는 의식을 붙잡기 위해 억지로 질문을 던졌다.
리치는 채찍을 버린 후 다음에 사용할 무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날카로운 단검이었다.
“상처를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상처는 의외로 굉장한 수다쟁이입니다. 그만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리치는 말을 멈춘 후 가볍게 손목을 놀렸다.
휘익!
푹!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단검이 허벅지에 박혔다.
“큭!”
나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단검이 당신의 허벅지에 박힌 이유는 조금 전 채찍에 옆구리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단검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상처가 늘어 갈 겁니다. 크크크!”
그 상처를 만드는 것은 물론 리치 자신이었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지 리치가 음침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러한 자잘한 상처가 모여 마침내 당신은 치명적인 한 방을 맞게 될 것입니다. 상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싸웠다는 것을 증명해 줄 몸의 기록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제게 맡기십시오. 당신의 몸에 최고의 전투를 각인시켜 드리지요. 크크크!”
휘익!
롱 소드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쯤 잘린 귓불이 덜렁거렸다.
리치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몸의 상처가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한 방이 왔다.
푹!
부러진 검날이 가슴에 박혔다. 차가운 쇠붙이가 심장 바로 아래,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를 꿰뚫었다.
“이 검날을 꽉 잡고 있어야 합니다. 행여라도 검날이 빠진다면 과다 출혈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과다 출혈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리치의 생존 본능을 너무 높이 쳐준 게 아닌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으……으.”
회복 마법을 걸어 달라는 말이 신음이 되었다. 하지만 리치는 용케도 신음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걱정 마십시오. 당신의 육체적 능력이라면 최소 4일은 끄떡없습니다.”
리치의 말을 믿어도 될까 마음속에서 의심이 갈팡질팡했다.
내가 결론을 내리기도 전에 리치가 몸을 움직였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이런 상이라면 언제라도 받을 테니 종종 이용해 주시길. 크크크!”
사악한 웃음과 함께 리치가 갑판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 놓은 아레나 투사의 시체를 바닷물에 집어 던졌다.
시체를 모두 던진 리치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목덜미를 잡고 단숨에 나를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대롱대롱 몸이 흔들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가슴에 박힌 칼날이 밖으로 빠져나올 뻔했다.
나는 손에 힘을 줘 절반쯤 빠져나온 칼날을 도로 제자리에 박아 넣었다. 자기 몸을 스스로 찌르는 기분이 참으로 더러웠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칼날을 꽉 잡고 있으십시오.”
“으……으…….”
리치에게 욕을 퍼부어 주었다. 모든 욕이 신음으로 표현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제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오해를 하니 말이다.
“그럼 이만. 부디 살아 있길 빌어 드리죠. 저를 위해.”
리치가 나를 집어 던졌다. 하늘과 바다가 쉴 새 없이 뒤집어졌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공간 지각력이 사라졌을 때쯤.
풍덩!
차가운 물 속으로 머리부터 떨어졌다.
소금물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육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칼날을 붙잡고 있어야 하는데…….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대로 까무러쳤다.
* * *
나는 깨어났다 기절하기를 반복하며 바닷물 위를 2일 동안 떠다녔다. 계획대로 조류에 떠밀려 도착한 곳은 목표로 했던 작은 해안가 마을이었다.
모래사장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은 마을 꼬마였다. 녀석은 나뭇가지로 내 콧구멍을 쿡쿡 찔러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나는 마을로 옮겨졌고, 때마침 마을을 방문 중인,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리치가 미리 준비해 놓은, 마법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마을에 있는 용병 길드를 찾았다. 말이 용병 길드지 거의 주점이나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죽다 살아난 젊은이 아닌가? 벌써 걸어 다닐 수 있다니 역시 마법이 대단하긴 대단해. 근데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소? 설마 술을 마시려고? 병자한텐 술 안 파는데. 나중에 원망 듣긴 싫거든.”
용병이 아님이 확실한 디룩디룩 살이 찐 중년의 사내가 넉살좋게 말을 붙였다.
“의뢰를 하려고 왔다. 이것을 제국의 투기장 아레나로.”
나는 단단히 밀봉한 가죽 주머니를 사내에게 건넸다. 그는 주머니를 흘끔 보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급한 거요? 보시다시피 여긴 촌구석이라 의뢰를 해 봤자 엄청 오래 걸리는데. 차라리 몸이 나은 후 직접 가지고 가는 게 훨씬 더 빠를 걸세.”
“얼마나 걸리지?”
“글쎄, 한 반년 정도? 하하하!”
뭐가 우스운지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붉은색 루비를 꺼내 사내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거짓말처럼 웃음이 멎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루비에 고정되어 움직일 줄 몰랐다.
“얼마나 걸리지?”
다시 한 번 물었다.
반년이 걸린다던 배달 기간이 순식간에 3일로 줄어들었다. 덕분에 불과 일주일 만에 웰런과 메이어가 나를 찾아왔다.
“형님, 꼴이 말이 아니군요.”
웰런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망가질 줄은 몰랐다는 모습이 역력했다.
역시 상처가 이야기를 한다느니 하던 리치의 말은 모두 헛소리에 불과했나 보다. 나를 죽도록 괴롭히기 위해 지어낸 헛소리 말이다.
찝찝한 마음을 달래며 웰런을 따라나섰다.
나를 간병해 준 꼬마와 그의 부모에게 사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이 한 일이 굉장한 일이었다고 여기게끔 과하게 감사를 표했다. 이로써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상처는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오는 데는 3일이 걸렸지만 가는 데는 2주일이 걸렸다. 상처가 중해 중간 중간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레나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거동에 불편함이 없을 만큼 회복된 상태였다.
“피곤하면 나중으로 미뤄도 됩니다.”
웰런이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괜찮아.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하잖아. 빨리 끝내 버리고 쉬는 게 훨씬 편한 법이지.”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은 소리 없이 조용히 열렸다. 하지만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100여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돌아봤다.
“정말…… 살아 있었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닫았다.
살육의 전쟁이 끝나고 이제 서로 속고 속이는 기만의 전쟁만이 오롯이 남았다.
계획의 끝자락에서, 계획의 방점을 찍기 위해 그리고 나에게 목숨을 건 부하들을 위해.
나는 투기장 연합의 간부들이 있는 곳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자아, 출전이다.